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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랑일랑 Apr 12. 2017

주인도, 손님도 개고생한 악마의 요리

시금치 리코타 소를 넣은 세이지 버터 소스의 또르뗄리니 파스타

새로운 재료가 생기면 버리지 않고 남김없이 다양한 요리에 사용하겠다는 집념으로 기어코 일을 벌이는 것이 패턴이 되어버렸다. 이번에는, 하필이면 손님을 초대해 놓고 일을 저질러버렸다.


사건의 시작점은 코스트코에서 구입한 리코타치즈 한 통이었다. 한 통의 사이즈가 꽤 커서, 이미 리코타 팬케이크와 시금치 리코타 엠빠나다를 열 개나 만들었는데도 겨우 절반은 썼나 할 정도였다. 은근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생치즈의 특성상 언제 시퍼런 회색, 혹은 주황색 곰팡이가 피어오를지 모른다. 나는 거의 집착적으로 리코타 치즈를 이용한 레시피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리코타 치즈를 이용한 요리로 할 만한 것들을 추려보니 다음과 같았다.


[이미 만듦]

-시금치와 리코타치즈를 넣은 엠빠나다(스페인식 만두? 파이? 요리)

-리코타 수플레 팬케이크


[도전할 만함]

-리코타 치즈 쿠키

-이탈리아식 리코타 치즈케이크

-인도 디저트인 말라이 페다(Malai Peda)

-리코타 치즈를 넣은 시금치 크림 파스타

-세이지 버터 소스의 시금치 리코타 또르뗄리니 파스타


왼쪽부터: 리코타 치즈쿠키, 리코타 치즈케이크, 말라이 페다

왼쪽부터: 리코타 치즈를 넣은 시금치 크림 파스타, 세이지 버터 소스의 시금치 리코타 또르뗄리니 파스타



그날따라 왠지 식사 거리를 만들고 싶어서 쿠키나 케이크 같은 디저트는 뒤로 미루어두었다. 마침 엠빠나다 반죽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반죽에 대한 자신감이 붙은 상태였다. 까짓 거 파스타 반죽을 만들어 또르뗄리니를 만들면 되겠다 싶었다. 항상 굳게 믿고 따르는 Gennaro의 레시피 영상이 유튜브에 참고용으로 든든히 버티고 있기도 하고.


그러나, 고려하지 않은 결정적인 한 가지 요소는 나의 자취방에 파스타 반죽을 납작하게 밀어줄 파스타 기계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냥 밀대로 밀면 되겠지, 그렇게 어림 짚은 것이 크나큰 실수였다.


기억하시라. 가정에서 파스타를 만드려면 이런 파스타 메이커(pasta maker)가 있어야 한다! -사진출처: ebay.com


시작은 그리 불길해 보이지 않았다. 파스타를 만들어 먹기 전날, 신나게 혼자서 파스타 반죽을 할 때까지는 말이다. 지난번에 새로 산 거대한 접시가 널찍한 것이 파스타 반죽을 하기에 딱이라서 은근 기분이 들뜨기까지 했다. 사실, 즉흥적으로 결정한 것이긴 하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파스타 반죽을 하게 된 것이었다.



[파스타 도우 만들기 참고 영상]

Perfect Pasta Dough with Gennaro

https://www.youtube.com/watch?v=ESz55eORW44


레시피 영상을 돌려보니 제나로는 세몰리나밀과 중력분(all purpose flour)을 썼다. 나는 마침 집에 중력분이 똑 떨어졌고 세몰리나 밀은 도통 어디서 구할 수 있을지 알지도 못했다. 그나마 집에 있는 대로 박력분과 강력분을 섞어서 2컵을 썼다.


보통 파스타 반죽 1인분에 달걀 1개에 밀가루 1컵을 쓴다고 한다.(원래는 1컵보다는 100g이 정확. 사실 한 컵이 정확히 100g이 되는 게 아니라서 정확하게 하고자 한다면 부피 계량보다는 무게 계량을 하는 것이 낫다고 한다) 나는 2인분을 만들고자 하니 그럼 달걀 2개에 밀가루 두 컵을 쓰면 되겠다.


밀가루 100g에 달걀 하나를 넣고 치대면 대충 반죽 1인분 정도가 나온다고 한다.


파스타 반죽을 만드는 것은 어찌 보면 굉장히 단순한 일이다. 밀가루에 달걀을 넣어 섞고, 질감을 보아가며 필요하다면 조금씩 물을 더해 반죽하면 되는 것. 어려운 것은 반죽의 원리가 아니라 '반죽의 모양이 잡힐 때까지 손으로 치대며 반죽한다'는 설명 이면에 생략된 노동이다.


흐물흐물 끈적끈적한 이 녀석들이 파스타가 된다!


예를 들어, 처음에 포크로 휘휘 저어 달걀과 밀가루를 섞어 놓으면 반죽은 대충 이런 모습이 된다. 물에 불린 휴지조각처럼 무질서한 작은 반죽이 모여 매끈매끈한 파스타 반죽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생략된 모습은 절대로 우아하지 않다.


달걀과 밀가루가 만나 동그란 파스타 반죽이 나오기까지 생략된 장면은 손가락 사이에 끈적하게 들러붙는 질고 잘은 반죽 덩어리들과 아직 바닥에 허옇게 남아있는 밀가루 간의 광활한 격차를 줄여 한 덩어리의 매끈한 반죽으로 뭉쳐내는 일이다. 수분기의 빈부격차를 줄여 동질성을 공유한 한 집단을 만들어내다보면, 이 작은 반죽 덩어리를 뭉치는 것도 힘든 일인 사람이 사는 사회를 통합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지, 사회 대통합이란 얼마나 유토피아적인 어구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훨훨 날아 자취방을 벗어나는 동안 몸은 쉬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움직인다. 제나로의 동영상만 보아도 낡은 나무 작업대가 제나로의 팔힘을 못 이겨 그의 반죽질과 장단을 맞추어 삐걱거리는 소리를 마이크 너머로 들을 수 있다. 별별 생각을 계속하다 보면 조만간 반죽이 끝나겠다는 희망적인 느낌을 손끝으로 조금씩 느낄 수 있다. 제나로는 반죽이 완성되는 속도는 반죽하는 사람이 얼마나 힘이 센지에 따라 다르다고 일축한다. 제나로는 3,4분이면 반죽을 완성한다지만 나 같이 실속 없이 팔뚝만 굵은 약골에게는 택도 없는 시간이다.



이렇게 동그랗게 모양이 잡힌 반죽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사람 구실은 할 수 있을까 걱정거리만 안겨주던 말썽꾸러기 아들이 어느 순간 철이 들어 제 몫을 다하는 인간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요약해서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수분이 날아가지 않도록 반죽을 랩으로 싼다. 냉장고에 넣어둔 반죽은 하루 정도는 거뜬히 괜찮은 상태로 버틸 수 있다. 내일을 위해 반죽을 꽁꽁 랩으로 감싸서 냉장실 목 좋은 곳에 소담히 밀어 넣었다.



그래, 여기까지는 혼자서 북 치고 장구치고 그럭저럭 재미가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 날이었다.






파스타 반죽을 한 그다음 날에는 근무하는 내내 퇴근해서 만들게 될 파스타가 자꾸만 생각나서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요리의 세계란 얼마나 방대하고 위대한가. 이번의 도전은 나에게 어떤 만족감과 기쁨을 줄지!


순간 그 결과물을 함께 나눌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반죽하고, 또르뗄리니를 빚어내고, 소스를 만들어 예쁘게 담아내었는데 그것을 홀로 먹고 남은 녀석들을 락앤락 용기에 담아 냉장고에 집어넣으면 어딘가 굉장히 외롭고 쓸쓸할 것 같았다. 함께할 누군가가 필요하다.


다행히 섭외할 만한 사람이 있었다. 마음이 잘 통하고 따뜻한 직장동료이다. 물어보니 오늘 저녁에 일정이 없다 한다. 잘됐다! 저희 집에 오실래요? 제가 오늘 좀 재밌는 요리를 할 거거든요! 그것이 개미지옥으로의 초대 인지도 모르고, 나는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그녀를 자취방으로 초대했더랬다.



파스타 반죽은 이미 어제 다 해두었으니, 이제 또르뗄리니 안에 넣을 소를 준비하고 또르뗄리니를 빚고, 살짝 삶은 후 버터 소스에 요리하는 것이 남았다. 자취방 구석에 앉은뱅이 상을 차려 손님이 앉을자리를 마련해놓고 웰컴 푸드로 냉동해둔 엠빠나다를 녹여서 홍차와 함께 내었다. 쫌만 기다리세요! 얼른 또르뗄리니 소를 만들게요! 일찌감치 퇴근하는 길 30여분 남짓 그녀에게 오늘 할 요리에 대해 설명을 다 해둔 상태였다. 대략적인 조리순서까지도. 그렇게 그녀의 긴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참고한 레시피 영상:세이지 버터 소스의 시금치와 리코나 토르텔리니]

Spinach & Ricotta Tortellini

https://www.youtube.com/watch?v=rguMNma4Drc

소에 들어가는 재료부터, 또르뗄리니 반죽법까지 자세하게 보여주는 친절한 동영상이다.




[시금치 리코타 토르텔리니 속재료]

-리코타 치즈 500g

-데쳐서 잘게 자른 시금치 500g

-빵가루 150g

-달걀노른자 하나

-소금, 후추 약간

-넛멕 한 꼬집

-파마잔 치즈 2 테이블 스푼


토르텔리니 안에 들어갈 속재료들. 빵가루는 시금치나 치즈로 인해 수분기가 너무 많아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추가하는 것인듯 하다.



속재료 만들기는 간단하다. 시금치는 살짝 데쳐 잘게 썰고, 나머지 재료를 골고루 잘 섞는다. 빵가루가 없으면 식빵 같은 식사용 빵을 전자레인지에 30초 정도 데웠다가 딱딱하게 식혀서 믹서로 갈면 된다. 내가 시금치의 물기를 짜내려고 끙끙 대는 것을 본 손님이 "제가 뭐 좀 도와드릴까요?"라고 말하며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아뇨, 괜찮아요~쉬세요,라고 말하기에는 나도 시금치 물기를 짜는 일 때문에 상당히 정신이 없는 상태. 그녀에게 빵가루를 만드는 것을 부탁했다. 친절하게도 그녀는 전자레인지에 말린 식빵과 핸드 믹서를 넘겨받아 앉은뱅이책상 쪽으로 돌아가 빵가루를 곱게 갈았다. 


생각보다 속재료를 준비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있었다. 바쁜 마음에 부엌에서 우왕좌왕 하자 그녀가 다시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속재료를 한데 집어넣고 주걱으로 잘 섞는 작업도 그녀가 맡았다. 그녀가 앉은뱅이 책상 자리로 돌아가 실리콘 주걱으로 속재료를 골고루 섞는 사이, 나는 냉장고에서 어제 만든 반죽을 꺼냈다.



반죽을 반으로 갈라보니 나름 인터넷에서 본 반죽 사진과 비슷한 모양이 나왔다. 은근 자신감이 붙었다. 어제의 고생을 떠올리며 만족감이 속에서 뭉게뭉게 솟아나려는 찰나였다.



또르뗄리니를 반죽하기 위해 파스타 반죽을 밀대로 미는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밀대로 파스타 반죽을 얇게 미는 작업이 무지막지하게 힘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체중을 실어서 여러 번 밀대를 굴려도, 반죽은 절대로 일정한 두께 이하로 얇아지지 못했다. 오히려 어느 순간부터는 좀 얇게 밀리는가 하더니 밀대가 지나가자마자 바로 원래보다 더 작은 사이즈로 수축해버린다. 반죽은 4분의 1도 채 밀지 못했는데, 벌써 손바닥이 아프고 팔에 힘이 빠졌다.


파스타 소를 잘 섞어서 나에게 넘긴 후 잠시 핸드폰을 만지고 있던 손님이 나의 신음소리를 들었나 보다. "뭐 좀 도와드릴까요?" 그녀가 걱정과 친절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쯤이면 나는 이미 이미 일이 잘못되고 있음을 깨닫고 정신이 나가서 그녀의 도움을 사양할 만한 여유조차 없어진 상태였다. "OO 씨, 반죽을 미는 게 생각보다 너무 힘들어서요~ 죄송한데 파스타 빚는 것 좀 도와주실래요?"


또르뗄리니Tortellini는 원래 이렇게 생겼다. -사진출처: dining.columbia.edu


그녀에게 또르뗄리니 빚는 것을 전임하기 전에, 제나로의 영상을 함께 보면서 또르뗄리니 빚는 법을 익혀보았다. 또르뗄리니는 딱 시장에서 파는 고기만두나 김치만두처럼 생겼다. 네모 모양으로 자른 얇은 반죽 가운데에 소를 동그랗게 모아서 올리고 반죽을 반으로 접어 삼각형 모양을 만든다. 이것을 살짝 굴려 접어 가로로 긴 형태를 만들고, 긴 양끝을 돌려서 이어 붙여 동그란 만두 모양을 만든다.


네모 모양으로 자른 반죽 가운데에 소를 조금 올리고





반을 접어 삼각형을 만든다.




삼각형을 살짝 굴려접어 가로로 긴 형태를 만들고




긴 양끝을 이어 붙이면 만두처럼 생긴 또르뗄리니 완성!


그녀는 앉은뱅이 탁자 자리를 뒤로 하고 싱크대 앞, 내 바로 왼쪽에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또르뗄리니를 빚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반죽을 납작하게 미는 역할을 도맡았다. 아무래도 이 역할만은, 집주인의 자존심을 걸고 손님에게 맡겨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힘이 부치면 밀대를 손으로 누른 채로 제자리 뛰기를 하다시피 하며 온몸을 다해 반죽을 미는 작업을 계속했다. 


동영상에서 제나로는 파스타 메이커(반죽기계)에 반죽을 넣고 여러 번 통과시켰다. 그렇게 반죽을 반복해서 통과시키면 어느새 동그랗던 반죽이 입으로 옆에서 나직이 바람을 불면 파도처럼 물결이 칠 정도로 얇게 변했다. 하지만 내 반죽은 자꾸만 두꺼워졌다. 손바닥이 점점 얼얼해졌던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조용히 또르뗄리니를 빚던 손님이 "이거 좀 두꺼운 거 같은데요?" 하며 밀대를 가져가 조금씩 반죽을 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니에요, 제가 그것 밀게요~"하고 그녀에게서 도로 밀대를 가져와 반죽을 밀었지만, 점차 그녀에게 밀대를 빼앗기는 빈도가 잦아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밀대를 쥐고 있는 동안에는 내가 또르뗄리니를 빚었다.




또르뗼리니 반죽을 빚으며, 우리의 심정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여주는 사진. 그나마 또르뗄리니 모양을 하고 있는 녀석들이 초반에 완성된 녀석들이다.


반죽이 절반 이하로 남은 시점부터 손님과 나 사이에는 말이 없어졌다. 우리의 또르뗄리니는 점점 또르뗄리니가 아닌 무언가로 변해가고 있었다. 반죽은 두께가 두꺼워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표면이 메말라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만두 형태의 또르뗄리니를 빚기가 어려워져서 라비올리처럼 그냥 반을 접어 가장자리를 꼬집어서 소가 새어 나오지 않게 했다. 크기도 제각각이어서, 이건 뭣도 안 되겠다 싶은 사이즈의 반죽은 속이 삐져나오지 않을 정도로만 대충 굴려버렸다.




모든 반죽이 또르뗄리니 비스무리한 것으로 다 빚어지자, 시간은 벌써 8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앉으세요, 앉으세요, 이젠 제가 할게요!" 나는 정신이 번쩍 들어 그녀를 다시 앉은뱅이책상이 있는 자리로 돌려보내고 냄비에 물을 끓였다. 또르뗼리니를 데치기 위해서였다. 소금을 넉넉히 뿌려 물의 소금 농도를 맞추고 물이 끓기를 기다렸다. 생면 반죽으로 만든 파스타는 건조한 파스타와 달리 금방 익기 때문에 끓는 물에서 동동 떠다닐 정도가 되면 바로 건지면 된다. 끓는 물에서 꺼낸 또르뗄리는 파스타 소스를 만들 때까지 잠시 따로 둔다.



세이지(sage) 버터 소스 만들기는 정말 간편하다. 중불로 달군 팬에 버터 4~5 테이블스푼 정도를 녹인 후, 세이지를 넣어 버터에 향을 입힌다. 원래 레시피에서는 생허브를 썼지만 나의 자취방에 생허브가 존재할 리가 없다. 건조 허브는 그래도 잘 구비하고 있는 편이기 때문에 산지 꽤 오래된 건조 세이지를 1 테이블스푼 정도 버터에 넣었다. 



버터는 잘 타기 때문에 동작이 빨라야 한다. 버터가 타기 전에 파스타 워터(파스타를 끓여낸 물. 염분과 전분기가 있어 파스타 소스에 이용하기 좋다)를 1 국자 정도 더한다. 여기에 치킨스톡 큐브를 반 개 정도 가루를 내어 넣고 잘 녹인다. 치킨 스톡은 MSG 같은 역할을 해서 소스의 감칠맛을 쫘악 올려준다. 버터와 파스타 워터를 가감하여 자신이 원하는 소스의 농도를 맞춘다.



 소스의 농도가 잡히면 소금과 후추를 뿌려 간을 더하고 따로 꺼내 두었던 또르뗄리니를 넣어서 소스와 함께 볶듯이 익힌다. 알덴테를 좋아하면 살짝만 볶아주면 된다. 하지만 나는 라비올리나 또르뗄리니처럼 속재료가 있는 파스타는 어느 정도 푹 익힌 상태를 좋아하기 때문에 레시피보다 조금 오래 볶아주었다. 파스타 반죽의 두께 차이를 고려한다면 당연히 원레 레시피보다 더 오래 익혀야 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소스가 졸어들면 파스타 워터를 추가하면 된다.




아아, 드디어 파스타가 완성되었다. 포스팅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사진을 찍어야 하지만, 사진을 찍는 것도 손님에게 미안하게 느껴졌다. 시간은 어느덧 9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요리 블로거로서의 집착과 양심이 사투를 벌였다. 결국 "OO 씨, 미안해요! 이것만, 이것만 더 찍을게요!"를 연발하며 셔터를 몇 번 더 눌렀다. 




두 번째 접시에 담긴 또르뗄리니 사진까지 셔터를 한 열 번 눌렀을까, 드디어 그녀와 나는 식탁에 앉아 또르뗄리니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새로운 요리를 하면 그 요리의 맛을 음미하며 천천히 먹기 때문에 그 맛을 잘 기억하는 편인데, 유독 이 요리의 맛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맛을 어떻게 글로 표현해야 할지 감이 잘 오지 않는다. 소스는 훌륭했다. 세이지의 은은한 향과 버터의 부드러움, 치킨스톡의 짭짤함이 더해져 조화를 이루었다. 단순하지만 참 쓸모 있는 소스이다. 또르뗄리니 자체도 맛은 괜찮았다. 특히 리코타 치즈와 시금치를 넣고 삼삼하게 간을 한 또르뗄리니 속재료의 맛이 버터소스와 부드럽게 잘 어울렸다. 하지만 아무래도 또르뗼리니 반죽이 걸렸다. 어떤 녀석들은 먹을 만했지만 어떤 녀석들은 내가 먹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두께가 두껍다. 파스타 메이커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소스의 맛이 어떻고 반죽의 질감이 어떻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또르뗄리니를 먹는 내내 내 입 속을 지배한 맛은 미안함과 민망함의 맛이었다. 재밌는 요리를 한답시고 손님을 초대해 놓고, 사실상 그녀를 조수로 부려먹다시피 하지 않았는가. 어기다가 결국 사진에 집착하는 어글리 블로거의 민낯을 고스란히 들키고 말았다. 


어설픈 또르뗄리니를 우물우물 씹으며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직장동료이지만 따뜻하고 언니 같은 그녀는 얼굴 하나 찌푸리지 않고 또르뗄리니를 열심히 먹었다. 이것저것 수다를 떠는 것도 잊지 않았다. 



또르뗄리니만 다 먹었는데도 어느덧 9시가 되었다. 이대로 그녀를 보낼 수는 없어서 냉동실에 얼려둔 블루베리와 바나나, 두유를 섞어서 후식으로 스무디를 만들었다. 스무디를 먹으며 잠시 수다를 떨다가 엉망진창이 된 부엌을 뒤로하고 집을 나가 그녀와 집 근처를 조금 산책하고 지하철역까지 배웅을 나섰다. 나는 민망하면 수다쟁이가 되는데 그날 밤은 산책을 하면서도 조잘조잘 말을 참 많이도 했다. 




다음에 그녀를 초대한다면 절대로 이런 요리는 만들지 않으리, 꼭 요리를 다 만들어놓고 손님으로서 초대하리. 그러나 과연 그녀가 다음에 또 우리 집으로 오려고 할까? 따뜻한 마음씨의 여성이니만큼 뭔가 미안한 표정으로 선약이 있다고 부드럽게 거절을 하지는 않을지? 다음에 그녀를 집으로 초대한다면 그 전날 저녁에 모든 요리를 다 마쳐놓고 데워서 바로 먹을 수 있는 상태로 준비하리라. 그 점을 어필해야 할 것이다. 그녀는 이 민망스러운 또르뗄리니의 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녀의 생각을 아직 물어보지 못했는데, 아마 앞으로도 물어보는 일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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