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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 40분이 되면 마법이 일어난다.

10시 40분이 되면 마법이 일어난다.

by 청유

고등학생 큰 아이와 회전초밥집에서 무려 인생 이야기를 하고 돌아왔지만, '나의 현생'이란 건 집에서와 더 가깝다. 왜냐. 집에 유치원생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큰 애들이 나의 현실 밖에 있다는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어릴수록 나와 긴 시간을 보내고, 더 많은 손을 내주어야 하므로.

그렇게 유치원생 막내는 에폭시 스티커처럼 아직 내 삶에 붙어있다.


나는 막내아이보다 몸이 크니까, 붙어있다는 말이 꽤 어울리는 편이다.

하지만 막내의 입장에서는 내게 붙어있는 정도가 아니라 삶의 전부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랑스러운 나의 스티커, 막내는 차곡차곡 등원길을 밟다 내게 물었다.

왜 길에 그림을 그려놓는 것이냐고.


그것은 일개 주차구역을 표시한 것이지만

17년째 아동육아가 몸에 밴 나는 주차선의 정의보다 자동차 이야기를 해주었다.


"자동차가 사는 집이야."

"지붕이 없는데!"

"자동차는 지붕을 달고 다녀. 봐바. 그치?"

"그럼 저기 있는 자동차는 집이 없어?"

막내는 주차선 밖으로 이중주차를 해 둔 차를 가리켰다.

'어제 늦게 퇴근하셨나보네. 주차 공간이 너무 없어.'


순간적인 현타는 자동차의 집 이야기와 관련이 없으면서도 아이의 질문에도 답을 잇지 못했다. 늘 이런 식으로 휴식 중이던 현실의 불만이 깨어난다.



아! 엄마가 말을 잘못했네~ 집이 아니라 잠시 세워두는 곳인데, 저 네모 안에 잘 들어가게 세우라고 그려놓은 거야. 그렇지 않으면 불편한 일이 생기거든.


막내는 불편해지는 이유가 궁금하기보단 네모를 확보하지 못한 자동차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 큰 모양이다.


엄마차도 저렇게 세운 적 있었어. 네모가 없어서.


막내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저런 불상사(?)를 내 엄마가 겪었다니. 어떻게든 엄마를 돕고 싶던 막내가 의외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10시 40분에 하면 돼!"


집단 융통성을 발휘해야만 유지할 수 있는 아파트 이면주차의 현실이, 10시 40분만 맞추면 조화롭게 해결이 된다니! 노벨평화상감이군.




막내의 10시 40분은 오래전(?)부터 내려온 최종지침이었다.

언제인지도 모를 시각, 가족과의 대화 중 내 입에서 10시 40분이라는 말이 나왔을테고 그건 분명 문제 해결이 예상되는 시점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로 막내는 '언제'라는 물음만 나오면 10시 40분을 이야기했다.

으이구 너 언제 클래~ 라는 웃음에도 10시 40분

밥 언제 먹을까? 에도 10시 40분

세탁은 언제 끝나냐는 기다림에도 10시 40분

심지어 경기가 언제 회복될지에 대한 낙망한 대화에 끼어들어 10시 40분이라는 답을 내려주고 홀연히 갔다.

내게 잠시 스쳤던 사소한 일상이 이 어린 막내에게는 크게 와닿았던 것이지,라고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 또는, 나는 이 아이의 본이니까-라는 결연한 다짐도 해본다.



10시 40분.

모든 것이 잘 풀릴 그 순간.

때가 되면 언젠간 오는 그 시간.

주차선이 마법처럼 정리되는 절대시간 10시 40분은 일상을 지탱해주는 순수 희망일 것이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바랄 때, 나 역시 어린 시절에는 ‘때가 되면’이란 막연한 시간 속에서 희망을 품곤 했었다.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 언젠가 풀릴 것이라는 낙관. 이것이 내 삶의 페이지를 한 장씩 넘겨주고 있지 않았을까.


어린 막내와의 일상은 나의 현생 자체며, 거창하지 않지만 희망 속에서 끈질기게 삶을 채워왔다. 그리고 어느덧 인생을 논하게 된 큰아이와의 이야기들로, 내 삶에 책갈피를 꽂아보곤 한다.



누군가 힘에 겨워
"언제쯤이면 나아질까?"라고 막막해한다면,
나는 10시 40분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그것은 시간이 아닌 희망이기 때문이다.



커서 뭐 될거야?라고 묻자

"나는 이다음에 커서 일곱살이 될거야!"

라고 확신이 차 대답하는 막내가, 부디 자신에 대한 믿음을 아주아주 아주 천천히 잃어가길 바란다.

인생을 알기에 슬픈 '너의 엄마'는 다만, 잃게 될 믿음에 자리할 것이 상실이 아닌 현실이기를,

현실이란 녹록지 않지만 반드시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알기를 바란다.


가까이에 있지만 스스로 바라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그러나 반드시 그 자리에 있는.

그 희망이란 것은 늘 우리 곁에 있다고.

하루에 두번이나 찾아올만큼,

그렇게 오래 기다릴 것도 없다고.

이미

네가 알고 있는 거라고.


데즈몬드 투투 (Desmond Mpilo Tut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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