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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ny Jun 09. 2019

폼나는 바닷가 작업실 부럽네요

김정운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를 읽고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작가의 책을 처음 접한 건 "남자의 물건" 그 이후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그리고 가장 최근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였다.  내가 딱히 작가의 팬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제목에서 오는 호기심 또는 공감에서 책을 선택했던 것 같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작업실, 그것도 바닷가 작업실이라니 도대체 거기서 뭘 하며 살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니 여수 바닷가의 풍경 좋은 곳에서 그림을 폼나 그릴 장소가 필요했고 미역 창고를 사서 개조를 하다 보니 돈이 너무 많이 들어 책을 써서 돈을 좀 충당하려 한 게 본 목적 아닌가 싶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포인트에서 공감 가는 부분이 있었기에 순식간에 읽었다.


 “인생을 바꾸려면 공간을 바꿔야 한다.”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가 쓴 말년의 역작 『공간의 생산』의 핵심 내용이다. 공간은 그저 비어 있고, 수동적으로 채워지는 곳이 아니다. 공간은 매 순간 인간의 상호작용에 개입하고, 의식을 변화시킨다.
은은하게 조명을 밝히고,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자기가 좋아하는 물건도 쭉 늘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 공간이 있어야 ‘자기 이야기’가 생긴다. ‘자기 이야기’가 있어야 자존감도 생기고, 봐줄 만한 매력도 생기는 거다. 한 인간의 품격은 자기 공간이 있어야 유지된다. 아, 자기 전에 그 공간에서 하루를 성찰하며 차분히 기도도 드려야 한다. 자다가 아예 영원히 잠들 수도 있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주위에 이미 여럿 그렇게 갔다.
 '공간 충동’입니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 그러니까 글 쓰고, 그림 그리고, 음악 들으려면 ‘내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정말 하기 싫은 일, 그러니까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는 일(미치도록 싫은 일입니다)’, ‘저녁마다 TV 채널을 돌리며 등장인물 욕하며 늙어가는 것(아, 이건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을 피하려면 ‘내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이 허접한 외로움을 담보로 내가 얻고자 했던 것은 바로 ‘내 공간’이었습니다. ‘무소유’를 주장하고 실천한 법정 스님은 자신이 평생 버리지 못한 욕심이 하나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깨끗한 빈방’에 대한 욕심이랍니다. ‘공간 욕심’, 즉 ‘공간 충동’만큼은 법정 스님도 어쩌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의 말처럼 공간이 달라지면 행동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면 인생이 바뀐다.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확실하게  한국, 독일, 일본에서 유학하며 보낸 그가 중년의 터닝포인트를 여수의 섬으로 정한  아주 특별한 건 아니다. 충분히 그럴만하다. TV프로 자연인을 보며 나도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 어디에서든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 보려 꿈꾸는 이가 어디 한둘이겠는가?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지만 나도 사실 언제든 떠나고 싶은 1인이다. 주말에 아이와 시골로 놀러 나갈 때면 늘 '근처에 쓰러져가는 오두막집 하나 사서 개조해서 살까'라는 생각을  한. 하지만 생각과 다른 내 행동의 제약은 보통 현실의 굴레다. 뭐 먹고살지? 하는 근본적인 물음말이다.  김정운 작가도 그림을 그리나 그림으로 돈을 버는 건 아닌것 같고 과거에 교수였으나 그만둔 지 오래됐으니 먹고살려면 글을 써야 하는 게 현실 아니었을까? 물론 귀농한 사람들 말을 들어보면 실제로 돈을 쓸데가 없으니 없으면 없는 데로 산다 하지만 그건 자식들 다 키워 독립시켜놓고 적어도 50대 후반 이후에나 가능할 터인데... 내게는 조금 먼 일처럼 들린다.  


 공간 충동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허접한 외로움을 담보로 내 공간을 얻고자 어떤 이는 옥탑방을 찾아가고 어떤 이는 고시원을 찾아가기도 한다. 바닷가 작업실은 폼나게 늙고 싶은 전직 교수님의 자존심의 공간인지 모르겠다.

 

친구들이 여수 내 화실을 찾아왔다. 참 오랜만에 만난다. 잘 나갈 때는 다들 기사가 모는 ‘법인 차량’을 타고 와 폼 잡았다. 이번에는 친구 다섯 명이 차 한 대에 몰려 타고 우르르 내려왔다. 올해 다들 ‘잘렸다’. 남자가 망가지는 건 정말 한순간이다.
은퇴하면 바로 죽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은퇴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모든 기준이 바로 그 시절의 가치에 맞춰져 있다. 삼십여 년을 더 살아야 하는데 우리 모두가 지금 아무 생각 없다. 바로 앞선 세대의 ‘노욕老慾’을 보면서, 도대체 왜 저럴까 싶었던 것이 ‘잘리고 보니’ 다 이해된다고도 했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첨예한 갈등 배후에는 죄다 ‘느닷없는 생명 연장’이 숨겨져 있다. 단순한 이념적 갈등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평균수명 50세도 채 안 되던 지난 세기의 낡은 사회 설명 모델로 한국 사회를 설명할 수는 없다(이건 정말 중요한 포인트다!). 인류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이 엄청난 ‘혁명의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작’에 대한 용기가 필요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롤 모델’도 전혀 없다. 각자 ‘용감하게’ 찾아야 한다. ‘손’으로 하는 일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사무직에서 일했던 사람일수록 손으로 직접 하는 일을 배우는 것이 좋다. 두 번째 인생에는 노동의 결과를 눈으로 직접 판단하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일을 해야 심리적으로 소외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교수, 기자, 선생과 같이 말과 글로 먹고산 사람일수록 손으로 직접 하는 일을 해야 한다. 그래야 말년의 성품이 무난해지며 ‘꼰대’를 면할 수 있다.


그의 말처럼 남자가 망가지는 건 한순간이다. 여자는 그래도 긴 시간 야금야금 망가지기 때문에 단련이 되지만 남자들은 은퇴와 함께 한방에 가기 때문이다. 그가 솔직하게 말하는 현실이 너무나 와 닿는다. 손으로 하는 일을 찾아야 한다는 말에도 정말 동의한다. 하지만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일을 하는 그가 농사를 짓고 노동을 하는 일도 좀 해보았는지 궁금하다. 보통의 남자들이 할 수 있는 손으로 하는 일이 그다지 다양하지 않으니 말이다. TV 자연인들은 기껏해야 산에 가서 약초 캐고 집에 와서 요리나 하던데... 정말 장소를 옮기면  내가 좋아하는 일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수 있을까?찾으면 천만다행이지만 너무 오랜 시간 자신을 잊고 살아와서 정작 자신만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즐기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니 말이다.


‘미역 창고’에서는 내 자신에게 더욱 충실하고 싶습니다. 심리학자 비고츠키의 이론 중에 ‘내적 언어innere Sprache’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생각’이란 ‘내적 언어’라는 뜻입니다. 타인과의 상호작용이 ‘기호sign’와 ‘상징symbol’을 매개로 내면화된 결과가 ‘생각’, 즉 ‘내적 언어’라는 겁니다. 책은 이 같은 ‘내적 대화’를 가능케 하는 가장 훌륭한 매개체입니다. 내 공간충동의 최종 목적지는 ‘자신과의 내적 대화’, 즉 ‘생각’입니다. 물론 담보로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외로움’입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외로움을 담보로 해야 ‘책을 매개로 한 내적 대화’가 진실해집니다. 나이가 들수록 외로움을 더 느낍니다. 다들 그 외로움을 피하려고 ‘관계’로 도피하는 걸 봅니다. 그러나 세상에 어리석은 일이 ‘외로움을 피해 관계로 도피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고통은 ‘불필요한 관계’에서 나옵니다. 차라리 ‘외로움’을 견디며 내 스스로에게 진실한 것이 옳습니다. 진짜 외로워야 내 스스로에게 충실해지고, 내 자신에대해 진실해야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의 관계가 더욱 소중해집니다.


전체 글을 통틀어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 바로 '책을 매개로 한 내적 대화'이다 그것도 외로움을 담보로. 나이가 들수록 외로워지는 게 자연스러운 거라면 쓸데없는 관계를 만들어 고통 속으로 빠져들기보다 차라리 외로움을 견디며 나 스스로에게 진실하라는 그의 말이 너무나 가슴에 와 닿았다. 진짜 외로워야 나 스스로에게 충실해지고 나 자신에게 진실해진다는  말에 격하게 공감한다. 물론 책으로 폼나게 인테리어를 하라는 말은 전혀 그럴듯해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창고가 책으로 채워져 그의 행복이 최대가 된다면 그는 그렇게 하는 게 맞겠다. 나는 빈방에 침대하나 두고 등불을 밝히고 음악을 들으며 전자책을 보는 걸로 만족하리라... 세상과 와이파이로 소통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인터넷까지 완전히 단절된 세상으로 가는 건 사실 좀 자신이 없다. 공간이 바뀌어도 핸드폰으로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면 행동이 그대로 이려나? 이 문제는 닥쳐서 생각하는 걸로^^


어쨌든 두 번째 인생을 설계하는 중년이라면 한번쯤 꿈꿔볼만한 나만의 공간꼭 섬이 아니라 어디가 됐든 전혀 다른 시간이 흘러가리라.  작가 김정운의 여수 생활을 그림과 사진으로 들춰보며 나의 인생 나의 공간을 바꿔볼 계획을 세우는 뭇남성들에게 큰 용기가 될것은 확실해 보인다. 외로움을 감내하기에 남은 인생이 너무 길다는게 문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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