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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잡스 유진 Apr 09. 2023

새벽 과자가 남긴 것들.

작정하고 에세이4

‘이 새벽에 왜 과자가 땡긴담.’


살짝 배고픔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새벽잠을 쫓고 싶었다. 입이라도 움직이면 덜하겠지. 바스락 소리는 졸린 눈에 활기를 불어 넣어줄지도 모른다.  

읽고 있는 소설이 흥미롭다. 그럼에도 천천히 가라앉는 눈꺼풀은 세상에서 가장 감당하기 힘든 무게이다. 이내 3분의 2만큼은 감긴 채 실눈을 뜨고 읽고 있다. 안 되겠다 싶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씽크대 쪽으로 향한다. 아이들 몰래 숨겨둔 과자 한 봉지를 꺼내 들고 한 개, 두 개 집어먹다가 알갱이가 작아 봉지째 입에 털어넣어 본다. 죠리퐁.


잠을 쫓기엔 퍽퍽한 식감이다. 소리조차 도움이 안 된다. 못말리는 신짱!쯤 돼야 한 알씩 깨물 때마다 잠도 달아나는데 말이다. 짱구는 경쟁이 심해 숨겨둘 겨를도 없이 아이들에게 뺏긴다.     





‘아~달다.’

방금 전 마신 믹스커피에 죠리퐁을 더하니 다 삼킨 후에도 입 안 가득 단내가 가득하다.  

반쯤을 먹었는데도 졸린다. 

밤잠이 없는 막내를 겨우 재운 시간이 1시가 넘어서였다 눈을 뜨니 4시. 겨우 3시간 정도 잔 것 같다. 

소설을 읽으려고 과자를 먹는 건지 과자가 먹고 싶어서 소설을 읽고 있는 건지 모를 정도로 입으로 가져가는 횟수가 잦아졌다. 이내 남은 부스라기까지 목을 젖혀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아~달다.’

이대로 잠을 자면 더 달콤하겠지? 

‘아니아니’, 고개를 가로젖는다.



주말 새벽 시간은 놓칠 수 없다.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여유로운 마음을 온 우주의 색을 담은 새벽하늘이 다 받아준다.      

이 시간을 놓치면, 일주일 동안 지칠대로 지친 피곤한 몸에 쉼표 하나 찍고 시작하지 못하면, 주말도 평일의 연속된 나날일 뿐이다. 그나마 내가 잘 견디며 살고 있는 건, 주말의 새벽이 있어서다.   

‘참, 행복한 시간이다.’     

다 먹은 과자 봉지를 정리하려는데 앞면에 눈에 띄는 문장

‘함께 찾아주세요. 실종아동 찾기 캠페인’

뒷면을 보니 실종아동의 사진과 실종 당시의 나이, 인상착의가 실려있다. 

83년생 이연희씨, 실종당시 만 4세.

요즘에는 기술이 좋아져서 성인이 되었을 때의 모습도 추측이 가능해졌다. 

사진 속 연희씨는 우리 막내 나이쯤 되어보였다. 

‘어쩌다가.’     







결혼을 하고 나서 가장 큰 변화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눈일 것이다. 어느 아이들을 보더라도 남의 집 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우리들의 아이들. 거리에서 넘어지는 아이, 우산없이 비를 맞고 가는 아이만 봐도 우리 아이처럼 느껴져 꼭 한 마디씩 건네고 간다. 

“괜찮니?”, “우산 빌려줄까?”

같이 있는 큰딸이 제발 챙피하니깐 거리에서 아이들에게 말을 걸지 말라고 한다. 너희들을 보는 기분이서 그렇다고 해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빛이다. 그저 오지랖이 넓은 엄마의 성향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슬픈 영화를 듣거나 이야기를 들어도 어지간해서는 감정이 동요되지 않는다. 그런데 아이들 모습을 보면 쉽게 무너진다. 굶주리고 있는 나라의 모습이나, 힘겹게 투병을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텔레비전 광고로 나오면 이내 꺼버린다. 가슴이 아파서. 

사업체를 하나씩 늘릴 때마다 후원금도 하나씩 늘리기로 했던 결심을 한 번 더 굳게 해본다.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30여 년을 어떤 마음으로 사셨을까.’

아이를 잃어버린 경험은 없지만,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쪽이 아려온다.     


 

옛 기억 하나가 문득 떠올랐다. 친정집에서의 기억이다. 

한 창 청소를 하던 중 오랜 흑백사진 하나를 발견했다. 사진이 있을 장소는 아니었다. 옷장의 한 켠에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인 듯 놓여져 있었다. 

눈이 동그란 아이의 사진이다. 얼핏 봐서는 남아인지 여아인지 구분은 되지 않았다. 여자의 무릎에 앉아 있는 아이는 두터운 상하복을 입고 있었다. 여자라고 표현한 건, 성인여자의 얼굴부분은 찢어져 있어서이다. 아이의 모습만 온전히 남아 있고 엄마로 추측되는 여자의 얼굴은 찢겨나가 있었다. 

“오빠.....?”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한 번도 보지도 만나보지도 못한 아이의 사진을 보고서 나는 분명 ‘오빠’라고 했다. 

정식적으로 들은 기억은 없다. 어른들끼리 하는 이야기를 엿들은 게 분명할 것이다. 

나에겐 오빠가 있었다. 

딸만 낳아서 아들에 대한 미련이 많은 줄로 알았던 엄마에게는 아들이 있었다. 

그것도 어린 나이에 속이 깊은 총명한 아들이. 

어떤 연유로 아들을 잃게 된 것인지는 정확하게 모른다. 다 아물어가는 상처를 일부로 다시 파헤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누구도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어쩌다가 들은 이야기로 나에게 오빠가 있었음을 예측할 뿐이다.      



엄마의 손자들에 대한 사랑은 지극하다. 아니 그 이상 극진이다는 표현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시댁에서만 아들을 바란 것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 집에서 더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둘째 아들과 셋째에게 하시는 것을 보면 친엄마인 나보다도 더 극진하시다. 

이런 저런 사정을 알리 없는 둘째동생은 엄마에게 남아선호가 강한 진짜 옛날분이시라면 우스갯소리를 가끔 한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그게 아니야.’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마음으로 아들들을 보고 계실지 조금은 알 것 같아서 이다.    



 


봄꽃은 사람들의 마음을 흐뿌려놓는다. 엉덩이를 붙이고 진득하게 앉아있을 수가 없다. 

마음이 둥둥 떠다니니 몸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아이들을 데리고 마을 축제에 나섰다. 

오전 일찍 도착했는데도 어느덧 무서울 정도의 인파가 밀려왔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이곳 저곳의 이벤트에 참여해본다. 공짜로 준다는 팝콘을 아이들에게 먹이고 싶어 얼른 줄도 서 본다. 

잠시 막내의 손을 놓쳤다. 인파 속에 떠밀려 어느새 2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아이의 파란색 점퍼가 보였다. 아찔하다. 

팝콘이고 뭐고 아이나 잘 지켜야겠다 싶어 얼른 뛰어가서 아이를 찾아왔다.

새벽에 본 과자봉지가 떠오른다. 아이들의 손을 놓치지 않겠다며 잡은 손에 힘을 준다. 드디어 인파속을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왔다.

이제 안심이다.  

아이도 나도 서로 마주보며 미소를 짓는다. 





*연희씨가 꼭 기다리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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