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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경 Mar 14. 2019

긍정적인 성우에 대하여

영화 <안시성> 함양 촬영기

촬영하러 함양에 내려갔는데 히말라야가 따로 없었다. 마침 북극의 혹한이 상륙한 날이었다. 토성 세트장은 그야말로 토성이라 오르락내리락 하려면 반지원정대처럼 좁은 절벽을 오르거나 맨엉덩이로 흙썰매를 타야 했다. 전쟁 촬영보다 훨씬 더 스릴넘쳤다. 대기실로 주어진 컨테이너에는 해가 넘어가자 불이 안 들어왔는데, 깜깜한 데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자니 수련회 와서 정전된 것처럼 웃긴 기분이었다.

     

거의 몇 개월간 상주하다시피 하고 있는 남자 배우들은 장기 전쟁 중인 고구려인 그 자체였다. 나는 불평과 욕으로 개그를 많이 치는 스타일이지만 그들 앞에서는 조심하곤 했다. 육체적 고생의 정도로 치면 사실 댈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중 성우라는 친구가 있는데 여름에 검술 때문에 액션스쿨 다닐 때 처음 합 맞추게 된 남자 파트너였고, 동갑이었다. 첫인상이 좋진 않았다. 만난 지 1초만에 나이를 확인하더니 말을 놓고 나한테 막 가르치길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더워죽겠는 데다가 남혐 덕에 본의 아니게 철벽이었고 여러 상황에 대한 시니컬함이 극에 달해있던 나는 아 뭐이런 나이질서를 좋아하는 마초맨이 있나 생각했다. 뭔가 운동선수같은 외양에 대한 선입견도 한몫 했던 것 같다. 맨스플레인이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다시 액션스쿨에 갔는데 그 친구가 다른 사람들에게 막 물을 나눠주는 걸 봤다. 배우들이 여럿 모이면 으레 금방 친해지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각자도생이기 때문에 그런 서글서글한 선행은 눈에 띈다. 그때 약간 미안해졌다. 그 이후로 눈이 마주치면 문경아 어쩌고 이름을 부르길래 또 경계심많던 나는 뭐 저런 게 다 있나 했다. 좀 살펴보니 성우는 모두에게 다 그러고 있었다. 이름을 외는 것도 신기했고 그 친화력도 신기했다. 그날 깨달았다. 아 얘는 정말 착하고 친화력이 좋은 애구나. 가끔 생긴 것과 다르게 소소하니 심성이 곱고 모두에게 사근사근한 스타일이 있다. 처음에 조폭출신인 줄 알았던 우리 실장님이 그런 타입이다. 아마 이 친구도 그런 비슷한 타입인 것 같다. 어제 컨테이너에 모여앉아 서로 허연 이빨밖에 안 보이는 도란도란한 분위기에서 처음으로, 여름에 너를 오해했었다고 고백했다. 니 첫인상 별로였다느니 기분나빴을 수도 있을텐데 걔는 말을 미괄식으로 들었다. 마지막에 ‘너 참 착하다’는 말만 듣더니 가슴에 손을 얹으며 기분이 좋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걸 보고 아... 쟤는 역시 착하고, 긍정적이구나, 했다.

     

긍정적인 성우 얘기를 왜 했냐면 어제 컨테이너 안에서, 걔가 갑자기 끝말잇기라든가 삼행시 놀이 같은 걸 시작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섞이지 않고 그냥 앉아있었는데, 듣자 하니 웃겨서 합류하게 됐다. 평균나이 서른쯤일 남자 그룹에서 지난 겨울 고된 촬영현장을 버티기 위해 남은 시간을 끝말잇기와 삼행시로 소일해왔다는 것이다. 맙소사.

     

그들은 이미 프로였다. 전체 단어가 뭔지 알려주지도 않고 일단 운을 띄우고 보는데, 그럼 아무 생각 없이 0.1초만에 톤으로 웃겨내는 식이었다. 그게 정말 오호츠크해 돌고래 랩처럼 말도 안 되는데, 혹한의 시골 캄캄한 컨테이너 안에서 그러고 있으니깐 의외로 겁나 웃겼다. 박명수식 개그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성우는 그것이 연기 연습이며 미래를 위한 예능 연습이라고 했다. 탄복했다. 저 친구는 정말 긍정적이다!

     

내가 SNS에서 할 말이 아니지만 그 현장은 정말 죽음이고 남자들은 특히 몇십배 더 그렇다. 그리고 고정단역들의 얼굴은 콩만큼 나오거나 안 나올 것이다. 다 알고 들어온 거지만 무명 배우들은 그래도 속이 상하고 몸이 상하게 마련이다. 추위에 떨며 몇 시간씩 대기 타다가 어떻게 주연배우 옆에 붙어 샷 받아보려고 눈치싸움 하다 보면 자괴감 회의감 인생에 환멸 느끼기 딱 좋다. 그 고통과 인고의 시간을 이토록 건전한 놀이문화로 승화시키다니. 세상에 음담패설 왕게임도 아니고 끝말잇기, 삼행시라니... 진짜 청소년 수련회보다도 해맑지 않은가. 근데 그게 실제로 불꺼진 컨테이너에서 뚱하게 앉아있던 나를 엄청 웃게 했다. 나도 한 번 삼행시 기습당하기까지 했다. 다행히 대충 성공했다.

     

원래 고통스런 상황에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아무 말이나 해도 다 웃긴 법이긴 하다. 그렇긴 해도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있다는 건 중요하다. 그런 사람들이 있으니깐 인생은 아름다워 같은 영화가 나오고 그런 거겠지. 물론 매일 술을 마신다고도 했다. 노가다 아저씨들이 왜 술 마시는지 알게 됐다고 했다. 그러나 그 직후 그애는 갑자기 <위대한 쇼맨>을 봤냐며, 나와 몇몇과 함께 그 노래가 얼마나 위대한지 떠들며 열심히 감동하더니, 결국 <위대한 쇼맨>에서 젤 멋진 노래 ‘This is me'를 틀어서 들었다. 나는 ‘진짜 틀었다’는 그 행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안 떠드는 누군가 중에는 시끄러워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깜깜하고 그런데, 일단 틀어서 듣고 보는 행동력!ㅋㅋㅋ 진정한 카르페 디엠, 시즈 더 모먼트란 저런 태도가 아닐까... 라고까지 생각하면 오바겠지만, 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런 건 거 같다. 웃음은 고통 속에서 피어난다거나, 소중한 순간은 환멸과 좌절 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거나, 혹은,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게 일면 꼰대같지만 의외로 쓸만한 말이라거나. 그런 입시식 주제를 꼭 전하고 싶었던 건 아니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게 제일 좋다. 하지만.

     

전하고 싶었던 게 있다면 어제의 분위기. 캄캄하고 추운 곳에 성기게 둘러앉은 별로 안 친한 사람들끼리의 단순한 행복감.

     

나는 기본적으로 시니컬한 유우-머를 즐기는 인간이지만 나 역시 주변인들에 비하면 순진하고 긍정적인 구석이 있는데, 그래서 어제의 나는 사람들한테 그렇게 별 좀 보라고 소리쳤다.

북극의 한파가 북극의 하늘까지 데려왔는지, 함양의 별하늘은 그러니까

샌프란시스코에서 9년 전에 본 그것 다음으로 혹은 그 이상으로 선명하고 이뻤다.

콕콕 분명하게 박혀있는 것들로만 족히 백 개는 넘었을 테니깐 말 다했지, 부럽지?

전하고 싶었던 게 있다면 그 하늘 정도인데, 그건 사진으로 어차피 안 나오니까 눈에 열심히 담았다.

     

정말 정말 추웠고 내가 몇 번이나 써먹었던 개그처럼 그 시간동안 고깃집 불판을 닦았다면 훨씬 따뜻하게 비슷한 돈을 벌 수 있었겠지만,

돈 주고 못볼 별하늘을 본 것으로 마음이 금세 좋아졌다.

이 정도면 나도 꽤 착하고 긍정적인 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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