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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경 Mar 14. 2019

청춘소설

  고등학교 때 아는 오빠가 있었다. 난 모범생이 되긴 싫었지만 그렇다고 날라리가 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동갑내기 남자 친구들은 많았어도 아는 오빠를 사귈 기회는 없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아마 내가 가진 첫 ‘아는 오빠’였을 것이다. 그땐 썸이라는 말이 없었고, 나는 그 사람이 보여주는 호의와 장난을 해석할 줄 몰랐다. 내가 그 사람에게 갖는 감정에 이름을 붙일 줄도 몰랐다. 다만 어떤 즐거웠던 짧은 가을과 겨울이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내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던 어느날, 이라고 해야 할까. 나를 좋아해주는 잘생긴 남자애가 생겼고 고백을 받아들였다. 돌이켜봐도 위악이라기엔 단순한 행동이었지만, 실은 돌이킬수록 그 행동을 나는 자꾸 어떤 식으로 해석하게 된다. 어쨌든 나는 그애와 사귀자마자 그 사실을 ‘아는 오빠’에게 알렸다. 축하한다고 했던가, 뭐라고 했던가? 그애와는 얼마 못 가 헤어졌다. 헤어지자마자 그 사실을 ‘아는 오빠’에게 알렸다. 뭐라고 답이 왔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많은 기억과 타이밍들이 엉켜 있지만, 확실한 건 그 직후 대략 일 년간 연락이 끊어졌다는 사실이다. ‘아는 오빠’는 잠수를 탔다. 나는 일 년간 그 사람을 기다렸다. 그건 좀 웃긴 일이었는데,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스쿠터를 타고 내 집앞에 찾아왔던 장면은 어떤 짧았던 겨울의 딱 하루 뿐이었다. 그러나 그 일 년간 나는 버스에서 내리기 직전 매일 그 장면을 상상하며 기대심을 품고 집 앞으로 걸어갔고, 매일 무너졌다.



  그 사람과의 인연은 거의 끊어졌지만 사실 아직도 끊어지진 않았다. 20대 초반엔, 둘 다 성인이 된 이후로 일 년에 한두 번씩은 만났던 것 같다. 몇 번의 자기비하와 망설임, 한 번의 포옹이 있었는데, 나는 그 모든 액션들을 당시에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 눈엔 그저 만날 때마다 어정쩡한 태도였으며, 그게 재수없고 속상해서 화를 냈고 울기도 했지만 영영 끊어내진 못했다.


  나는 20대 초반에 아주 많은... 연애를 했지만 그 사람과는 단 한번도 사귀지 않았다. 누군가와 사귈 때는 그 관계에 마음이 쏠려 있었기 때문에 정작 일 년에 한두 번 만나는 그 사람과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한 번도 거시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종종 타지에서 낯선 누군가에게 괜한 속마음을 털어놓을 때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사람을 개새끼라고 소개하곤 했다. 언젠가는 그 사람이 개새끼라는 내용을 담은 공연에 직접 초대해서 보여주기까지 했다. 물론 그때는 이미 대부분의 감정이 과거형이 되어버렸을 때였고, 이 글을 여기다 쓸 수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그런 생각들을 한다. 내가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개새끼라고 생각하거나, 그것이 ‘아는 오빠’건 어떤 친구였건 가족이건 간에, 그런 내 입장에서의 해석들에,
  실은 얼마나 상대에 대한 이해의 여지가 없었는지 생각한다.


  그렇다고 모든 게 딱히 내 탓이라는 건 아니지만. 뭐랄까 인물과 상황의 서브텍스트를 내가 얼마나 읽어낼 줄 몰랐었는지. 저 사람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나는 몰랐던 건지, 그런 생각을 한다.
  그것이 이야기가 아니라 내 앞에 닥친 현실일 때, 가장 가까운 사람일수록, 나는 가장 미궁에 빠졌다. 배우라면서 글을 쓰겠다면서 어쩜 그렇게 몰라올 수 있었는지. 아니면 내가 그것에 늘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결국 이런 직업을 선택하게 될 운명이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상대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어린 나 역시 그렇게밖에 대응할 수 없었으리라는 생각도 있다. 서른을 목전에 둔(아직 아니다. 목전에 두었을 뿐이다. 확실히 하자) 지금은 또 달라지고 싶고 달라지겠지만, 그렇게 대응할 수밖에 없던 그 순간들이야말로
   간지러운 말로 수사하자면 소중한 청춘.. 같은 것, 이라고 느낀다.


  최은영의 단편 ‘그 여름’을 읽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여러 가지 생각이 났다. 그리고 아주 과거의 나에게 문득... 좀 귀엽다는 감정을 느꼈다. 아주 뻔하고 귀여운 오해들. 너무 흔하고 어쩔 수 없어서 누구에게나 아픈 사건들.
  그래서 청춘소설이 갑자기 쓰고 싶어졌다. 청춘소설이라는 게 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런 것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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