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반고흐의 구두와 하이데거
전시장 한쪽 벽에 걸린 그림 앞에 서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묻는다.
- 왜 하필 구두일까?
- 이 구두는 누구의 것일까?
질문은 늘 사물의 바깥을 향한다. 우리는 의미를 찾고, 주인을 찾고, 정답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반고흐의 구두 앞에서 이 질문들은 번번이 미끄러진다.
이 그림을 철학의 장으로 불러낸 이는 하이데거였다.
하이데거는 이 구두를 단순한 정물로 보지 않았다.
그에게 구두는 -사용되는 동안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도구-였고,
그 침묵 속에서 오히려 삶의 세계가 열린다고 보았다.
흙길을 밟아온 시간, 비와 바람, 노동의 피로, 하루를 버텨온 몸의 무게가
이 구두 안에 고스란히 스며 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말한 도구의 도구성은 어쩌면 이런 뜻일 것이다.
도구는 눈에 띄지 않을 때 가장 제 역할을 한다.
우리는 걷는 동안 구두를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 그것이 도구가 제대로 작동하는 순간이다.
도구가 갑자기 눈에 들어오는 순간,
삶은 멈춘다. 불편함과 문제는 늘 ‘의식되는 순간’에 시작된다.
하이데거는 이를 ‘닫힌 도구’라고 불렀다.
닫혔다는 말은 숨겨졌다는 뜻이 아니다.
삶 속에 완전히 녹아들어 더 이상 주목받지 않아도 되는 상태,
그 조용한 기능이 삶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여기서 한 걸음 물러서면, 불편한 질문이 남는다.
정작 이 그림을 그린 반고흐는 이런 이야기를 의도했을까?
놀랍게도 반고흐는 이 구두에 대해 어떤 철학적 설명도 남기지 않았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늘 같은 말을 반복했을 뿐이다.
삶은 고단하고, 가난은 벗어나기 어렵고,
그러나 진짜처럼 그리고 싶다는 소망.
미술사가들은 반고흐가 실제로 신던 구두였을 가능성을 말한다.
새것이 아닌 중고 구두를 사서 일부러 험한 길을 걸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구두는 상징이기 이전에, 그의 생활에 가장 가까운 물건이었다.
반고흐에게 구두는 설명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냥 늘 곁에 있던 존재였을 것이다.
여기서 데리다가 등장한다.
데리다는 이 모든 논쟁을 한 발 떨어져 바라보며 묻는다.
“우리는 왜 이렇게까지 구두의 주인을 찾으려 하는가?”
그에게 문제는 해석의 옳고 그름이 아니었다.
의미를 하나로 고정하려는 우리의 욕망,
그 욕망이 그림을 닫아버린다는 점이었다.
하이데거는 구두에서 삶의 세계를 읽었고,
미술사학자들은 반고흐 개인의 삶을 추적했으며,
데리다는 그 모든 읽기가 너무 빨리 ‘정답’이 되는 순간을 경계했다.
이 구두는 누군가의 것이라고 확정되는 순간,
더 이상 질문을 허락하지 않게 된다.
‘미는 곧 진리다’라는 말이 다시 떠오른다.
이 말은 예쁘다는 뜻이 아니다.
아름다움이란 꾸며진 감동이 아니라,
가려졌던 것이 잠시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말로 설명되지 않아도, 몸으로 먼저 느껴지는 어떤 확실함.
그것이 진리라는 뜻이다.
반고흐의 구두는 그래서 아름답다.
장식도 없고, 설명도 없고, 상징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저 한 켤레의 구두가 놓여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 앞에서 멈춘다.
그리고 묻게 된다.
이 구두는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질문 대신에
나는 어떤 길을 걸어왔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하이데거는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는 생각하기 전에 이미 살고 있다고.
주제적으로 분석하기 이전에,
전 주제적인 세계 속에서 몸으로 살아간다고.
반고흐의 구두는 그 ‘이미 살아진 세계’를 조용히 불러낸다.
결국 이 그림은 답을 주지 않는다.
하이데거에게는 철학의 장이 되었고,
반고흐에게는 삶의 일부였으며,
데리다에게는 해석을 멈추지 말라는 경고였다.
우리에게는,
삶을 너무 빨리 설명하지 말라는 부탁으로 남는다.
벗어 놓인 구두 앞에서,
잠시 말을 멈춘다.
그 침묵 속에서,
삶은 다시 천천히 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