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미 앳 더 게이트(Enemy at the Gates) 안의 생각들
미국법 수업을 듣던 어느 날 있었던 일이다. 백발과 흰 수염이 멋지게 어울리는 미국인 교수님은 여느 때처럼 신나게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날 배웠던 것은 바로 미국 헌법(Constitutional Law)과 민사소송법(Civil Procedure)에서 다루는 집단소송(Class Action)이었다. 이 개념을 한참 설명한 후, 아직 완벽히 이해를 하지 못한 학생들의 표정이 보였는지 교수님은 뜬금없이 한 편의 영화를 소개했다. 집단소송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 <레인메이커>이라는 영화였다. 레인메이커를 예시로 들으며 한 집단소송 설명은 대성공이었다. 교수님은 말을 너무 재미있게 하시는 분이라, 학생들의 반응이 너무 좋았기에 자주 삼천포로 빠지기 일쑤였고 그날도 그것은 예외가 아니었다.
한참 영화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다가, 뜬금없는 질문이 내게로 향했다. "Mr. Moon, do you know the difference between movie and film? (Movie와 Film의 차이가 뭔지 알아?)"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머릿속에서는 한글로 엄청난 고민이 이어졌다. '아니, movie도 번역하면 영화고 film도 번역하면 영화인데 뭐가 다르지? 차이가 뭐지?' 결국 잘 모르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되자, 임기응변으로 생각해 낸 답이 "movie는 모든 영화를 뜻하고, film은 다큐멘터리를 의미하는 거 같다!"였다. 지금 봐도 나쁘지 않은 임기응변이었지만, 나의 대답은 당연히 정답이 아니었다.
교수님의 좋은 시도였지만, 정답은 아니라는 답변과 함께 정답 공개의 시간이 이어졌다. Movie는 넓은 의미에서 모든 영화를 말한다. 로맨스, 코미디, SF, 호러 등등 모든 분야의 영화가 바로 movie다. 따라서 Movie는 가볍게 볼 수 있고 나아가 심심할 때 별생각 없이 볼 수 있는 것이다. 반면, Film은 그 안에 어떠한 메시지가 담겨있고 그 영화를 보고 나서 우리로 하여금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며 계속해서 고민거리를 줄 수 있는 영화이다. 아니, 꽤 그럴듯한 분류가 아닌가? 그때 일을 계기로 영화를 볼 때, 내 머릿속에는 항상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이 영화는 movie일까, film일까?'
그 이후로 나는 Movie도 좋지만, Film을 참 좋아하게 되었다. Film을 보고 그 Film이 던져주는 고민거리를 생각하면서 시간을 갖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인생 최고의 Film을 소개하자면, 큰 고민 없이 어렵지 않게 바로 이 영화를 소개할 수 있다. 바로 내 인생영화 중 하나인 장 자크 아노 감독의 에너미 앳 더 게이트(Enemy at the Gates)다. 이 Film을 통해서 여러분은 '모두가 평등한 세상은 존재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실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다. 독일 나치(Nazi)와 소련의 충돌에서, 독일로 승리의 추가 기울어 보이는 거 같던 순간 독일은 소련을 장악하기 위해 소련의 심장부로 들어가는 입구인 '스탈린그라드(Stalingrad)'로 침공을 시작한다. 수없이 많은 피가 흐르고, 독일의 파상공세에 소련이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이며 전세가 기울어 가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바로 이 시점, 추운 소련의 한 복판에서 늑대사냥을 하는 집안에서 자라난 일개 병사 '바실리(Vassili)'와 소련의 선전장교(Propaganda officer) '다닐로프(Danilov)'의 만남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들의 만남은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시면서 평화롭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독일의 침공을 막기 위해 징집되어 제대로 된 총도 지급받지 못하고 총알받이로 전장에 나선 바실리는 독일 군대의 총격에 죽은 전우들의 시체에서 죽은 척하며 독일군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전장교의 역할 중 하나인 선전 전단을 뿌리기 위해 전장에 차를 타고 온 다닐로프는 적군에 의해 차가 망가져 바실리가 숨어있던 시체들 속으로 같이 숨어든다. 안경은 깨져있고, 살아가서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자신의 소총을 꺼내 든 다닐로프는 적병을 향해 총을 겨누지만 손이 벌벌 떨려 조준을 잘할 수 없다. 그런 다닐로프를 보고, 바실리는 시체 사이를 기어가 다닐로프에게 소총을 건네 달라고 말한다.
어렸을 적 할아버지와 함께 늑대를 사냥하던 기억을 되살린 바실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 일과 중인 독일 병사에게 총을 겨눈다. "탕! 탕! 탕!" 총알이 발사될 때마다 독일 병사들이 그대로 쓰러진다. 다닐로프는 이런 바실리의 저격 실력에 경이로움을 느끼며, 상부에 보고하여 바실리가 패색이 짙은 소련군에 희망이 될 수 있다며 그를 나치 장교들을 전담하는 저격수로 만들어 소련군의 강함을 선전하게 된다. 시체 속에서 숨어있던 그가 하루아침에 전설적인 소련의 영웅이 된 것이다.
1) 이념의 갈등(제국주의 v. 반(反)제국주의)
전 세계 7,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세계 제2차 대전은 이념의 갈등에서 생겨났다. 바로 로마제국의 뒤를 이어 제국주의를 취한 국가들(독일 나치, 일본)은 제국주의를 향해 멈춤 없이 전진할 뿐이었고, 그 발걸음이 자신들의 국가에까지 이르게 되자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적대시하는 연합국(미국, 소련)이 방어와 공격에 나선 것이다. 이념의 갈등이 결국 피를 불러왔다. 도대체 제국주의가 뭐길래, 대한민국의 총인구수보다 더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갔던 것일까?
제국주의(Imperialism)는 한 국가가 다른 국가, 지역 등을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지배하려는 정책이자 사상이다. 과거 5대 제국이었던 앗수르(Assyria), 바벨론(Babylon), 페르시아(Persia), 헬라(Hellas), 로마(Rome)와 그 뒤를 이었던 대영제국(British Empire)을 비롯한 여러 유럽 국가들의 근대 제국주의에 이르기까지 제국주의는 전 세계를 아우르는 힘의 논리이자 무력에 의한 정의 그 자체였다. 다른 나라를 침략해 그 나라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고, 그 나라의 재산과 영토를 강제로 가져올 수 있기에 국가들은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상대 나라를 약탈하고 빼앗을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자기 국가 국민 또는 인종의 우월함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제국주의 국가의 대표주자였던 독일과 일본은 제국주의의 유지 및 발전을 목적으로 전쟁을 일으켰고, 미국과 소련을 위시한 연맹국은 이를 저지하기에 이른다. 독일과 소련이 한바탕 싸우던 그 과정 중에 우리는 지금 스탈린그라드에 있는 것이다.
2) 욕망하는 인간의 실체
'갖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은 참으로 자연스러운 일이다. 예쁜 것, 좋은 것, 훌륭한 것, 좋아 보이는 것들을 볼 때 인간의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는 '갖고 싶다'는 마음이 피어난다. 그럼 어떻게 가질 것인가? 첫 째, 자신이 직접 구할 수 있다. 바닷가에 있는 예쁜 조개들로 만든 조개목걸이는 조개를 잡아서 구멍을 뚫어 만들 수 있다. 맛있어 보이는 바나나는 바나나 나무에 기어올라가 구할 수 있다. 둘째, 그것을 가진 이에게 구입할 수 있다. 시장경제가 활성화된 국가라면 재화를, 그 이전이라면 물물교환을 통해서 갖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있다. 셋째, 빼앗을 수 있다. 물리적 혹은 무형적인 힘을 통해 강제로 소유권을 박탈하고 자신에게 이전시킬 수 있다.
3가지 방법 중 가장 쉬운 것은 무엇일까? 만약 힘이 있다면, 가장 쉬운 것은 당연히 3번이다. 직접 구하는 것은 시간과 에너지가 동시에 소비되는 일이고, 구입은 그 소유자가 원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 빼앗는 것은 힘만 있다면 상대방의 의사와 상관없이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 즉시 그 소유권을 내게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쉽다. 그래서 독일과 일본을 비롯한 인류 역사상 수많은 제국주의 국가들은 3번을 선택해온 것이다. '갖고 싶다면 빼앗는다' 이 얼마나 본능적인 행동이란 말인가.
그래서 본능에만 충실한 욕망하는 인간의 실체에는 추악함이 숨겨져 있다. 사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모든 전쟁의 과정은 바로 그 추악함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일지 모른다. '갖고 싶다면 빼앗는다'는 간단한 욕망이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같이 살던 가족들을 찢어놨다. 욕망하는 권력자들이 가진 그 추악함은 바실리로 하여금 저격총을 들고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의 머리를 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추악함에 대한 제어로써 '법'은 발전해왔다.
1) 사회주의(Socialism)와 공산주의(Communism)의 외침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사실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그 유명한 칼 마르크스(Karl Marx)다. 마르크스의 이론으로 서로 다른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묶어서 이야기해보자. 그러면, 바실리가 충성을 다하고 있는 '소련'에 대해서 조금 더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산주의 깃발에서 찾아볼 수 있는 낫과 망치의 의미와 같이, 공산주의는 부유한 계급(부르주아)이 생산수단을 독점하여 농민과 노동자(프롤레타리아 계급)를 수탈하던 당시 사회에서 계급을 없애고 사유재산을 없애는 것을 담고 있던 마르크스주의를 바탕으로 한다. 공산주의는 생산수단의 '공유'를 통해서 계급과 사유재산을 없애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받는다"는 공산주의의 모든 이념을 잘 담고 있는 한 문장이다. 바실리의 국가 소련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공산주의 국가였다.
반면, 동시에 소련은 사회주의 국가였다고 일컬어진다. 이는 당연할 것이 공산주의가 사회주의의 한 분파에 속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에도 수없이 많은 분파가 있지만, 소련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는 바로 칼 마르크스의 이론(엄밀히 말하자면 마르크스-레닌주의)을 기반으로 한 급진적인 것이다. 결국 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분파에 따라 그 정도는 다르다)'를 반대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렇다 보니 소련을 표현할 때,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혼용되기 쉽고 확연한 구분이 어렵다.
이들의 외침을 단순화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원한다.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2) 평등을 향한 외침 속에 사람의 욕망과 함께 스며든 불평등
플라톤이 꿈꾸었던 유토피아, 토마스 모어의 이상사회, 장 자크 루소가 꿈꾼 성실한 계약로서의 국가는 소련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1991년 소련은 역사책 속으로 사라졌다. 그 이유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받는다"는 멋진 문장이 완전히 틀린 명제였기 때문이다. 사람은 결코 능력에 따라 일하지 않고, 항상 필요 이상을 받기 원한다. 그게 인간의 본성이자, 우리의 본모습이라는 것이 가감 없이 드러났다.
사람은 늘 필요보다 더 많은 것을 욕망한다. 능력에 따라 일하는 것이 아니라, '받는 만큼' 일하게 된다. 인간은 마르크스가 생각한 것처럼, 순수하지 않았다. 평등을 외치며, 평등 속에 감추어 계급을 만들어냈고 그 과정은 부패로 가득했다. 그것이 바실리의 국가 소련의 실체였고, 독일군에게 멸망당하지 않았을 뿐 결국 사라지게 된 이유였다.
또한 사람들은 평등한 사회에서 불평등을 느끼기 시작했다. 같은 집, 같은 음식, 같은 월급을 받으면서 살아가는데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불평등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3) 계량화가 가능한 것, 그리고 계량화가 불가능한 것
월급 금액, 집의 평수, 먹는 음식의 그램수까지 똑같은 평등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에 불평등을 느꼈던 것일까? 나는 그 어떤 책과 그 어떤 논문에서도 이 영화만큼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명쾌하게 담고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를 내 방식대로 표현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인간은 '계량화가 가능한 것'에 대해서는 평등을 만들 수 있지만, '계량화가 불가능한 것'에 대해서는 절대로 평등을 만들 수 없다.
승승장구하던 바실리와 다닐로프 사이에 간극이 생기기 시작한다. 별 볼일 없었던 일개 병사 바실리는 장교 다닐로프에 의해서 소련의 영웅이 되고, 자연스레 다닐로프의 이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바실리의 이름은 소련과 독일로 퍼져나간다. 두 사람의 '명예'가 달라진 것이다. 이를 어떻게 평등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이는 계량화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바실리와 다닐로프 앞에 아리따운 여인이 나타난다. 그녀의 이름은 타냐(Tania). 두 남자는 첫눈에 반해버린다. 독일군에 부모를 잃은 타냐는 일반 병사로서 전쟁에 참여하길 원하지만, 그녀를 좋아하는 다닐로프는 독일어를 공부한 그녀가 그런 하찮은 곳이 아니라 더 중요한 보직에서 쓰일 수 있다며 사령부에서의 근무를 추진한다. 바실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그저 매일매일 생과 사를 오가는 전쟁 속에서 밤마다 살아 돌아온 것을 기념하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신의 하루를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타냐는 바실리가 잠자고 있는 전쟁통 속 모포로 들어가 둘은 사랑을 나눈다. 다닐로프의 마음이 찢어졌다. 그녀의 마음을 원하는 것은 두 명인데, 그녀의 마음을 얻은 건 단 한 명이다. 불공평이 생겨났다.
계량화가 불가능한 사랑은 어떻게 평등하게 분배할 것인가? 승승장구하던 다닐로프는 타냐를 잃은 슬픔에 결국 삶을 마감한다. 사랑의 불평등은 그 어떠한 것보다도 그에게 크게 다가왔던 것이 아닐까? 자, 다시 질문을 던져보자. "평등한 사회는 존재할 수 있는가?"
소련은 사라졌고, 공산주의와 급진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던 국가들은 거의 대다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모두 깨달았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는 존재할 수 없음을...'
사실 인간은 처음부터 평등하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 장 자크 루소는 이미 1755년에 주장한 바 있다. 인간이 처음 불평등해진 순간은 함께 모여서 누구 한 명이 '노래'를 불렀을 때라는 것이다. 누군가는 그 노래의 음역을 따라 부를 수 있었고, 다른 누군가는 전혀 따라 부를 수 없었을 것이다. '어? 쟤는 되는데, 나는 왜 안되지?' 노래에서 시작된 불평등은 모든 분야로 확장된다. 키, 건강, 사고능력... 애당초 불평등한 인간들 간의 평등을 추구하는 것은 루소에 의하면 모순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인류에게 두 가지 불평등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자연적 또는 신체적 불평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에 의해 정해지는 것으로, 나이, 건강, 체력의 차이와 정신이나 영혼의 자질 차이로 성립된다. 또 다른 불평등은 일종의 약속에 좌우되고, 사라들의 동의로 정해지거나 적어도 용납되는 것으로 도덕적 또는 정치적 불평등이라고 할수 있다. 후자는 일부 몇몇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쳐 누리는 갖가지 특권들,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부유하다거나 더 존경을 받는다거나 더 권력을 가지고 있다거나 또는 타인을 복종하게 만든다거나 하는 특권들에 의해 성립된다." 장 자크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책세상, 2003.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대부분의 국가에는 '평등'을 추구하는 헌법이 존재한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분명 우리나라는 '사회주의', '공산주의'국가가 아닌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기반한 국가다. 그런데, 우리 헌법은 분명 일정 부분을 할애하여 사회국가원리를 담고 있다. 헌법 제10조는 인간의 존엄성을 통해 인간의 보편적 평등과 행복 추구권을 규정한다. 제23조는 개인이 갖는 재산권의 한계를 정한다. 제31조와 36조는 사회적 기본권의 보장을 규정한다. 제119조 2항 이하는 '경제영역에서 적극적으로 계획하고 유도하고 재분배하여야 할 국가의 의무'를 규정한다. 헌법 전문은 "국민 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있다. 또한, 제11조는 모든 국민이 심지어 '평등할 권리'를 갖고 있다고 천명한다.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국가는 '평등한' 국가다.
대한민국헌법 제11조 ①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②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 ③ 훈장등의 영전은 이를 받은 자에게만 효력이 있고, 어떠한 특권도 이에 따르지 아니한다.
"우리 헌법은 사회국가원리를 명문으로 규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헌법의 전문, 사회적 기본권의 보장(헌법 제31조 내지 제36조), 경제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계획하고 유도하고 재분배하여야 할 국가의 의무를 규정하는 경제에 관한 조항(헌법 제119조 제2항 이하) 등과 같이 사회국가원리의 구체화된 여러 표현을 통하여 사회국가원리를 수용하였다. 사회국가란 한마디로, 사회정의의 이념을 헌법에 수용한 국가, 사회현상에 대하여 방관적인 국가가 아니라 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정의로운 사회질서의 형성을 위하여 사회현상에 관여하고 간섭하고 분배하고 조정하는 국가이며, 궁극적으로는 국민 각자가 실제로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그 실질적 조건을 마련해 줄 의무가 있는 국가이다." 헌법재판소 2002. 12. 18. 선고 2002헌마52 전원재판부.
앞서 살펴보았듯, 완전한 평등이 존재하는 국가는 있을 수 없다. 바실리와 다닐로프 사이에서 생겨났던 불평등은 바로 이 점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아무리 같은 옷, 같은 신발, 같은 집에서 살게끔 하여 계량화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통제하더라도 계량화되지 않는 것에는 언제나 불평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계량이 불가능 한 것을 제한할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나라를 비롯한 현대 대부분의 국가들은 끊임없이 '평등'을 하나의 가치로써 추구한다. 방법은 다르지만, 오늘날 현대국가들도 불평등의 부조리함과 부정의함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내가 부족한 것 때문에 불평등을 느낄 때에는 분노하는 마음이 들지만, 다른 사람보다 내가 나은 부분이 있다면 한편으로 다행스럽다는 마음과 함께 어깨가 으쓱 올라간다. 평등하길 원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평등하길 원치 않는 인간의 복잡한 마음이 인간이 만든 제도와 이념에도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