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키니는 기세다!
개그우먼 박나래가 과감하게 비키니 노출을 하면서 남긴 명언이다. 그녀의 몸매가 흔한 여자 연예인들처럼 날씬하거나 탄탄하지 않아도, 스스로를 드러내는 그 당당함을 나는 좋아한다. 한국 여자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날씬하고 탄탄한 몸을 가져야만 비키니를 입을 수 있다'는 사회적 고정관념을 허물어 주었다.
해외에 나가보면 외국여자들 그 누구도 비키니 입는데 자신의 몸매를 신경쓰지 않는다. 심지어 70대 할머니들도 아무렇지도 않게 비키니를 입는다. 그들에겐 비키니가 그저 '수영복'일 뿐, 몸매가 좋아야만 입을 수 있는 혹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그 무엇도 아니다. 왜 우리나라 여자들은 그렇게도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걸까.
나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 한평생을 살아오며 내면화된 '사회적 기준', 그리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습관 때문에 비키니를 '당당하게' 입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여름에 비키니를 입기 위해 겨울부터 다이어트를 시작하고 몸을 만든 다음에야 겨우 비키니를 입지만, 그 순간에도 혹시 내가 뚱뚱해보이지는 않을까, 남들이 수군대는건 아닐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예뻐야하고, 날씬해야하고, 탄탄해야한다는, 그래야 보다 완벽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헛된 기준에 집착했다. 어쩌면 내가 2,30대 시절 여름마다 해외여행을 떠났던건, 이러한 사회적 기준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이번 취업 준비를 위해 영어 몰입을 하면서 박나래의 '비키니 사진'을 떠올렸다. 그리고 내가 그동안 얼마나 영어에 관한 헛된 기준에 집착하며 살고 있었는지도.
특히 한국인들은 영어에 관한 기준이 높다. 10년 이상을 영어공부에 매진하고 또 토익 토플 등 취업을 위해 공부를 그렇게 하면서도, '나 영어 잘해요'라고 하는 사람은 별로 못봤다.
아마도 한국어 어순이 영어와는 반대이고, 발음 자체도 딱딱 떨어져서 리듬감있는 영어와는 다르기 때문에 특히나 영어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 같다. 또한 사회가 요구하는 영어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것도 사실이다. 나는 비키니를 입으면서도 남이 수군대지 않을까 걱정하던 것과 똑같이, 영어를 하면서도 남들이 비웃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나를 발견했다.
예전에도 해외 여행을 가면, 아예 외국인들만 있는 경우엔 크게 부담없이 영어를 했다. 그런데 한명이라도 한국인이 끼어있으면 여간 신경쓰이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가 내 영어실력을 비웃을까봐. 혹시 문법이나 단어가 틀렸을까봐, 발음이 이상할까봐, 실제 영어권에선 쓰지 않는 '콩글리시' 표현일까봐.
미국에 와서 3년째 살면서도 영어가 크게 늘지 않은건 아마도 이 때문일게다. 한국인들과 같이 있으면 괜히 신경쓰여서 못하고, 미국인들과 있어도 예의 그 '자기검열'이 작동해서 내가 틀린 표현을 할까봐 주눅들었다. 내 마음 깊은 곳에 '영어를 잘한다'는 것은 '원어민처럼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정도 수준이 아니니까 영어를 잘 못해, 그러니까 괜히 창피당하지 말고 가만히 있자.
지난 몇달간 취업준비를 위해 영어몰입을 하면서 그 자기검열과 높은 기준이 가장 나를 힘들게 했다. 미드를 쉐도잉(shadowing) 하는데 아무리 연습해도 원어민과 똑같은 발음과 억양이 도저히 안되는것이었다. 속도를 0.75배속, 0.5배속 해서 반복해도, 심지어 에피소드 하나를 수백번 봤는데도 안되는 문장은 끝까지 안됐다. 나중에는 혀가 미친듯 꼬여서 마치 방언하듯이 이상한 말들이 쏟아져나오기도 했다. 너무 화가나고 짜증이 났다. 왜 이렇게 안되는거야?!!
그러다 어느 순간 '영어'를 '나를 증명하는 수단'으로 쓰고 있는 나를 깨달았다. 오랜시간 완벽주의 성향과 헛된 사회적 기준에 맞추어 살아온 내가, 영어를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유능한지를 보여주는 수단'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태어나고 자라지 않은 이상, 완벽하게 원어민과 똑같이 발음하고 리듬을 타며 말한다는 것 자체가 마흔 넘어 미국에 정착한 사람에게는 애당초 어려운 일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나는 그 기준에 집착하며 왜 잘 안되냐며 스스로에게 화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영어는 '의사소통 수단'일 뿐이다. 비키니가 그저 '수영복'일 따름인 것처럼.
비키니가 '몸매 평가 도구'가 아닌것처럼, 영어는 '나를 증명하는 수단'이 아니다.
실제로 문법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원어민들도 문법 틀리게 말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발음도 그저 알아들을수 있기만 하면 된다. 미국에는 수많은 국가의 이민자나 인종들이 섞여 살아서 발음도 제각각 다양하다. 내가 집착했던 것은 표준화된 '백인 미국인의 자연스러운 억양과 발음'이었지만, 현실은 훨씬 다양한 발음들이 통용된다.
나는 늘 내가 '부족하다', '영어를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늘 자기검열을 일삼는 내 무의식과 스스로를 평가절하하는 완벽주의적 성향이 만들어낸 환상이었다. 내가 지금껏 공부했던, 그리고 연습했던 영어는 이미 충분했다.
결국 영어는
문법이 아니라 의도,
발음이 아니라 전달,
유창함이 아니라 기세다.
내게 부족했던 것은 '영어 실력'이 아니라 '자신감'이었다.
영어몰입하면서 박나래의 비키니를 떠올렸던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국인에게 영어와 비키니는 묘하게 닮아있다.
'비키니는 기세'라고 말했던 박나래처럼, 나는 '영어는 자신감'이라고 말하고 싶다. 몸매가 (사회적 기준으로) 안좋아도 당당하게 비키니 입으면 된다. 사실 남들은 그렇게까지 나에게 관심이 없다. 내 영어가 완벽하지 않아도, 당당하게 표현하면 된다. 아무도 내 문법이 틀렸다고 지적하지 않는다.
심지어 문법이 틀려도, 브로큰 잉글리시라도, 당당하게 내가 하고싶은 의도를 전하면 그만이다. 아무리 개떡같이 말해도, 원어민들은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심지어, 영어로 돈 벌어서 먹고 산다? 영어 잘하는거다!
영어는 뭐다?
자신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