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담스러움을 그만 미워하세요.
부담이란 무엇인가.
무언의 걱정일까.
그보다 격한 불안과 초조 혹은 시답잖은 일에 대한 귀찮음, 싫어함일까.
온갖 불편함과 부정적인 느낌으로 귀결되는, 결코 작지 않은 감정. 부담이란, 대체 무엇인가.
일상에서 수시로 마주하는 부담이지만 이로 인해 우리는 꾸역꾸역 하루를 채워간다.
2호선 출근길, 존폐가 걸린 프리젠테이션, 다음달 카드값, 손님맞이 식단, 쌓여있는 설거지. 이같은 것들을 사전에서는 "의무나 책임을 짊어진 상태"라고 남의 일이라고 쉽고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다. 약간은 이상적이게 요약된 의미가 현실에선 끝없이 변주되어 삶 구석구석에 침투해 있으니, 어쩌면 부담감은 내가 살아있다는 생생한 증거가 된다고도 하겠다.
생각해보면 내가 느꼈던 부담들은 모두 거부감을 기초로 하고 있었다.
초특가란 글자에 미쳐서 사온 흙쪽파 세 단을 바라보며 자의적인 부담을, 느닷없이 신년모임을 주최하라는 메세지를 받고는 타의적인 부담을 느끼며 강한 거부감이 든다.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또는 거부감의 크기에 따라 부담의 형태가 갈린다.
끼니를 거른 이유가 설거지의 부담 때문이라는 시시껄렁한 면도 있는가 하면, 결혼반지가 틀림없이 음식물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는 확신이 든다던가 하는 절망적 부담도 있었다. 이럴 땐, 반지의 가치에 따라 쓰레기통을 뒤져야 하는 중압감의 무게가 달라진다. 반지가 비쌀수록 중압감이 클까? 아니다. 값비싼 반지가 음식물 쓰레기통 안에 있는 것이 확실하다면 중압감 따위는 없다. 냄새가 나거나 말거나 반지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일이 중대할수록 비장함이 부담을 상회하여 누른다. 오히려 포기하기엔 아깝고 살려내기엔 구차한, 애매한 가치를 지녔을수록 부담은 커진다. 이걸 해, 말아? 해도 부담, 안해도 부담이다.
아무튼 하나같이 마주하기 싫은 일상이지만 이 다양한 형태의 부담감들이 가진 꽤나 좋은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도전이 필요하다는 것.
이 사실을 나는 어른이 되고 나서도 한참 뒤에야 알았다. 그저, 싫으면 부담스러웠다. 양날의 검을 사용할 줄 몰랐던 것이다.
학창시절엔 부모님의 기대가 늘 부담이었다. '기대'는 얼핏 보면 참 좋은 말인데, 그로 인한 부담은 성적에 대한 부담을 낳았고 이것들은 또다시 시간과 진로에 대한 부담을 낳으며 그 크기를 정밀하게 키워가고 있었다. 그 부담을 이기지 못한 나는 종국에 수능을 말아먹으며 스스로를 크게 자책하고 자존감을 폭락시켰으니, 이것은 도전의 잘못된 예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결과가 지금의 삶을 만들었다 해도, 괜찮기로 했다. 더 나아졌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지금의 삶 또한 축복받았기 때문이다. 긍정성이라곤 전혀 없던 그때의 나였다. 어른이 되고서도 한참을 더 지나 재심에 올렸는데, 그때의 나를 용서하는 게 아니라 지금의 나를 용서해 달라는 청유를 기억 속의 내게 보내게 되었다. 이 대목이 조금 아리송할 거라고 생각한다. 부담에 맞서 싸울 줄 몰라 끌어안고 살았음을 뒤늦게 정당방위로 인정했다는 말이다. 지금의 나에게 괜한 빈축을 샀던 그 시절의 내게 진심으로 사과하며 위로해본다. 고생했어, 내 어린 밤들아-하고 말이다. 너는 잘못이 없어,라고 말이다.
현재 네 아이의 엄마인 나는 직장인들과 노선이 다르다. 주말이면 다섯 식구를 오롯이 챙겨야 한다는 부담이 늘 있다.
수요일 저녁쯤 되면 등골이 서서히 식기 시작하고 목요일에는 부담이 싹트며 금요일에 다다라 최고조에 이른다. 토요일 아침 눈을 뜨면서는 더이상 본연의 나를 찾지 않는 편이다. 다만 시간에게 맡긴다. 나는 널 믿는다. 반드시 월요일로 갈 것임을. 이것은 도전이 아니었으므로, 월요일에 맞이하는 것은 성취감이 아니라 안도감일 뿐이다. 동일하고 반복적인 부담이라고 하여 내성이 생기지는 않았다. 역시 도전의 잘못된 예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느끼는 부담 또는 부담감을 도전으로 전환하는 방법은 뭘까?
바로 본질을 직시하는 것이다.
부담이란 것은 본디 사람의 감정이기에 막연하고도 추상적이다. 어린아이의 두려움을 물리쳐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실체확인이라는 걸 우린 잘 알고 있다. 꼭 어린아이에게만은 아닐 터, 사실 우리가 느끼는 부담은 열에 아홉이 필연적 현실 또는 해결이 필요한 과제이다. 수행할 일을 쪼개어 구체적인 행동 계획으로 세우면 의외로 부담의 크기가 줄어든다. 왜냐. 도전이 가능해졌으니까. 설거지가 귀찮다는 가늠할 수 없는 부담의 크기가, 10개의 그릇을 씻어야 한다는 구체적인 계획으로 다소 누그러진다.
이토록 뻔한 전개일진대 실상 우리는 잘 안한다. 부담의 선두에 서 지휘하지 못하고 부담의 뒤꽁무니에서 끌려가곤 한다. 어릴 적 내가 받은 '부담 어린 기대'를 내 것으로 접수해 발화시켰다면 수능을 말아먹더라도 그리 자책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 기간의 과정 안엔 내가 아닌 부모님이 계셨다. 목적이 불분명해 과정의 밀도가 없었고, 공부의 본질을 체득하지 못한 채 끝이 났다. 그러니 근본 없는 실망감만 자신 안에 가득했다.
또 하나의 방법이 있다.
그 일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해 보는 것이다. 내게 주어진 책임과 역할, 바로 이 자리에서 나만이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갖는 것인데, 인정욕구가 강한 사람은 누가 옆에서 추켜세워주지 않으면 이 과정을 잘 못해낸다. 가령 나같은 사람. 그래서 나는 직접 입 밖으로 욕구를 꺼내는 편이다. 동떨어져있는 식구들의 청력 사정거리 안에서, 역시 나밖에 못해. 시의적절한 청소로 가족의 호흡기를 책임지고 있지. 나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것이 목표가 된다. 주말엔 어차피 나만의 시간을 포기하고 지내기로 했다면 알차게 보낼 방법을 고민해 볼 만도 하다. 역시 하나의 도전이 될 것이다. 가령 잘먹고 잘사는 인스타의 틈에서 가장 빛나는 둘째딸의 인생샷을 올리게 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양떼목장을 방문한다던가. 나같은 엄마가 어딨니,라며.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좋은 방법이 있다.
완벽과 완성을 버리는 것이다.
부담은 완벽과 완성에 대한 강박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해 직설적인 사견이 있었다. 예전 어느 날 라디오에서 권지용씨가 한 말이다. DJ는 완벽과 완성 중 어떤 것에 더 가치를 두느냐는 질문을 던졌고, 이에 권지용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완벽을 추구하면 완성이 안되고 완성이 되려면 완벽하다고 생각이 돼야 한다. 완벽은 할 수 없지 않을까. 결국 완벽도 완성도 자신이 완급조절을 해야 하며 절대적일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막연히 상상한 완벽한 완성 때문에 수많은 도전이 시작도 못해보고 좌절된 것을 상기해보아야 한다. 완벽하지 않아 완성을 못한 것들, 완성을 위해 완벽하지 못한 것들. 마치 뫼비우스의 띠 같은 동행의 모순을 억지로 깨부숴보려 한다면 이것은 영원히 도전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것들은 먼저 언급했던 본질의 직시와 맥을 같이 한다. 우리는 여러 쉼표를 그리며 일상을 유영하는 것이지 매 순간 마침표를 찍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버리자. 완벽과 완성을. 딜레마에서 벗어나 할 수 있는 만큼(이라도) 하면, 안하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이건 확실하다. 성취라는 것은 결과보다 과정에 더 기인하므로.
부담은 우리 삶에서 피할 수 없는 동반자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는 그 무게에 짓눌리기도, 도약의 발판으로 삼기도 한다. 거부감은 들지만, 동시에 우리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이제 부담을 짐이 아닌 도전으로 마주할 준비가 되었는가? 그 시작은 오늘이다.
내가 이렇게 장엄한 마음으로 글을 쓰는 이유는...
아이들의 방학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들에 대한 부ㄷ.. 아니 방학을 의미 있는 도전으로 맞이해 가족 모두에게 새로운 도약의 시간으로 채우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마음의 준비를 하고, 변화를 위해 생각을 활짝 열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쯤에서 하나의 신묘한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방전이 없고 가히 친환경적인, 바로 아이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이 청정에너지를 실제화시켜서 지구를 살릴 방법은 없을까. 뇌파나 체력을 흡수하는 따위의 끔찍한 상상은 아니고, 키즈카페나 놀이동산에 어린이들의 동력발전소를 설치한다던가.는 헛소리?
내가 감당해야 할 것들을 예상하고 있으며 그만큼 나의 각오가 다부지다는 소리다.
결코 부담된다는 말은 아니다.
아닐 것이다.
최소 두 달간 나는 수많은 도전의 기회를 맞이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