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류 솔로몬 "경험 수집가의 여행"을 읽고
1988년부터 2015년까지 거의 30년에 걸쳐 작성된 이 글들은 비록 한 사람의 여행 기록이기는 하나 그 속에는 지난 30년간의 세계 변화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내게 모험을 장려했던 어머니에게 감사한다. 돌아가신 지 벌써 25년이지만, 어머니는 이 책의 앞쪽에 묶인 글들을 읽고 의견을 주셨다. 어머니는 내 글이 늘 명료하기를 바랐고, 늘 친절하기를 바랐다. 초기에 썼던 그 글들을 다시 읽어 보니, 어머니의 영향은 내가 이후에 쓴 모든 글들에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당신이라면 결코 가지 않을 테고 나도 가지 말았으면 싶은 장소로 노상 떠나는 데 대해 아주 천천히 마음을 바꾸셨다. 아버지는 지금도 내 첫 독자이자 가장 정성스러운 독자이고, 내가 태양에 너무 가깝게 날 때면 늘 두 팔을 활짝 펼치고 나를 받아 줄 준비를 하고 계신다.... 마지막으로 남편 존 하비치 솔로몬에게 고맙다. 존은 그동안 내 외면의 여행뿐 아니라 내면의 여행에도 동행해 주었다. 내가 세상을 함께 보고 싶은 사람은 존 뿐이고, 세상 속에서 함께 살고 싶은 사람도 존뿐이다. 존은 나의 북극이자 남극, 나의 적도, 나의 북회귀선이자 남회귀선, 나의 일곱 대륙이자 일곱 바다다.
〈존 드라마니 마하마 대통령, 게이 로비스트 앤드루 솔로몬과 한 침대에 드는 사이로 밝혀져.〉 하필이면 저 유감스러운 관용구를 사용한 기사 제목은 말했다. 또 다른 기사는 이렇게 말했다. 〈앤드루 솔로몬은 동성애자 사회의 몇몇 부자들을 모집하여 마하마 대통령의 선거 운동 자금을 댔다고 한다. 마하마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동성애자 문제를 밀어붙여 줄 것으로 알고 그런 것이다.〉 기사는 또 내가 마하마의 책을 구입하는 데 2만 달러를 썼다고 보도했다.... 나는 외국 선거에 참견할 능력도 의향도 없고, 마하마가 서명을 해서 내게 증정한 책에 땡전 한 푼 지불하지 않았다. 내가 동성애자 인권 문제에서 마하마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방법은 아빠만 둘 있는 유쾌한 가정에 그를 초대하여 환대한 것뿐이었다. 국가적 추문에 연루된다는 것, 누군가를 친근하게 돕고자 했던 일이 오히려 그에게 부담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대단히 속상한 일이었다.
몽골의 거의 모든 땅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한 번도 누구의 소유인 적 없었다. 누구나 원하는 곳으로 어디든 차를 몰아도 되고 원하는 곳에 어디든 텐트를 쳐도 된다. 고비 사막에서 만난 한 목동은 내게 말했다. 「게르를 옮길 때면, 무한한 가능성과 자유에 신이 납니다. 나는 어디로든 갈 수 있고, 어디에든 집을 세울 수 있고, 동물들을 어디로든 데려갈 수 있죠. 사람들이 도시를 세운 몇 군데 좁은 장소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목동은 내게 낙타 젖을 탄 차를 따라 주느라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렇게 물었다. 「어때요, 미국도 자유로운 나라인가요?」 애국자로 살아온 내 평생 처음으로, 이 질문에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몽골 인구의 3분의 1이 빈곤선 아래에 있지만, 내가 아메리칸드림을 이야기하자 목동은 물었다. 「아들이 왜 아버지와 다른 삶을 원합니까?」 나는 우리 발치에서 놀고 있는 목동의 어린아이들은 어떻겠느냐고 물었고, 목동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 애들을 학교에 보낼 겁니다. 그리고 이 애들이 정치인이나 사업가가 되고 싶어 한다면, 그야 자기들이 알아서 할 일입니다. 나도 학교에 다녔지만 목동이 되는 길을 선택했죠. 아이들도 나처럼 선택하기를 바랍니다. 이보다 더 좋은 삶은 생각할 수 없으니까요.」 세상 사람들은 흔히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를 이겼다고 말하지만, 몽골을 떠날 즈음 나는 애초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서로의 대립항인 적이 없었으며 유목 생활이야말로 그 두 체제 모두의 진정한 대립항이라고 믿게 되었다. 유목 생활이야말로 인류가 이제껏 일군 여러 삶의 양식들 중 즐거운 무정부주의에 가장 근접한 양식이라고.... 몽골의 진면목은 멋진 경치마저 뛰어넘는 무언가다. 그것은 바로 몽골에서는 (울란바토르 밖에서라면) 어디서든 여행자가 원하는 것, 즉 순수한 자연과 불변의 문화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 후 꼭 짚어서 고비 사막이나 후브스굴을 보고 싶다면, 혹은 야크를 보고 싶다면, 그냥 가서 보면 된다. 중국인들은 외국인은 자기네 사회의 복잡성을 결코 꿰뚫어 볼 수 없다고 여기면서 묘한 민족주의적 자긍심을 느끼고, 러시아인들은 서양인은 러시아인 특유의 절망을 결코 이해할 수도 흉내 낼 수도 없다고 믿는다. 반면 몽골인들은 자신들이 세상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아주 명확하게 아는 것 같고, 우리가 그들을 찾아가고 싶어 하면 진심으로 기뻐한다. 우리가 몽골에서 느끼는 것은 역사만이 아니다. 그곳에서 느껴지는 것은 영원이다.
학살 중 강간당한 여성의 수는 최대 50만 명에 이른다. 살아남은 투치 여성 중 약 절반이 강간당했고, 강간당한 여성은 거의 모두 HIV에 감염되었다. 강간으로 잉태된 아이를 출산한 경우는 최대 5천 건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을 〈나쁜 기억의 아이들〉이라고 부른다. 어느 작가는 그 아이들을 〈죽음의 시간이 남긴 산 유산〉이라고 표현했다. 한 조사에서는 여성 응답자의 90퍼센트가 자기 가족을 죽인 학살자의 아이를 도저히 사랑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강간당해 낳은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거의 신에 가까운 일이다. 대부분의 여자들처럼 강간이 여러 트라우마 중 하나일 뿐이라면 더 그렇다. 여자들은 가족을 잃었다. 사회적 지위를 잃었다. 한때 든든하게 느껴졌던 사회 구조를 잃었다. 삶이 안정적이거나 지속적이라는 느낌을 잃었다. HIV로 건강을 잃었다. 내가 그런 여자들과 아이들을 만났던 2004년 봄, 아이들은 아홉 살이었다. 후투족 아버지를 닮은 생김새가 드러날 만큼 충분히 성숙한 나이였다. 나는 여자들이 어떻게 그런 아이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혹은 사랑하지는 않아도 보살피기는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는지 알아보려고 르완다로 갔다
우울증이 문화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구성되는지 알아보던 중, 나는 그린란드의 이누이트족을 방문했다. 그들에게 우울증이 널리 퍼져 있는 데다가 우울증에 대한 이누이트 문화의 태도가 독특하기 때문이었다. 그린란드 사람의 최대 80퍼센트가 우울증을 앓는다. 우울증이 그토록 빈번히 발생하는 사회는 어떻게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을까?..... 그린란드로 가기 전, 나는 그곳의 주된 문제는 계절성 정동 장애 SAD가 아닐까 추측했다. 계절성 정동 장애는 햇빛 부족으로 인한 우울증으로, 일 년에 석 달씩 해가 존재감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장소에서는 특히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나는 그린란드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초가을에 기분이 가라앉았다가 2월이 되면 나아지지 않을까 하고 예상했다. 현실은 달랐다. 그린란드에서 자살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달은 5월이다. 북부 그린란드로 이주해서 사는 외국인들은 긴 어둠의 시기에 곧잘 우울해하지만, 이누이트들은 과거 오랜 세월 동안 계절적 빛 변화에 적응하는 법을 익혀 왔다. 많은 사회에서 봄은 자살의 선동자다. 작가 A. 앨버레즈는 이렇게 썼다. 〈자연이 더 풍요롭고 부드럽고 즐거워질수록 내면의 겨울은 더 깊어지는 듯하다. 내면세계와 바깥세상을 갈라놓는 심연이 더 넓어지고 더 끔찍해지는 듯하다.〉 봄이 가져오는 변화가 온대 지방에 비해 두 배는 더 극적인 그린란드에서, 봄은 가장 잔인한 계절이다.
나는 인생에서 누리고 싶었던 것들을 거의 다 이뤘다. 사랑, 아이들, 모험, 의미 있는 경력. 내가 살아온 인생이 감사했다. 이제 그 인생이 그다지 많이 남지 않았더라도. 그러나 내가 실종되면 아버지가 죽도록 고통스러워하실 것 같았다. 그래서 미안했다. 제일 많이 든 걱정은 아이들이 내가 자신들을 버렸다고 느끼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죄책감이 들었다... 이때쯤 나는 바다에 약 한 시간 반을 떠 있었다. 햇볕에 타서 바삭바삭 익었고, 열이 약간 오르는 것 같았다. 바닷물은 꿀꺽꿀꺽 한없이 마신 것 같았다. 이토록 외롭기는 처음이었다. 문학 작품에서 자주 읽었던 말, 사람은 어떻게 죽든 결국에는 누구나 혼자 죽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내가 아이들과 함께, 아이들을 위해서 하려고 계획했던 일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려고 애썼다. 주마등처럼 스치는 것은 내 인생이 아니라 아이들의 인생이었다. 현재에 집중하는 일에는 늘 소질이 없었던 나는 이번에도 계획 불가능한 미래를 계획하는 일에서 위안을 느꼈다. 나는 참 하찮은 존재였다. 인간은 참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정말이지, 한 인간이 사느냐 죽느냐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탱크와 맞서도 무서울 것 없었던 젊은이로 시작했던 그의 여행 인생이 아이들을 두고 인생에 더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는 중년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면서, 이 숱한 여행이 아니었다면 그가 오늘날처럼 타인에 대한 깊은 연민과 이해의 열망을 갖춘 훌륭한 작가가 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 <경험 수집가의 여행, 번역자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