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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랑일랑 Oct 25. 2016

남프랑스와 영화

Provence and the Movies

2016년 8월 여행을 회고하며,


남프랑스(정확히 말하면 프로방스 지방)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예를 들면 연보랏빛 라벤더밭과 올리브 나무 잎을 비추는 노오란 태양, 태양빛에 물들어 노랗게 낡아보이는 집과 오래된 분수 같은 것들이다.  이 로망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스스로의 기억을 추적해보니, 대학교 1학년 때 한창 영화보기에 심취해 있었을 때 보았던 '마농의 샘(Manon des Sources, 1986)'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영화는 프랑스 영화 특유의 찌릿한 반전으로 끝을 맺는다. 운명에 대항해 보려고 갖은 애를 써보지만, 운명을 농락할 모든 것이 준비된 것 같은 상황에서 자신이 수십년 전에 날린 화살이 먼 길을 날아와 심장을 관통하는 듯한 그런 반전이랄까. 이를 표현하는 명배우 이브 몽탕(Yves Montand)의 연기가 인상 깊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내 의식 속에 너무나도 아리따운 여배우(에마뉴엘 베아뜨, Emmanuelle Béart)가 남았다면, 아마도 내 무의식 속에는 영화 특유의 샛노란 태양에 물든 남프랑스의 풍경이 남아 있었나 보다. 영화를 본 지 10년 가까이가 지난 올해, 가장 친한 친구가 유럽여행을 가자고 했을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바로 '마농의 샘'의 풍경이었다.

- '마농의 샘(Manon des Sources)'에 그려진 프로방스의 풍경

                              

에마뉴엘 베아뜨의 아리따운 젊은 시절을 감상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의 이름(Manon)에 대해서도 한 가지 기억이 있다. 

대학교 3학년 2학기, 미국으로 교환학생길에 올랐다. 기숙사 방에 자리잡고 첫밤을 지낸 다음날, 기숙사 식당에서 외국인 학생을 위한 식사모임이 있었는데 그날 네덜란드에서 온 마농이라는 학생을 만난 것이다. 네덜란드인 답게 금발에 키가 큰 서글서글한 학생이었는데, 자기소개를 하자 마자 내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마농... 마농.... 마농의 샘(Manon of the Spring)?" 


그 친구는 네가 어떻게 그 영화를 아냐고 물으며 신기해 했다. 자신의 이름에 대해 몇몇이 그 영화의 이름을 말하긴 했지만, 한국 사람도 아는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그 네덜란드 학생과 이 영화의 제목은 절대 내 기억에서 지워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자동차 여행이 아니었기에 뚜벅이 여행자인 내가 갈 수 있었던 곳에는 한계가 있었다. 


프랑스에서의 경로를 요약하자면, 나는 아비뇽에 근거를 두고 솔트(Sault)와 고르드(Gordes)로 라벤더 투어를 했으며, 아비뇽역에서 기차를 타고 아를(Arles)에 들렀었다. 그리고 니스(Nice)에서는 근교인 생폴드방스(Saint Paul de Vence)와 유명한 모나코(Monaco)에 다녀왔다. 


모두 버스가 닿거나 라벤더 투어회사가 들를 만한 유명한 중/소규모 관광도시로, 마농의 샘의 배경이 되었을 만한 한적한 시골 마을이나 마농이 살림에 보태기 위해 동물을 잡으려 덫을 놓아두곤 하던 수풀이 우거진 구릉 따위는 오를 만한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마농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목욕하던 이 계곡 또한 볼 수 있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운이 좋게도 라벤더 투어밴을 운전하던 독일인 가이드로부터 마농의 샘의 내용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솔트로 가는 길 가에 있는 자두, 복숭아를 판매한다는 팻말이 잔뜩 늘어서 있었고 그것을 본 가이드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프로방스 지역은 연 강수량이 매우 적은데도 올리브 외에도 자두,복숭아 등의 과일류 농업이  발달했다. 그 이유는 이 지역의 풍부한 지하수 덕분이다. 이 지하수를 이용하기 위해 모든 농지가 지하수를 이용하기 위한 관개작업이 되어 있고, 농부들 또한 이를 철저히 관리한다는 것이다.


'마농의 샘'은 아직 이러한 관개시설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 물(혹은 샘)을 둘러싼 질척한 갈등을 둘러싸고 있다. 주인공들의 비극 또한 물로 시작해서 물로 끝이 나게 된다. 영화의 내용에 대한 배경설명을 가이드의 입을 통해 들은 셈이다. 물론 가이드는 '마농의 샘'을 의식하며 이야기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면 영화에 진짜로 등장하는 지역은 어떤 지역일까? IMDB에 따르면, 이 영화는 한 지역이 아닌 남프랑스의 많은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데, 주로 글작가인 Marcel Pagnol의 고향이었던  Bouches-du-Rhône이 배경이 된다. Bouches-du-Rhône은 Provence-Alpes-Côte d'Azur에 포함되는 지역으로 마르세유, 액상프로방스, 아를 등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흔히 "남프랑스(프로방스)를 다녀왔다"하면 생각나는 많은 도시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지도상으로 보면 아래와 같다. 심지어 주연배우인 이브 몽탕은 Marcel Panol의 오랜 고향 친구였다고 한다. 그가 맨 처음에 주연 역할을 제안 받았을 때 이를 한 번 거부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자세한 설명이 없다.


-출처: Wikipedia

이중에서도 Ansouis, Vaugines, Mirabeau와 Vaucluse라는 지역의 마을이 돌바닥길과 분수를 품은 거리 등의 배경에 담겼고, 수풀이 우거지고 작은 시내가 흐르는 구릉의 모습은 마르세유 근처의 Cauges-les-Pins와 Riboux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미라보(Mirabeau) 정도를 제외하면, 발음조차 귀에 익지 않은 마을들이다.


비록 이 작은 마을들을 들러본 것은 아니지만, 유명한 관광지 뒷편 몇몇 한적한 뒷골목 어귀에서, 독일인 가이드가 운전하는 라벤더 투어 밴의 차창 밖에서, 나는 내가 그려왔던 남프랑스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다음은 내가 여행에서 찍어 온 사진들이다.


이 라벤더 투어에 대한 생각은 다음 포스팅에서 다루어 보고자 한다.
생폴드방스의 골목 거위. 마실 수 있는 물 (Eau potable)이라고 적혀 있지만 여행자로서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래도 목이 마르면 마시게 된다.


생폴드방스에서 니스로 돌아가는 방향의 버스 정류장

어쩌다 보니 생폴드방스와 아비뇽에서 출발한 라벤더 투어 때의 사진이 많다. 라벤더 투어는 솔트(Sault)와 고르드(Gordes)를 거치며 라벤더밭에 집중하는 반나절 코스였고, 생폴드방스에는 니스에서 버스를 타고 갔다. 






'마농의 샘' 외에도 프로방스 지역에 대한 영화 몇 편을 더 보았다.

'마농의 샘'을 고전 영화를 찾던 중에 우연히 보았다면, 다음에 나오는 '어느 멋진 순간/A Good Year(2006)'는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행 전에 본 영화이고, '러브 인 프로방스/My Summer in Provence(Avis de Mistral, 2014)'는 여행을 다녀온 후에 추억을 되살리는 의미에서 찾아 본 영화이다.




'어느 멋진 순간/A Good Year(2006)"는 '마농의 샘' 만큼 가슴 저릿한 영화는 아니다. 비교하기에는 '마농의 샘'이 너무 명작의 반열에 올라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남프랑스의 포도밭과 태양, 낡고 아름다운 프렌치 샤또와 바위산 마을 고르드(Gordes)를 화면에 담아냈다는 점은 프로방스의 풍경을 영화로 만나보고 싶은 이에게 매력으로 다가올 수 있다. 

마리옹 꼬띠야르와 러셀 크로 주연의 '어느 멋진 순간(A Good Year)'
Gordes에서 카페를 하는 여주인공을 만나러 온 러셀 크로.


도시인이 어릴 적 추억이 담긴 시골로 돌아가 그곳의 아름답고 까칠하고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여인과 만나 도시인의 때를 벗어내고 그 시골마을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는 이야기는 상당히 상투적이지만....오히려 여인과 포도밭 관리인과 삼촌의 딸을 뒤로 하고 도시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관성의 고리를 그려내었다면 더 내 취향에 맡은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보여지는 샤또의 모습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그것만으로도 남프랑스를 다녀왔거나 갈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볼 가치가 있다.

-'A Good Year(2006)'에 등장하는 샤또(Chateau)의 모습.

                      


'My Summer in Provence(Avis de Mistral,2014)'를 보게된 계기는 상당히 운명적이다.

남프랑스를 다녀온 지 고작 한 달, 습관적으로 소규모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영화목록을 보던 중 이 영화를 발견하고 바로 함께 여행을 다녀온 친구에게 카톡을 했다. "남프랑스가 나오는 영화래!"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속전속결로 영화를 예약하고 바로 다음날 퇴근을 하자마자 이수 아트나인에서 만나기로 했다.



장 르노(Jean Reno)에 대한 믿음과 프로방스에 대한 향수(아비뇽역이 나왔을 때에는 환호성을 질렀다!)로 한치의 의심도 없이 보게 된 영화였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왔을 때 약간의 아쉬움은 남았다. 


물론 장 르노의 왕년에 대한 감상자들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코믹 추격씬에서는 상당한 위트가 느껴졌고, 영화 속의 배경이 되는 소담하고 빈티지 매력이 넘치는 시골집과 프로방스의 풍경은 무척 매력적이다. 귀여운 빨간 트럭을 타고 온 가족이 달려나가는 장면에서 보이는 들판으 모습은, 내가 그곳에서 차창 밖으로 본 풍경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하지만 가족 간의 화해라든지, 청소년기의 마찰이라든지 하는 주제가 균열진 벽에 알록달록한 찰흙반죽을 그냥 덧대어 놓은 듯 살짝 어설프게 마무리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아비뇽을 찾는 여행자라면 누구나 거칠 수 밖에 없는 아비뇽 역이 영화에서 상당히 중요한 배경이 된다.    -출처: seeprovence.com



장 르노는 그곳에서 올리브 나무를 돌보거나, 정원을 가꾸거나, 친구들과 술집에 서서 술을 거나하게 마시는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그와 그 친구들의 대사에서 드러나는 파리지앵에 대한 프로방스 사람들의 생각이 재미있다. 자신의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랄까.... 심지어 차로 1시간 정도면 가는 마르세유마저 그곳은 대도시이기 때문에 프로방스가 아니야! 하는 비판을 한다.


그러고보면 "A Good Year"에서도 Gordes 출신인 마리옹 꼬띠야르가 그런 대사를 한 것 같은데 ("맥도날드를 찾으려면 아비뇽에!" 였나) 이 지역 사람들의 속마음이 진실로 그러하다면 참 재미있는 일이다. 


장 르노의 젊은 날의 친구들이 술자리에서 기타를 치며 "I was born under a wondering star"를 부르는 장면은 살짝 작위적이면서도 그러면서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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