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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워킹맘으로 산다는 건, 기적일 수밖에

by 슈퍼거북맘

새벽 4시 반. 알람이 울린다.


나는 몽롱한 정신으로 손을 뻗어 알람을 끄고, 조금만 더 따뜻한 이불 속에 누워 있고 싶은 유혹을 간신히 떨쳐내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젯밤 이미 입고 잠든 산책용 레깅스와 맨투맨 티셔츠 위에, 역시 문 앞에 미리 준비해놓은 집업 후드점퍼 하나를 주섬주섬 주워입은 후 1층으로 내려간다. 물을 한모금 마신 후 에어팟을 귀에 꽂고 밖으로 나간다. 새벽 4시 반의 공기는 딱 기분 좋을만큼 선선하고 촉촉하다. 코 끝에 닿는 공기의 숨결이 상쾌하고 고요하다.


아무도 없는 새벽의 정적. 그 고요함을 나는 사랑한다.

그 고요의 어둠 속을 나는 귓 속으로 파고드는 음악과 함께 걸어나간다. 세 달전부터 새벽 산책시 듣는 음악은 '영어 오디오'로 바뀌었다. 같은 영상을 수십번 반복해서 들으니 내용이 선명하게 들리고 이해가 되면서, 어쩐지 귀가 뚫린것같은 착각이 인다.


20분간의 가벼운 산책을 마친 뒤, 집에 돌아오면 아주 간단한 근력 운동을 한다. 너무나 초간단해서 근력운동이라 하기도 민망할 정도이지만, 어쨌든 운동은 운동이다. 따뜻한 차 한잔을 우리는 동안, 남편과 아이의 도시락을 싼다. 남편과 아이가 도시락을 먹고 하루를 든든하게 버티길, 사랑을 그득 부어 꼭꼭 눌러담는다.


그리고 며칠 전부터, 나는 도시락 하나를 더 싼다. 바로 내 도시락!



나는 미국에 사는 워킹맘이다.

첫 출근날, 생리 첫날과 겹친데다 낯선 공간에 낯선 사람들과 함께 7시간을 긴장 속에 앉아있느라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겠다. 아이의 픽업 시간을 고려해 풀타임이 아닌 파트타임을 지원했다. 9시부터 12시까지 사무실에 앉아 40-hour 트레이닝 수업을 들은 후, 12시에 아이 학교를 향해 출발한다. 꼬박 30분을 달려 학교에서 아이를 픽업해 다시 30분을 달려 센터에 내려준다.


내가 다니는 회사가 아이의 센터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막힌 신의 한수, 아니 신의 선물이다. 삶이 나를 위해 마련해놓은 위대한 시나리오의 일부라는 것, 나는 그저 그 흐름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올라탔을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있다. 아이를 센터에 내려주고 바로 옆의 회사로 들어갈 때마다, 또는 반대로 퇴근할때 사무실에서 나와 옆의 센터에서 아이를 픽업할때마다, 나는 복받쳐오르는 기쁨과 삶에 대한 감사로 전율했다.


12시부터 1시간을 아이 픽/드랍으로 사용한 후, 1시에 다시 사무실로 복귀해서 5시에 퇴근하는 일정이었다. 점심 먹을 시간이 없네? 첫 2,3일간은 아이를 센터에 내려준 후 근처의 스타벅스에 들려서 런치메뉴와 커피를 테이크아웃해서 오는 길에 차에서 해결했다. 그런데 급하게 차에서 먹다보니 소화도 안되고 스벅에서 메뉴 나오는 시간이 지체되면 사무실 복귀 시간이 늦어지게 되는게 싫었다.


그래서 나를 위해 간단한 점심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다. 아이를 픽업하러 학교 가는 길에 차에서 먹을 수 있는 부담 없는 메뉴, 덮밥을 보온도시락에 준비했다. 한그릇 음식이라 간편하고, 운전하면서도 숟가락만 있으면 손쉽게 먹을 수 있었다. 샌드위치처럼 속이 불편하지도, 흘릴까봐 신경쓸 필요도 없었다.


회사의 수습 직원으로서 트레이닝 수업 받는 2주간, 그렇게 하루 7시간 근무와 중간에 1시간 아이를 픽/드랍하면서 시간 아끼려고 운전하는동안 점심을 해결하던 그 시간이 나는 그저 행복하고 감사했다. 내 상황에 꼭 맞는 회사가, 내가 목표하던 바를 이룰 수 있도록 지원해줄 기회가 왔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사실 한국에서 워킹맘으로 살아본 적은 없다.

아이를 낳으면서부터 쭉 직장을 쉬었기 때문에. 그러나 여기저기서 귓동냥으로 들은 이야기는 많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워킹맘으로 살아가려면 누군가의 도움은 필수이다. 양가 부모님이든, 사비로 고용하는 이모님이든, 발달 장애 가정이라면 나라에서 보조하는 활동지원사든.


나도 스텔라가 학교에 반일, 치료 센터에서 반일 지내는 스케줄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일하는게 불가능할거라 생각했다. 12시 반에 아이를 픽업해서 라이드해야하는데, 어떻게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은 진실이다. 내가 분명한 의도와 열정을 가지고 이리저리 찾다보니, 결국 길이 열렸다. 내 상황에 딱 맞는 파트타임 근무가 가능한 회사에, 심지어 아이 센터 바로 옆에 있는 회사에 고용된 것이다.


이게 기적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아무런 연고도, 도움받을 곳도 없는 낯선 미국 땅에서

내 손으로 직접 아이를 케어하면서도

내 커리어를 위해 필요한 일을 하는


미국에 사는 워킹맘이다.


나는 내가 자랑스럽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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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