아를에서 숨은 고흐 찾기

미스트랄이 부는

by 일랑일랑

아를에서 처음으로 프로방스의 미스트랄Mistral을 제대로 느꼈다.

들고간 모자는 애초에 포기하고 가방에 넣어버렸고, 머리도 질끈 묶어 올려야 할 정도의 바람이었다. 바람이 이렇게 부는데,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다.



아를은 고흐의 도시이다.

고흐가 이곳에 살면서 많은 작품을 남기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고흐의 흔적을 찾으려는 여행객들이 도시 곳곳에서 고흐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방식으로 아를을 여행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 또한 고흐의 발자취를 뒤따라 보았다. 아를의 구석구석의 바닥에 고흐가 그림을 그린 장소를 나타낸 표식이 있어서 이것을 따라 가도 되었지만 성에 차지 않아 인포메이션 센터로 직진하여 1유로인가 2유로에 판매하는 '숨은 고흐 찾기 지도(내가 붙인 이름)'까지 샀다. 큰 면에는 아를의 지도에 고흐가 그림을 그린 자리 표시를 해 두었고, 옆 날개 장에는 각 그림의 사진과 이름을 두었다. 어느 그림을 보러 어디에 갈 수 있을 지 동선을 계획하기에 딱이다. 아를에서 그린 고흐의 그림 중 현수교나 방앗간을 그린 그림은 아를 구도심에서 꽤 먼 곳에 있는데 그런 곳은 이 지도가 있어야 겨우 찾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이제부터는 숨은 고흐 찾기 지도를 이용하여 아를을 여행한 기록이다. 하지만 먼저 고흐와 아를의 관계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고 싶다.


*인포메이션 센터는 기차역을 기준으로 하면 꽤 멀다. 일단 강을 오른쪽에 두고 시내로 들어와 원형경기장을 지나 역에서 시내까지 온 방향의 큰 길로 걸으면 인포메이션 센터가 나온다. 인포센터-역 기준 보통걸음으로 20~30분은 걸릴 듯하다.

아를의 인포메이션 센터. 원형경기장을 지나 큰 길로 쭉 직진하면 나온다. 고흐찾기여행 지도를 구입할 수 있다.



어마어마한 바람이 불어오던 론Rhône 강변




1. 고흐와 아를


여행을 정리하기에 앞서, 고후의 아를 시절에 대한 정리를 해 보고자 한다.


고흐는 동생 테오의 신혼집에 얹혀 살던 파리 시절(1886~1888)을 뒤로한 채 프랑스 남부의 아를Arles(아흘)로 거처를 옮긴다. 고흐가 대도시의 생활을 싫어했다고도 하고, 자신의 발전하는 색채에 비해 우중충한 파리 대신 밝은 태양이 빛나는 남프랑스를 동경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동생의 신혼생활에 민폐를 끼치기 싫어서 파리를 떠났다는 설도 있다. 아마도 이 모든 것이 어느 정도 반영된 복합적인 이유가 아니었을까.


아를에 대한 설명을 조금 덧붙여 본다.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에 있는 도시. 론 강 하류 좌안에 위치하고 있다. 기원전 2세기에 로마군의 기지가 세워졌으며, 기원전 103년 당시 로마의 집정관 마리우스에 의해 지중해와 연결되는 운하가 건설되어 발전하였다. 4세기 말에는 갈리아 주의 주도가 되어 대주교좌가 설치되었고, 공의회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8~13세기 프랑스 남부에 있는 모든 왕국의 수도였으며, 중세에는 상항(商港)으로 크게 번영하였다. 그러나 론 강 하구가 토사의 퇴적으로 메워지자, 16세기경부터는 상권이 마르세유로 옮겨갔다.
현재 논농사의 중심지로 농산물의 집산지를 이루며, 화학·금속 등의 공업과 관광업이 발달하였다. 서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의 하나로 '갈리아의 로마'라고 부른다. 시내에는 원형 극장, 투우장, 묘지 등 로마 시대 유적과 생트로팽 대성당 등 중세 시대 유적이 풍부하게 남아 있다. 유네스코의 세계 유산 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출처: 네이버 세계지명유래사전



고흐의 아를 생활에 대해서는, 나무 위키의 글이 쉽게 읽힌다. 영문 위키피디아의 내용도 덧붙인다. 많은 이들이 아를을 고흐가 고갱과의 불화에 흥분하여 귀를 자르고 정신병원 생활을 한 곳으로 기억하지만, 아를에 도착하여 새 삶은 꾸리던 때의 고흐는 예술 공동체에 대한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아를에서 화가들의 공동체를 꿈꾸었던 그는 아는 화가들에게 모두 편지를 써보내서 화가 공동체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런 제안에 응했던 사람은 유일하게 폴 고갱정도였다. 사실 고갱 입장에서는 이 제안이 나쁠게 없었는데 고흐의 동생인 테오가 생활비를 대주는 식이었기 때문에 늘 돈때문에 시달리던 고갱에게도 공동생활은 나쁘지 않을듯 했다.
그러나 두사람은 성격차이와 그림에 대한 관점 차이로 이 공동생활은 애당초 실패할 운명이었다. 고흐는 밀레의 영향을 받아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것을 좋아한 반면에 고갱은 기억에 의존해서 창의적으로 그려내는 방식을 선호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갈등이 결정적으로 폭발한 그림은 바로 고갱이 그린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였다. 고흐의 그림에서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뚜렷한 눈동자를 보여주지만, 고갱이 그린 고흐는 흐리멍텅한 모습으로 보여졌다. 고흐는 고갱이 자신이 제정신이 아닌거라고 조롱하기 위해서 그림을 그린것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고흐는 술집에서 고갱과 술을 마시다가 술잔을 집어던지는걸로 자신의 분노를 표출했다.
결국 고갱이 온지 두달이 약간 지난 1888년 12월 23일, 고흐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켰고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라버렸다. 고갱의 회고에 의하면 고흐가 면도칼을 들고 자신을 노려보며 나타나서 자신을 찌를듯 해보였지만 노려보기만 하고서는 나가버렸다고 한다. 그 뒤에 귀를 잘라버린 걸로 보이며 잘라낸 걸 가끔 만나던 사이인 라셸이라는 창녀에게 건네주었고 그걸 보고 기겁한 라셸이 경찰에 신고했다고 한다.
1차적으로 아를 시립병원에 입원한 고흐는 이듬해인 1889년 1월 7일에 퇴원했다. 아를 시립병원의 의사 레이는 고흐의 예술성을 긍정적으로 보았는지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퇴원하고 싶다는 고흐의 열망을 받아들여주었다. 그러나 고흐는 물감이나 석유를 먹으려 드는 발작 증세를 보였고 결국 아를 시민들이 고흐를 강제로 입원시키라고 민원을 넣을 정도였다. 결국 2월에 고흐는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레이는 낮에는 집에가서 그림을 그리고 밤에 병원에 돌아오게 하는 식으로 안정을 취하게 해주었다.
나름 친하게 지냈다고 생각한 아를 사람들이 강제 입원 시키라고 청원한것에 고흐는 불만을 터트렸고 아를 시립병원에도 불만을 가진 고흐는 테오에게 다른 정신병원에 가고 싶다고 부탁했다. 결국 테오는 형이 지내면서 그림을 그릴만한 정신병원을 알아보았고 생레미의 생폴 요양원을 추천받아 1889년 5월 8일, 고흐는 아를을 떠나 생레미로 가게 되었다.


생레미의 정신병원이 마음에 들지 않아 테오의 제안으로 오베르 쉬르아즈로 떠난 고흐는 그곳에서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오베르 쉬르아즈 또한 아를처럼 고흐의 발자취를 찾기 위해 방문하는 여행객이 많은 곳이라고 하니, 꼭 한번 방문해보고 싶다.


고흐가 아를에 머물렀던 시기는 1888~1889년 사이, 햇수로 고작 2년에 걸친 시간이다. 그러나 고흐는 이 시기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여 300점에 이르는 드로잉과 페인팅을 남겼다. 위키피디아를 보면, 각 시기에 고흐가 그린 그림들이 잘 나와 있다. 고흐가 아를 시기에 그린 대표적인 그림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고흐의 팬이라면 모두 한 번쯤 본 그림들일 것이다.



The Yellow House, 1888.


Langlois Bridge at Arles, 1888.
Bedroom in Arles, 1888.
The Night Café, 1888.


Café Terrace at Night, 1888.
Van Gogh's Chair, 1888.
Paul Gauguin's Armchair, 1888.
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 and Pipe, 1889
The Courtyard of the Hospital at Arles, 1889



-그림출처: 위키피디아





2. 고흐의 발자취를 따라서


발자취 1. 로마 원형 경기장



스페인 타라고나에서 보았던 로마 원형경기장을 이곳 아를에서 또 만났다. 유럽 전역과 그 주변 지역에 널리 퍼져 있는 로마유적을 볼 때마다 로마의 번영에 대한 경외감이 든다. 이 지역의 또다른 로마 유적으로는 아비뇽 인근의 로마 수도교가 유명하다.


아를의 원형 경기장은 타원형의 형태가 잘 남아되어 있을 뿐 아니라 놀랍게도 현재까지도 투우나 공연에 사용되고 있다. 한때 관객 2만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으며, 로마 시대에는 당연히 대부분 투기장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보통 투우 하면 많은 이가 스페인만을 떠올리는데, 아를이 속한 프로방스 지역에도 투우의 전통이 아직까지 잘 이어지고 있다. 원형경기장이 있는 아를은 프로방스 투우의 중심지이다. 프로방스의 투우는 스페인의 투우와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소를 찔러 죽이는 대신 건장한 남성들이 팀을 이루어 소의 뿔에 걸려 있는 고리장식을 다치지 않고 도로 가져오는 방식이다.


장 르노가 주연하고 배경이 프로방스인 영화 '러브 인 프로방스(Avis de Mistral, 2014)'에 프로방스식 투우 장면이 잘 나타난다. 영화에서는 투우가 경기장이 아닌 거리를 따라 펜스를 쳐서 공간을 만들고 진행된다. 구경꾼들은 흔들거리는 펜스 하나를 두고 흥분한 소와 청년들을 구경하는 것이다. 아를에서는 부활절이나 9월의 첫째 주말에 소가 죽는 스페인 스타일의 투우와 거리에서 펼쳐지는 프로방스식 투어가 모두 열린다고 한다. 그라나다의 호텔에서 본 그라나다의 투어는 소를 흥분시키는 데 까지는 재미 있었지만 창살이 소의 어깨를 뚫고 피가 흐르는 순간부터 보기가 힘들어졌었다. 프로방스식의 투우라면 좀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입장료를 지불하면 그 내부에도 들어가볼 수 있지만 들어가지 않는다. 오기 전에 읽어본 글에 의하면, 원형 경기장 내부는 고색창연하게 부서지다만 돌 덩어리가 굴러다니는 그런 쇠잔하고 서정적인 모습(내가 좋아하는 분위기)이 아니라 의자와 바닥을 현대식으로 정비한 나름 깔끔한 모습이라 한다. 오래된 유적을 관광객을 위한 부서진 돌덩어리로 두지 않고 그 용도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참 재미있게도, 근대까지만 해도 원형경기장 안에 집을 짓고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경기장 앞에도 이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하늘에서 찍은 사진을 보니까 느낌이 좀 다르다.





현재에도 사용되는 만큼, 내부가 이렇게 정비되어 있다. 위키피디아 출처


고흐는 이 원형경기장의 투우 경기 장면을 아래 그림으로 묘사하였다. 아를을 찾는 여행객의 입장에서는 투우 경기를 보지 않는 이상 고흐의 그림 속의 분위기를 느끼기 어려울 것 같다.


Les Arènes


원형경기장을 지나치면 로마시대의 극장이 하나 나온다. 이곳도 아직까지 활발히 쓰이는데, 무대장치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공연을 많이 하는 모양이다. 이곳도 입장료를 지불해야 들어갈 수 있지만 옆면에 펜스가 있어 펜스 사이로도 내부를 상당히 잘 볼 수 있다.



이 곳은 원형경기장이 아니라, 그 근처에 있는 다른 로마 극장 Theater이다.




발자취 2. 아를의 정신병원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른 뒤 머물렀던 정신병원(아를 시립병원)이다. 이 정신병원의 원장은 고흐 그림의 예술성을 알아보고, 고흐가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자 낮에는 밖에 나가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고 고흐의 발작이 심해지는 밤에는 병원에 머무르며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고흐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질곡을 남긴 아를 시기이지만, 이 시기에 고흐의 색채와 선이 완성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평가된다.


1889년에 아를 시립병원을 그린 그림. 질곡의 아를 시기이지만 이 시기에 색채와 선이 완성단계에 이르렀다고 평가된다.


이 병원에 도착하고 나서야 이 곳의 정원을 고흐의 그림과 같은 구도로 보려면 2층에 올라가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참 얄궂게도 2층으로 올라가려면 입장료를 내야 한다. 고흐에게 야박했던 아를 사람들의 후대가 이제는 이렇게 고흐로 인해 여행객들의 주머니돈을 챙기고 있다는 것이 역설적이다.

















발자취 2. 밤의 카페 테라스


많은 이들이 아를 여행하면 바로 이곳을 떠올린다. 낮에 보아도 노란 차양막 덕에 그림의 분위기가 조금 난다. 정작 고흐의 카페는 커피 맛이 별로이고, 카페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바로 옆의 카페에 자리를 잡는 것이 더 낫다고 한다.


실제로 가보면 동양인이고 서양인이고 가게 왼쪽의 가게에 바글바글하게 앉아 있어 우습다. 그들이 오기 전 참고한 여행 블로그에도 '밤의 카페 바로 옆 카페에 앉으라'라는 조언이 팁이랍시고 올라와 있었을까?







발자취 3. 아를 강변 다리의 계단


지도가 없었으면 영 힘들 뻔 했다. 고흐의 그림 자리를 나타내는 표식은 있었다가 끊겼다 해서, 대략적인 위치를 알고 있을 때나 도움이 된다.


다리의 형태는 바뀌었지만 석조 부분은 변함이 없어 그때의 모습이 확실히 남아 있다.




발자취 4. 별이 빛나는 밤의 강변


내가 고흐에 빠지게 된 것은 고등학교에 다니던 때이다. 홈플러스에 공책을 사러 갔는데 그때가 한창 명화디자인이 유행하던 때라 고흐, 세잔, 모네와 같은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이 표지인 공책이 많았다. 그 중에서 내가 고른 것이 바로 이 별이 빛나는 강변의 그림이었다.


그림에는 노부부가 서로를 부축하며 걸어가고 있지만, 이곳에는 '여기가 거기인가'하고 두리번 거리는 여행객 몇몇이 있을 뿐이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그림 속 밤하늘의 별이 빛나듯 론강의 물표면도 태양빛에 반짝인다. 어김 없이 미스트랄이 불어쳐 이곳이 햇살과 바람의 프로방스임을 상기시킨다. 단연코 아를 여행 최고의 장소이다.


여기가 이곳이니 그리 알라는 이정표가 있다.




쉼 없이 반짝이는 론강.




발자취 5. 우리가 놓친 고흐의 발자취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