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동안의 서울 자취방 오디세이
홀로 서울살이 10년 차. 무언가 대단한 시대를 지나온 듯 10년이라는 숫자가 거대해 보이지만, 실상은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을 얻고 퇴사를 하고 두 번째 직장을 얻는 여정 속에서 시간은 꽤나 빨리 흘러갔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정말 많이 변했다. 볼이 통통하고 입을 열 때마다 사투리가 나와서 수줍어하던 19살 소녀는 동대문 두타에서 솔기가 뜯어진 옷을 사고도 '언니'가 무서워 가게 근처를 뱅뱅 돌다 풀 죽어 집에 돌아가야 했다. 그러던 소녀는 결혼식에 초대받으면 남의 일인 양 신기하기만 하던 시기를 지나 이제 누구의 결혼 소식을 들어면 축하하는 마음 한켠이 무거워지고야 마는 나이에 이르고 말았다. 작년에는 함께 상경한 대학 친구가 결혼을 하고 서울 한복판에 멀끔한 아파트를 얻어 어엿한 '서울 시민'이 되는 것을 보았다. 그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부러웠다.
서울 살이 10년을 채울 때가 되면, 서울 어딜 가나 집, 집, 집, 집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이제는 어떤 동네에 세워 놓고 '이 방은 얼마 정도 할까?'라고 물으면 아파트는 아니더라도 원룸이나 오피스텔 정도라면 '보증금 얼마에 월세 얼마 정도 하겠네', 하고 척척 대답할 정도로 감도 생겼다. '직X'이니, '다X'이니 하는 앱에 뜨는 인기 매물이 허위 매물인 것은 척 보기만 해도 한눈에 간파할 수 있다. 기준은 단순하다. '서울 그 동네에 그 정도 집이 그 정도 가격 일리가 없잖아!'
서울에서 나고 자라 부모님과 줄곧 살아온 친구들은 오피스텔 월세를 말하면 '그렇게 비싸냐'며 놀라기도 하는데, 오피스텔은 거기에다 20만 원 가까운 관리비며 공과금이 붙는 사실을 알려주면 더욱 놀란다. 그러면 월급 받아서 집에 다 쓰는 것 아니냐고. 그래, 월급 받으면 집에 다 쓰는 게 맞다.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부평초 생활을 하는 친구들과의 대화는 이것을 전제로 깔고 간다. 그래서 1~2년마다 한 번씩 만나는 대학 동기들은 자신의 근황을 늘어놓을 때 연애 얘기 다음으로, 어쩌면 그전에 바로 집 얘기를 한다. 어디에 살고 있고, 그 동네 분위기는 어떻고, 교통은 어떻고, 시세보다 얼마나 싸게 집을 얻었고... 그다지 감성적이지는 않지만 참 흥미로운 주제이다.
외로운 홀로서기 10년, 그간 꽤나 많은 집을 거쳤다. 첫 집은 대학 캠퍼스 안에 위치한 2인 1실 기숙사였다. 1970년대에 지어진 붉은 벽돌 기숙사는 참 열악했다. 화장실과 샤워실이 한데 있었고 문은 무려 70년대에 만든 니스칠한 나무문 그대로여서 문을 닫아 놓아도 널찍하게 벌어진 문틈으로 그리마니, 노린재니 하는 벌레들이 시시때때로 기어들어왔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그해 여름 태풍이 기승을 부리던 어느 밤에 벽 한 구석의 시멘트가 그대로 금이 가고 부스러져 룸메이트 언니의 책상 위로 떨어졌던 사건이다. 애초에 꽝이었던 건물 상태에 비해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 이 기숙사는 졸업한 사생들의 추억으로만 남았다. 기존의 기숙사 건물을 다 허물고 신축 기숙사를 짓는다고 하더니 몇 주전 우연히 지나가게 된 그 자리에는 임시 컨테이너 박스가 몇 대 들어서 있었다.
그래도 서울살이 첫 해를 기숙사에서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집에 돌아오면 룸메이트 언니와 몇 마디 말을 섞을 수 있었고 저녁에 심심하면 함께 치킨을 시켜 먹는 것이 당연한 대학 동기들도 기숙사 구역 곳곳에 있었다. 대형 세탁기와 건조기가 여럿 있었던 공용 세탁실은 세탁실 보다도 편한 차림에 동기들끼리 모여 치킨을 먹는 장소로 더 사랑받을 정도였다. 룸메이트 언니 덕택일까, 걸핏하면 모여들었던 기숙사 친구들 덕택일까, 넓은 서울에 철저히 혼자 버려져 있는 느낌은 그다지 들지 않았던 첫 해를 보냈다.
서울살이 둘째 해부터는 이 모든 안전망으로부터 멀어져서 진짜로 혼자 남겨져버렸다. 원룸 자취를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새로운 삶의 방식을 터득하게 될 서울살이 둘째 해의 2월, 큰딸의 집을 얻어주신다며 부모님이 고향에서 올라오셨다. 도와주신다며 오신 것이 무색하게도, 두 분 다 성급한 경상도 사람 성미는 못 버려서 부동산 업자가 소개해준 첫 집을 덜컥 계약해버리셨다. 가파른 오르막 끄트머리에 있어서 오르내리기 힘들 것이 번히 눈에 보였고 화장실이 좁아서 변기에 앉으면 무릎이 벽에 닿을 정도였는데도. 지금의 나 같으면 이건 아니라며 찬찬히 따지고 들었겠지만 그때의 나는 상당히 어수룩했다. 부모님이 '어차피 집은 여럿 봐봤자 똑같다! 다리만 아프다'라며 일갈하시자 풀이 죽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얻게 된 첫 집은 방은 자취방 치고 꽤 컸지만(화장실, 현관을 다 합쳐서 6평은 되었던 듯하다) 방만 컸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부엌도 가스레인지 없이 싱크대만 덜렁 있었다. 동그란 핫플레이트를 집주인에게서 따로 받아 앉은뱅이 탁자 위에 올려놓고 가스레인지 대용으로 사용했는데, 김치찌개를 상에 올려두고 먹기에만 좋았을 뿐 요리를 즐기기에는 동선이 꽝이었다. 세탁기도 공용이어서 몹시 불편했다. 빨래를 넣어둔 것을 깜빡하고 있다가 아차 싶어 후다닥 내려가면 누군가가 자기 빨래를 하기 위해 내 빨래 더미를 세탁기 뚜껑 위에 아무렇게나 얹어놓기 일쑤였다. 남의 손에 의해 널브러진 내 속옷을 보는 무안함과 아픔을 피하기 위해, 빨래를 할 때는 자취방에서 시간을 재어가며 세탁기가 멈추는 시각을 기다리는 예민함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사를 했던 바로 그 해 여름 장마 기간 동안, 결국 일이 터졌다. 창이 있는 벽에 빗물이 새서 온 바닥이 물 웅덩이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지방 대도시의 방 3개짜리 아파트에서 포시럽게 자랐던 나는 그런 광경은 난생처음 보았다. 처음에는 나도 모르는 새에 물을 쏟았나, 하고 영문을 몰랐을 정도이다. 빗줄기가 거세지자 벽지는 완전히 젖어 물이 바닥으로, 침대 옆으로 줄줄 흘렀고 기어이 천장에서 물이 똑 똑 떨어지기 시작했다. 수건을 있는 대로 다 꺼내 바닥에 깔아 놓은 후, 빗속을 뚫고 동네 리빙 마트에 갔다. 작은 바가지를 두 개 사서 천장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받았다. 엄마, 아빠는 왜 이런 집을 고르게 하셨을까, 나는 왜 이런 집에서 혼자 잠을 자야 하나, 빗소리를 들으니 더욱 서러워져서 이불을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첫 자취방에서는 이것 외에도 혼자 운 기억이 많다. 부모님이 서울 나들이를 한답시고 큰딸과 놀아주기 위해 올라오셨다가 다시 집으로 가신 날에, 그렇게 싫어했던 가파른 내리막길을 따라 가족을 태운 싼타페가 떠나는 것을 보고 서러워서 울었다. 어느 날에는 동네를 알아본답시고 혼자 산책을 하다가 원룸만 가득한 언덕이 너무 어둡고 도저히 정이 가지 않아 고향의 정겨운 아파트촌을 그리며 울었다. 불이 켜진 아파트만 보면 고향집과 부모님이 생각나 울컥 솟아오르는 것이 있었다. 또 어떤 날에는 주말에 아무 약속이 없어 하루 종일 집에서 하릴없이 인터넷만 하다가 잠이 들기 전에 살짝 울었다. 고향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다면 주말에 약속이 없는 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텐데, 엄마랑 동생이랑 목욕탕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칼국수나 맥모닝을 사 먹고 서프라이즈나 영화채널이나 돌려보았을 텐데. 저녁에는 홈플러스에 따라가서 장도 보고 먹고 싶은 음식은 엄마 몰래 카트에 살짝 집어넣었을 텐데. 가족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이을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전화를 할 수 없었다. 엄마는 아무리 감추려 해도 딸의 목소리에 깔린 옅은 울음기를 금세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에.
두 번째 자취방을 얻을 때의 나는 첫 자취방을 나서던 날보다 한층 성장해 있었다. 그 사이에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다녀왔는데 그것의 영향이 컸다. 미국인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사느라 항상 주변을 의식하며 눈치를 보던 젖살 통통한 소녀는 구릿빛 피부에 어딜 가면 교포 소리를 들을 법한 자신감 넘치는 체격 듬직한 여성으로 변해 있었다. 친구 집에서 며칠을 머물며 혼자서 씩씩하게 여기저기 집을 알아봤는데, 주변시세보다 전세가가 1500만 원 정도 싼 반면에 집이 넓고 신축이라 내외부 자제도 엄청 좋은, 마법 같은 집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화장실이 자취방 화장실 답지 않게 널찍하였고 드럼 세탁기와 전자레인지도 있고 싱크대 공간도 넓었다. 1층인 게 걸리긴 했지만 쇠창살과 불투명 덧창이 단단히 붙어 있으니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창문도 대로변이 아닌 옆 건물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사생활 침해도 그리 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 1층인 것이 문제였다. 집을 얻을 때는 복도며, 벽지며, 바닥이며, 싱크대며 집 내외부의 상태가 너무 번지르르해서 애써 무시했지만 사실 그 집은 완전한 1층도, 완전한 반지하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였다. 빨래를 말려도 쉰내가 났고, 면접을 보기 위해 산 검은 정장에는 푸른 회색빛의 곰팡이가 피었다. 방 안에서는 사계절 내내 물에 젖은 이끼 낀 바위에서 나는 듯한 습한 냄새가 났다. 결정적으로, 도저히 사람이 다닐 리 없는 좁은 건물 사이에 위치한 창문 바로 앞에서 인기척을 느낀 밤, 반드시 한 달 안에 이 집을 떠나겠노라 결심했다. 그리고 곧 결국 그렇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이 쌓이고 쌓여서, 세 번째 자취방을 얻을 때에는 반드시 맞추어야 하는 조건이 너무 많아서 선택지가 얼마 없었다. 일단 층수는 4층 이상 이어야 했고, 집주인이 위층에 상주해서 이것저것 필요시 도움을 요청할 수 있어야 했다. 자동차가 다니는 대로변을 면해서는 안 되겠지만 거기에서 멀지도 않아서 밤새 유동인구가 많고 편의점이 가까이 있어 거리의 분위기가 밝아야 했다. 거기다 출퇴근의 편의성을 위해 지하철역과도 가까워야 했는데, 그때는 마침 이자율이 2%대로 떨어지기 시작한 시점이라 전세 매물이 많지 않았다. 내가 세운 몇 가지 조건을 끝까지 고수하려면 전세 자금을 2천만 원 정도 높이거나 이전에 살던 방보다 작은 방을 선택해야 했다. 안 그래도 역세권에 새 집을 얻으려면 지난 1층 전셋집 보증금에서 2000만 원 정도를 높여야 했는데, 이제 갓 회사일을 시작하게 된지라 모아둔 돈이 없어 부모님께 손을 더 벌리기가 죄송한 상황이었다. 결국 전세 자금을 높이는 대신 작은 방을 선택하게 되었다. 여태껏 이리저리 단점이 많았지만 비교적 큰 사이즈의 자취방에서 생활한지라 작은 방의 불편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이삿날이 되어 이삿집을 하나씩 들이고 나서야 내가 살게 될 방이 얼마나 작은 지를 실감하게 되었다. 자취방의 작고 크고의 기준은 빨래를 할 때 알 수 있다. 빨래를 빨래건조대에 걸고 난 후에, 방안에서 빨래건조대를 이리저리 치우며 길을 만들며 다녀야 한다면 작은 집이다. 반면 빨래건조대를 구석에 가만히 그대로 두어도 통행에 지장이 없다면 그 집은 그리 작은 집은 아니다. 아쉽게도 나의 세 번째 자취방은 전자의 경우였다. 지금 다시 돌이켜보면 화장실과 부엌을 포함해도 3평이 될까 말까 한, 고시원과 원룸의 경계에 있는 크기의 방이었다. 현관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서, 현관문을 열면 바로 장판 바닥이었다. 다이소에서 바닥 깔개를 사 와서 내 손으로 신발을 벗어둘 자리를 지정해야 했을 정도였다. 다만 싱크대, 세탁기, 가스레인지, 냉장고 등이 모두 갖추어진 '풀옵션'이라 원룸에 조금 더 가까웠을 뿐이었다.
사실 작은 집이라고 해도 워낙 내 덩치가 작다 보니 그리 크게 문제 될만한 일은 없었다. 다만 끝까지 극복하기 어려웠던 것은 중 하나는 수납공간의 부족이었다. 나는 작은 방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처음으로 물건을 사는데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물건이라고 해도 대단한 것이 아니고, 스웨터 한 벌이나 그릇 하나, 책 한 권, 가방 하나 정도의 사소한 것들이다. 방이 워낙 좁다 보니, 물건을 하나 사면 기존에 있던 물건을 하나 버리지 않고서는 공간을 만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집에 사는 동안 필요 없는 물건을 참 많이도 정리했다. 대부분의 물건은 약 20초 동안 고민의 시간을 가진 뒤에 과감히 버렸으나, 사용하지는 않아도 추억이 어려 선뜻 쓰레기통에 던져 넣기 어려운 물건들은 박스에 넣어 부모님 댁으로 보냈다. 몇 달 전에 부모님 댁의 옷방을 둘러보다 보니, 내가 보낸 낡고 추억 어린 옷들이 깨끗하게 세탁된 상태로 서랍장에 차곡차곡 들어있었다. 그 서랍장은 서울로 상경하기 전 10대의 내가 옷을 넣어두었던 서랍장이었다. 나는 떠나보낸 이후로 어느덧 잊어가고 있는 옷들을 어머니는 하나도 버리지 않고 내가 쓰던 서랍장에 보관하고 계셨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해마다 새로 세탁해서 가지런히 개켜두는 정성으로 이들을 보살피고 계셨다. 내가 부모님 댁의 공간과 엄마의 정성을 창고 겸 타임캡슐로 활용하는 이기적인 딸내미라는 것을, 추억 서린 옷을 하나하나 넘겨보며 다시 한번 상기했다.
작은 집의 두 번째 단점은 시도 때도 없이 밀려드는 갑갑함이었다. 늦은 밤에 퇴근을 해서 샤워만 하고 잠든 후 다음 날 다시 샤워를 하고 직장에 나가는 평일에는 집이 갑갑하다고 생각할 틈이 없었다. 문제는 주말이었다. 할 일이 없으면 무조건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이나 하는 나의 고질적인 습관은, 그 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더욱 강화되었다고 푸념을 해본다. 정말로 그 집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하다못해 요가매트를 깔고 요가를 하려고 해도, 요가매트를 온전히 깔 수 있는 공간도 없었다. 서서 하는 자세는 그렇다 치고 누워서 하는 자세를 하자면 책상 아래로 발을 집어넣어야 했으니 말이다. 그나마 작은 집 치고 부엌 공간이 넓은 편이어서, 요리는 자주 할 수 있었다. 그나마도 방 사이즈에 비해 싱크대가 긴 편이어서 그랬던 것이고, 밥을 먹을 때는 여전히 갑갑하기가 그지없었다. 식탁을 둘 자리는 꿈도 꾸지 않았다. 책상에서 밥을 먹거나 침대에 등을 기댄 채 앉은뱅이 탁자 아래에 무릎을 끼워 앉아야 했다. 답답해서인가, 세 번째 자취방에 살 때는 주말마다 밖을 나돌았다. 쉬는 날이라 할지라도 일찍 나가서 늦게 들어와 잠만 자기가 일쑤였다.
그래도 이 세 번째 자취방에서 4년이나 버티고 살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첫째가 돈이었다. 어차피 그 방을 떠난다한들, 돈이 웬만큼 모이지 않으면 획기적으로 더 좋은 곳, 예를 들면 오피스텔 같은 곳으로 들어가기는 힘들었다. 내가 당시 깔고 앉은 돈은 전세 5천만 원. 내가 회사를 다니며 모은 몇천만 원을 보탠다고 해도 1억은 가뿐히 넘는 오피스텔 전세는 택도 없었다. 월세로 오피스텔에 들어간다면 돈을 모으기는 더더욱 요원해진다. 아무리 오래된 오피스텔이라고 해도 역세권에 있다면 월세는 70만 원에서 시작하기 마련이다. 이 작은 자취방을 떠나지 못했던 두 번째 이유는 동네 때문이었다. 걸핏하면 모여서 담배를 피워대는 행인들 때문에 공기가 좋지 못해도, 원룸촌이라 분위기가 우중충하고 왜인지 몰라도 해가 잘 들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고 해도, 그곳은 내가 다녔던 대학교와 가까운 곳에 위치해서 내게 제2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이전보다 자주 만나지는 않아도 아는 선후배나 동기가 아직도 주변에 많이 살았고, 무엇보다 모든 것이 익숙했다. 꼭 마음에 들지는 않았어도 한번 정을 붙인 곳을 떠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작년 11월에, 나는 결국 제2의 고향에 위치한 세 번째 자취방에서 벗어나 네 번째 자취방에 자리를 잡았다. 위치도 그전에 살던 집에서 상당히 멀어져서 완전히 새로운 지역에서 새 시작을 하게 되었다. 위치 선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서울 변두리에 위치한 나의 두 번째 직장이다. 세번째 자취방인 초소형 자취방에서는 지금의 직장까지 편도로 1시간 10분이 걸렸는데, 이제는 그 시간이 30분으로 줄어들었다. 통근시간뿐 아니라 이전에 비해 모든 삶의 조건이 개선되었다. 그동안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채 동경하기만 했던 오피스텔에 살게 되었고, 층수는 무려 15층이고, 남향이라 해가 잘 들어서 빨래도 뽀송뽀송하게 잘 마른다. 곰팡이가 낄 걱정이 전혀 없고 1층에 24시간 경비원이 상주하며 순찰을 돌아서 새벽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소음에 홀로 두려움에 떠는 일도 사라졌다. 경비 아저씨 덕택에 택배를 도둑맞는 일이 없어진 것도 만족스럽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자취방의 크기가 획기적으로 넓어졌다는 점이다. 신축 오피스텔은 원룸의 사이즈가 6평에서 7평 후반 사이인데 비해, 내가 선택한 오피스텔은 지은 지 15년을 채워가기 때문에 낡은 구석이 있기는 해도 반올림한 평수가 9평에 육박한다. 부모님과 아파트에서만 살아본 이들은 자취생에게 '9평'이 얼마나 크게 느껴지는지를 알 길이 없을 것이다. 9평 원룸은 걸어 다닐 때 빨래건조대를 치울 필요가 없음은 물론이고 요가를 할 때 다리에 무언가가 치일 염려도 없다.
무엇보다 가장 감격적인 것은 꿈에 그리던 식탁을 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세 번째 자취방에서 살던 시절에 요리에 취미를 붙인 이후로 나는 요리 사진을 많이 찍었다. 사진을 찍을 때마다 나를 슬프게 했던 점은 갖은 노력을 다해 책상이나 앉은뱅이 밥상을 '식탁처럼 보이게' 해야 했다는 점이다. 흰 책상에 접시를 올릴 때는 주변의 잡동사니를 정리해서 그것이 책상이 아니라 식탁으로 보이도록 신경을 썼다. 사진은 보통 하이 앵글로 찍었다.
앉은뱅이 탁자에서 사진을 찍을 때는 더 섬세한 조작이 필요했다. 각도를 조금이라도 낮추면 침대라든지, 의자 다리라든지 하는 종아리 높이에 있는 모든 사물이 카메라에 들어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요리를 제외한 나머지 배경을 포커스 아웃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불식시키려 했다.
인터넷에서 30만 원을 주고 산 식탁세트를 햇볕 잘 드는 창가에 세워둔 지금, 나는 두려울 것이 없다. 물론 식탁 바로 왼편에 옷걸이가 있어 지저분하기는 하지만, 그 정도를 사진에서 잘라내는 것은 이전의 노력에 비하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실 내가 브런치에 요리 글을 본격적으로 쓰게 된 데에는 새로 이사한 집이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재료를 보관하고, 요리를 하고, 상을 차리고 정리하는 그 모든 과정이 넓어진 공간으로 인해 획기적으로 간편해졌기 때문이다. 이 점을 떠올리면, 초미니 자취방에서 벗어나 이곳으로 온 것이 정말 잘한 일이었다는 생각에 혼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물론 9평 오피스텔에 자리잡기 위해 나는 상당한 희생을 했다. 그 희생은 단 하나, 돈이다. 부모님이 내어주신 전세자금으로는 전세를 얻기에 택도 없는 이 오피스텔에서 살기 위해, 나는 많지 않은 월급의 상당수를 월세로 지불한다. 관리비가 싼 편임에도 불구하고 관리비와 각종 공과금을 더하면 월급의 4분의 1 이상을 주거에 사용하는 셈이 된다. 세 번째 자취방인 초미니 자취방에 살던 때에 비해, 확실히 돈이 모이는 속도가 줄었다. 아니, 모인다기보다는 현재 잔고를 유지하는 편에 가깝다.
하지만 돈을 천천히 모으게 될지언정, 이전보다 좋은 자취방에 살게 된 데에는 후회가 없다. 서울살이 10년 차, 직장생활 5년 차 정도이면 좁아서 갑갑하고 일 년 내내 사라지지 않는 곰팡이에 숨이 막히던 자취방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나, 합리화를 해본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이전에 부모님이 지원해주신 전세자금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내 혼자 힘으로는 지금의 생활조건을 이루는 데까지 최소 5년은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서울에는 혼자 힘으로 주거생활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터이니, 나는 부모님이 쥐어주신 것에 절을 하며 감사해도 모자랄 일이다.
서울살이 10년 차, 행정적으로 서울시민이 된 것은 6년 차가 되었다. 두 번째 자취방인 반지하 자취방에 입주할 때, 전세이기 때문에 동사무소에 가서 전입신고를 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만든 내 주민등록증의 앞면에는 고향의 주소가 적혀 있지만, 이를 뒤집어보면 뒷면에는 내가 전세로 떠돌아다닌 집들의 주소가 붙어 있다.
하지만 물리적으로든 행정적으로든 내가 서울시민이 된 지 수년이 지났다고 하더라도, 나는 아직도 스스로를 이방인이라고 느낀다. 이 서울 땅에는 내 소유의 땅은 손바닥만큼도 없으며, 이 자취방의 가격이 내후년에도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고 집주인의 선심에 기대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는 것을 잘 안다. 끊임없이 살 곳을 옮겨 다녀야만 하는 숙명의 이방인. 내가 서울에 진정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은 과연 언제일까. 그 순간이 과연 언제 올지를, 기숙사에 입사한 날 멀어지는 부모님의 차를 바라보며 혼자 울던 그 순간부터 생각했다. 비가 새는 언덕배기 자취방에서도, 반지하방에서도, 초소형 원룸에서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변치 않는 것은 단 한 가지, 제대로 된 집에 대한 영원한 갈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