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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ny May 12. 2018

인생에는 리셋이 없다?

천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를 읽고

사무실 책꽂이에 꽂혀 있던 책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제목 밑에 세상에 첫발을 내디딘 어른 아이에게 라고 쓰여 있다. 매해 연말 트렌드 코리아로 익숙한 김난도 교수의 책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읽은 게 언제였더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확실히 청춘은 아닐 때 읽었다. 30대 후반 정도였나? 두 번째 에세이도 세상에 여러 발을 내디딘 지금 읽었으니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한 두 박자 늦게 읽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정신연령이 늦어서인지 여전히 읽을만했고 다행히 많은 도움이 되었다.


리셋! 내 인생이라는 글에서 지금까지 쌓아온 내 인생의 어쭙잖은 기득권을 전부 다 내려놓을 수 있다는 스스로의 결의가 따라준다면 우리의 인생은 리셋이 가능하다저자는 말한다.


놓아라
준비하라
그리고 시작하라


나는 무엇을 놓고 무엇을 시작해야 할까 생각해 보았다. 전시기획자로 전시장 주변을 돌며 내가 쌓았던 경험과 짠 밥을 이용해 먹고 있는 알량한 타이틀을 버려야 할까? 젊어서는 한방에 리셋하고 싶은 때가 사실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건 아니다가 내 결론이다. 인생에는 리셋이 없다. 그저 지나간 경험과 새로운 미래가 뒤섞이며 지금이 만들어지는 것일 뿐 완전한 과거의 리셋을 통한 미래 탄생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저자는 커리어상의 새로운 일의 도전으로 리셋을 말하지 않았을까? 놓는 건 쉽다. 하지만 준비하고 시작하는 일은 성공보다 실패의 가능성이 크다. 일곱 번 넘어져 여덟 번 일어나는 것도 쉽지 않다. 넘어지는 게 무서워 리셋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수십 번 리셋을 해도 안 되는 사람도 있다. 리셋이 성공으로 이어진다는 보장도 없다. 백 명에 한 두 명 정도 될까 말까 하는 일을 마치 모두가 가능한 것처럼 말하는 게 아닌가? 이건 물론 세상에 첫발은 내디딘 사람이 아니라 곧 오십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하는 말이다. 나는 열심히 쌓아온 것들을 한방에 무너뜨리고 맨땅에 헤딩하는 일이 훨씬 힘들다는 걸 알기에 절대로 이런 말은 내 자식들에게 안 할 것 같다. 교수님이 교수직을 내려놓고 어느 날 리셋을 해본 뒤 얘기하면 어땠을까? 과연 똑같이 말했을까 궁금하다.


도대체 우리는 언제 어른이 되는 걸까? 우리는 지금 어른일까? 혹시 어른이란 연령, 혼인, 선거권, 소득, 세금 같은 어떤 조건을 갖췄을 때 도달하는 상태가 아니라 흔들리면서도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존재로 성숙해 가는 과정에 가깝지 않을까?  흔들리지 않는 것이 어른이 아니라 천 번을 흔들려야 겨우 어른이 된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그렇다면 흔들려서 어른이다. 그래, 조금 흔들려도 괜찮다. 나와 당신의 흔들림은 지극히 당연한 어른 되기의 여정이기에.


그러네.. 흔들리는 어른. 도대체 언제 흔들리지 않을까? 천 번만 흔들리면 될까? 영원히 어른이 되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한 번도 안 흔들리고 어른이 된 양 거침없는 요즘 꼰대 어른만 어른 아닌가? 나는 아직 어른이 아니다. 대충 이삼백 번 정도 흔들린 것 같다. 칠십이나 팔십쯤 되면 어른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그건 모르겠다. 영원히 나이 값을 하지 않고 어른이 되고 싶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냥 자식들과 친구처럼 살고 싶은 마음 그게 내가 어른이 되지 않는 이유일지 모르겠다. 꼭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벗어버릴 때가 된 거 아닐까?


마음이 아플 때  
꼭 하루씩만 살기로 했다.
몸이 많이 아플 때
꼭 한 순간씩만 살기로 했다.

이해인 수녀님의 어떤 결심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우리에게 지워진 운명적 삶의 굴레는 어느 순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견뎌내는 것이다. 한 순간씩, 하루씩 살아가고 버티다 보면 그 징그럽던 운명도 나의 일부로 동화되어 결국 내가 운명의 동행자로 서게 될 날도 오지 않을까? 운명의 굴레가 생명의 수레바퀴로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자기 운명에 대한 사랑만이 역경을 삶의 활기로 전환시킬 수 있는 에너지이다. 그토록 힘겨울지라도 내 삶은 소중하며 나는 그 인생을 살아낼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꼭 하루씩만 살아내자.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외워야 할 주문이 있다.
아모르파티.
네 운명을 사랑하라.
견디자. 다 지나간다.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살아온 방법인데 다들 알고 계셨나 보네.. 견디자 견뎌서 살아남는 자가 이긴다.. 나는 이긴다. 이렇게 주문을 외웠다. 아모르파티? 뭐 이건 노래 제목인 줄만 알았고^^


퇴근길 뉘엿뉘엿 지는 해를 보고 있자면 근원을 알 수 없는 외로움이 북받칠 때가 있다.  나이들 수록 외로움의 빈도와 깊이가 심상치 않다. 이 외로움이란 놈은 먹성 좋은 돼지의 기갈 같은 것이어서 조금만 달래주기를 게을리하면 시도 때도 없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공허하지 않느냐고 관심을 구걸한다. 어쩌면 외로움이란 타인과의 관계 단절에서 오는 것 이 아니라 텅 빈 내면을 돌아보라는 영혼의 경고인지도 모른다.


 정말. 내 돼지도 엄청 먹성 좋은 놈이다. 잠자다가도 뛰어나오고 TV를 보다가도, 버스를 타고 창 밖을 보다가도 비 오는 날 우산 쓰고 걷다가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그놈 때문에 멍 때리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지랄도 해봤는데 달래야 하네.. 내 영혼을 달래 줘야 그 돼지가 사라지는 걸 몰랐네. 이제라도 달래 봐야겠다. 내 영혼을, 그놈 돼지를…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내가 써야 하는 가면의 종류도 다양해지고 있다. 이런 시기일수록 ‘나는 누구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좀 더 유연해져야 할 것 같다. ‘원래 나는 이런 사람인데….’ 혹은 ‘나는 이래야 하는데….’ 하는 고정된 자아 관념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가면과 맨 얼굴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괴리가 생길지도 모른다. 뱀이 허물을 벗지 못하면 죽는 것처럼 자아도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벗어야 하는 허물과 같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과 내가 써야 하는 가면들을 ‘지켜보는’ 일이다.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변화하는 맨 얼굴과 나의 가면을 차분히 관찰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객관적인 내가 필요하다. 그래야 이 혼란스러운 가면 바꿔 쓰기의 경주에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내 성장에 걸맞은 더 성숙한 내 모습을 찾고 지켜낼 수 있다.


역시.. 곳곳에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통찰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다. 그러니 대한민국의 트렌드를 집어내 해마다 책을 쓰시겠지만… 인간에게도 그런 통찰력이 나온다. 솔직히 나는 누구인가라는 고민을 할 때마다 나의 고정된 자아 관념 때문에 힘들었던 적이 많았다. 나의 가면을 나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었고 맨 얼굴이 나인지 가면이 나인지 구분할 수 없어 방황했던 적도 많았다. 이 둘을 차분히 관찰하며 받아들이게 된 것 도 얼마 되지 않았지만 꾸준히 허물을 벗어야 한다니 그러면서 성장하는 것이라니 새삼스럽다. 언제쯤이면 이 허물을 벗고 제대로 된 나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 제대로 된 나라는 표현이 적절치 않은 것 같다. 언제쯤 가면을 벗어던지고 맨 얼굴로 살 수 있을까? 가면을 쓰고 성장하는 걸까? 가면을 벗어야 성장하는 걸까? 어쨌든 나는 지금 나의 가면과 맨 얼굴을 관찰 중이다. 허물을 벗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그때는 내가 정하는가? 하늘이 정하는가? 복잡하다.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서로에게 달 같은 존재다. 계속 반구만 보여준다. 가장 밝은 면만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방의 어두운 뒷면은 볼 수가 없다. 내 어둠을 아는 것은 나뿐이라는 사실은 하나의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살면서 자세히 볼 수 있는 어두운 이면이란 자기 자신의 것뿐 이기에 남들은 저렇게 잘 나가는데 나만 이렇게 힘들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찰리 채플린은 “인생이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다. 필연적으로 남의 인생은 멀리서 보게 되고 자기 인생은 가까이서 보게 되니 남의 인생은 즐거워 보이고 나의 인생은 슬퍼 보이는 것이다.  


그러네 그래.. 너무 동감입니다. 찰리 채플린과 김난도 교수님!!


세상에는 두 종류의 후회가 있다. 하고는 싶었으나 해보지 못한 아쉬움에서 오는 후회와 실컷 용기를 내어 실천했지만 기대보다 성과가 좋지 못한 서운함에서 오는 후회. 어떤 후회가 더 나쁠까? 당연히 해보지 못한 서운함에서 오는 후회다. 아쉬움이 해소되지 않은 채로 끝까지 가니까. 반면에 일단 시도하기만 한다면 혹시 결과가 좋지 않아 실망하게 되더라도 시나브로 잊고 새로운 도전의 대상을 찾아 나설 수 있다. 더구나 그 저지름은 어떤 형태로든 깨달음을 주고 나를 한발 더 나아가게 할 것이다.


“ 감사합니다 교수님!! 저의 저지름을 용서하옵시고 깨달음을 주셨나이다...!!

교수님 말씀대로 라면 저는 저지르다 불사르고 죽을 뻔했는데 이제 살길이 보이네요.. 깨달음을 얻었거든요.. 후회는 이제 그만하고 계속 정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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