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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잡스 유진 Apr 07. 2023

어쩌다 인생이지만 어떻게든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작정하고 에세이3


어쩌면 인생은 어쩔 수 없는 것들의 연속은 아닐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든 것은 오늘이 처음은 아니다. 

무언가 열심히 선택하면서 살아온 것 같은데,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살아온 것인지 살아오게 된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는 앞으로 종종하고 싶은 주제이다.      




새벽 3시 45분.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몸의 기억은 기가 막힐 정도이다. 

아직은 서늘한 새벽. 

가디건을 걸치고 이불 속을 빠져나온다. 

다시 눕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겨를도 없이, 이불을 정리한다. 

하루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세레모니 중 하나. 


아직 안방에서는 기척이 들리지 않는다. 남편은 아직 자고 있나 보다. 

이 집으로 이사 오고 나서, 동굴 같은 안방은 남편의 차지가 되었다. 

건들고 싶지 않은 영역, 남자들도 동굴이 필요하다는 말에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주말마다 곰은 어지간해서는 동굴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나마 동굴 앞쪽에 있더니 3년 만에 더 깊숙이 안쪽 방까지 들어갔다. 가끔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어슬렁거리며 다니는 모습이 주방에서 포착될 뿐이다.)


잠은 따로 자도 일어나는 시간은 비슷하다. 남편이 아니면 나, 나 아니면 남편, 둘 중 하나는 먼저 깨서 주방의 전기 주전자에 스위치를 켠다. 남편은 차, 나는 진한 믹스 커피를 타기 위한 물. 

주방도 캄캄하고 물 끊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직은 기온이 차다. 반 팔을 입고 잠들긴 했지만 이불 속과 이불 밖 온도 차는 피부로 확연하게 느낄 정도다. 그나마 다행이다. 잠자리 근처에 가디건을 두고 자서. 소소한 것에 행복하다. 일상에 큰 기대감이 없으면 작은 것에 크게 감사하고 행복하다. 


글씨가 보일 정도의 작은 스탠드불 하나 달랑 켠다(형광등 불을 켜지 않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주전자 온도를 높인다. 서랍에서 봉지 커피하나를 꺼내 스테인레스 컵에 붓는다. 새벽에는 꼭 이 컵에 커피를 마신다. 찬 공기에도 커피의 온도를 오랫동안 유지해주기 때문이다. 오늘은 하나만. 피로감이 가시지 않은 아침에는 두 봉지를 털어 넣기도 한다. 

남편이 봤으면 새벽 잔소리를 시작했을 것이다. 새벽부터 당 올린다며. 

잔소리로 열 올리는 것보다는 당 올리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적당한 온도에 황갈색 빛으로 잘 녹아든 믹스커피를 들고, 테이블에 앉는다. 

새벽독서를 시작한다. 요즘따라 눈이 침침해져서 안끼던 안경도 껴본다. 

크게 보인다. 글씨. 


새벽에 일어나 주방과 거실의 큰불을 켜지 않는 이유는 딱 하나다. 

현실 도피. 

형광불이 훤히 밝혀주는 흔적들을 가급적 늦게 알아차리고 싶어서다. 

밝은 불빛 아래 형형색색 펼쳐진 빨래감, 밤새 아이들의 목마름을 달래준 컵들, 읽다 만 동화책, 쌓아올린 블록, 일어나자마자 공부하겠다며 펼쳐놓고 그대로 잠들어버린 문제집들까지.

정리해도 끝이 없는 아이들의 흔적을 못 본 척하고 싶다. 적어도 나만을 위한 시간인 이 새벽시간에는 말이다. 

어지간한 일은 보고도 못 본 척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한번 손대기 시작하면 청소는 끝이 없다. 새벽독서는 어림도 없다. 새벽 청소시간으로 바뀔지도 모른다. 

바닥에 떨어진 연필 하나를 줍는다. 

‘이건 뭐지?’

아이들이 먹다 흘린 시리얼 조각들이 흩뿌려져 있다. 일부로 해라고 해도 저렇게 윷놀이하듯 하진 못할 텐데 말이다. 

봐버린 거다. 모른 척하고 싶은 것들을. 

이른 시간이라 청소기는 돌릴 수 없고 급한 김에 손으로 쓸어 담는다. 

이제 됐다.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리는 순간. 

책상 위가 너저분하다.

잠시 내적갈등. 

‘에잇, 내일 주말이잖아. 내일 하자. 제발’

그렇게 보고도 못 본 척한 덕분에 2시간의 독서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어쩌다 이런 새벽의 모습으로 살게 된지는 모르겠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이셋과 매일 똑같은 일상의 반복 속에 허덕이며 살 것이다. 

그나마 새벽 시간에 독서도 하고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버틸 수 있다.

어쩌다 펼쳐진 인생의 일상들을 말이다.           


어쩌다 인생이지만 어떻게든 잘 살아가고 있다.

오늘 하루도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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