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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잡스 유진 Feb 02. 2022

일본에 가고 싶어요.

간절하면 이루어진다1

        

일본어를 독학으로 독하게 공부한 지 1년째이다. 해도 해도 해결되지 않는 목마름 같은 게 찾아왔다. 혼자서는 안되는 것. 살아있는 회화를 못하다는 점. 가고 싶다. 일본에. 현지인들과 원 없이 이야기 나눠보고 싶고 실력도 가늠해보고 싶다.      


우리 집 형편에 꿈도 못 꿀 일이다. 어학연수라는 것은. 나 다음으로 대학을 준비하고 있는 둘째 동생과 그다음 셋째 동생까지 줄줄이 있는 상황에 어학연수라니.

아들이라도 있으면 군대에 가 있는 시기에 등록금 걱정을 조금이라도 덜어볼 수 있겠다고 하지만, 딸 셋을 2, 3년 간격으로 모두 대학을 보내야 하는 상황에서는 해외연수는커녕 여행조차도 사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고 싶었다. 갈 수 없는 걸 알면서도 푸념을 하듯, 식구들과 친구들에게 가고 싶다는 염원을 종종 이야기했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이 말은 이미 인생에서 간절함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몇 번 경험하고 2007년 시크릿이라는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나는 이미 경험을 했다. 시크릿, 그 비밀을. 그것도 두 차례나. 

일본에 가고 싶다는 염원이 간절함으로 바뀌니 온 우주가 나를 일본으로 보내주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듯했다.     



주말이 되어 잠시 고향 집에서 쉬고 싶어 내려갔다. 음식준비로 분주한 엄마. 손님이 오신다고 했다. 아버지의 어릴 적 고향 친구분. 아버지의 고향은 경상북도 포항. 이곳 강원도까지 오시는 걸 보니 어릴 적 꽤 친하셨나 보다. 

집으로 오신 아버지의 친구분은 인상 좋아 보이시는 여자분이셨다. 알고 보니 친구 사이는 아니고 초등동창생의 누나라고 하신다. 아버지의 친구분이 강원도 집 근처로 이사를 오게 되어 겸사겸사 와보셨다고 하신다. 처음 뵙겠다는 인사를 드리고 부엌으로 가서 엄마를 도와드렸다. 손님과 한창 어린 시절 추억과 고향이야기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무르익어갈 때쯤 아버지가 다급하게 부르신다. 옆에 와서 앉아 보라고 하신다. 그리고는,  지금은 이모라고 부르는 그분이 오사카에서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귀를 의심했다. ‘일본 오사카 말씀하시는 거예요? 제가 가고 싶은 일본요?’ 순간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어쩌면 일본에 갈 수도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겼다. 이모는 일찍이 일본으로 시집가셔서 일본 생활 30년째이신 분이셨다. 일본에서 장사하고 계신다고 한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언제든 일본에 오게 되면 연락을 하라고.

      

한 가닥의 희망과 꿈에 잔뜩 부풀었다. 그러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생각해보았다. 일본에 가면 갈 곳은 있겠다. 하지만 어떻게 가지? 어학연수로 갈 만한 돈은 없고 그렇다고 여행은 너무 짧고.  

돈이라는 현실에 부딪혀 앞으로 나아갈 수도,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기에는 견딜 수 없는 그 좌절감은 경험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렇게 한 두 달이 흘러갔다. 용돈을 아껴가며 매달 빠트먹지 않고 구독하던 일본어 잡지가 있었다. 한 장 한 장 넘기다 발견한 광고. 일본대사관의 워킹홀리데이 모집 광고였다. 그 당시 워킹홀리데이라는 비자는 호주, 뉴질랜드 등 영어권에는 있었지만, 일본은 그해 처음으로 시행하고 모집하는 제도였다.

또 가슴이 뛴다. 이번에는 진짜 갈 수 있겠다. 어떤 제도인지도 어떻게 하면 갈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모집 광고에 나온 그대로 서류를 준비해서 제출해보자. 단순하게 생각하니 용기가 생겼다. 대행사가 있는지도 몰랐다. 인터넷을 뒤져가며 서류 하나 하나 직접 준비했다. 여권발급부터 비자 신청까지 대사관을 몇 번이나 쫓아다녔다. 1년에 딱 한 번 있는 기회, 그리고 정해진 인원. 뽑히기 위해서는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완벽하지 않은 일본어로 최선을 다해 지원서와 서류를 작성했다. 

드디어 발표가 있던 날. 이미 예정에 있던 운명이라는 듯이 당당히 합격. 눈앞에 한 줄기의 빛을 보고,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그 기분, 뭐든 할 수 있다는 용기까지 배우게 된 날이었다.     


출국 준비를 위해 휴학을 하고 두 달간 생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비행깃값과 당장에 쓸 생활비를 벌지 않으면 안 되었다. 워킹홀리데이는 정식적으로 일하면서 공부도 할 수 있는 비자였기에 어떻게든 들어가기만 하면 그다음은 현지에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냥 그런 무모함이, 20대에는 있었다. 

그렇게 치열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낮에는 동해바다 해수욕장 근처 슈퍼에서, 밤이 되면 호프집에서 새벽까지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일본에 계신 이모(아버지 친구의 누나)가 자신의 집에 와서 지내도 된다고 하셨다고 한다. 민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못 들어갈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이모가 계신 오사카로 가겠다고 했다. 비행기 값과 한 달치 생활비가 준비되었다. 티켓을 예약하고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비해 여행자 보험까지 들어놓고, 그렇게 떠날 준비를 마쳤다.      



오사카의 간사이 공항에 내리던 날, 낯선 남자분께서 유지니라는 이름이 쓰여 있는 종이를 들고 다가오셨다. 서툴 거라고 예상하셔서인지 짧은 한마디로 물으신다….


“유징?”

준비되어 있던 나는, 

“하이, 와따시와 유진데쓰.”     


그렇게 꿈만 같았던 일본땅을 밟았다. 21살 여름날, 그리도 간절히 바라던 일본에 와있다. 여긴 내 꿈이었다.     



*추억을 되살려 기록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감사함을 잊지 말아야 하는 분들이 다시금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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