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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용석 Jun 26. 2019

과학은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할까?

맹목적인 과학의 밝은 미래에 대한 믿음에 울리는 경종

학부에서 국제법 수업을 듣던 어느 날 있었던 일이다.  백발과 흰 수염이 멋지게 어울리는 미국인 교수님은 여느 때처럼 신나게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날 배웠던 것은 바로 미국 헌법(Constitutional Law)과 민사소송법(Civil Procedure)에서 다루는 집단소송(Class Action)이었다.  이 개념을 한참 설명한 후, 잘 못 알아듣는 학생들이 있는 것 같자 교수님은 한 편의 영화를 소개했다.  바로 <레인메이커>이라는 영화였다.  그 교수님은 말을 너무 재미있게 하시는 분이라, 학생들의 반응이 너무 좋았기에 자주 삼천포로 빠지기 일수였고 그날도 그것은 예외가 아니었다.


한참 영화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다가, 뜬금없는 질문이 내게로 향했다.  "Mr. Moon, do you know the difference between movie and film? (Movie와 Film의 차이가 뭔지 알아?)"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머릿속에서는 한글로 엄청난 고민이 이어졌다.  '아니, movie도 번역하면 영화고 film도 번역하면 영화인데 뭐가 다르지? 차이가 뭐지?'  결국 잘 모르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되자, 임기응변으로 생각해낸 답이 "movie는 모든 영화를 뜻하고, film은 다큐멘터리를 의미하는 거 같다!"였다.  지금 봐도 나쁘지 않은 임기응변이었지만, 나의 대답은 당연히 정답이 아니었다.


What is the difference between movie and film?

Cordell Schulten


교수님의 '좋은 시도였지만 정답은 아니라는 답변'과 함께 정답 공개와 설명의 시간이 이어졌다.  긴 이야기를 요약해서 말씀드려보겠다.  먼저, Movie는 넓은 의미에서 모든 영화를 말한다.  로맨스, 코미디, SF, 호러 등등 모든 분야의 영화가 바로 movie다.  특히, 교수님은 movie를 가볍게 볼 수 있고 나아가 심심할 때 별생각 없이 볼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라고 덧붙여주셨다.  반면, Film은 어떠한 메시지가 담겨있고, 그 영화를 보고 나서 우리로 하여금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며, 고민거리를 줄 수 있는 영화라고 하셨다.  아니, 꽤 그럴듯한 설명이 아닌가?


곧이어 교수님은 오늘 우리가 배운 집단소송(Class action) 개념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위해 다음 시간에 'Rainmaker'라는 "film"을 볼 것이라며, 다음 시간까지 영화를 보며 해당 법 개념을 잘 파악할 수 있게 판례를 읽어오라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때 일을 계기로 영화를 볼 때 내 머릿속에는 항상 질문이 떠오른다.  '이 영화는 movie일까, film일까?'


The RainMaker, 1997


사회학자들의 궁극적 목적이자 사명은 이 사회를 설명해내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우리 사회를 표현하는 수많은 단어들이 존재한다.  그중 이 사회를 잘 설명해줄 수 있는 세 가지 주요한 단어로 1) 신자유주의; 2) 합리주의; 그리고 3) 실증주의를 꼽고 싶다.


신자유주의의 캐치 프레이즈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이며, 그 가능성은 '노력'에서 나온다고 이야기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공평하게 하루에 24시간이 주어지는 만큼, 같은 시간을 들여 노력한 경우 더 좋고, 더 많은 결과를 얻어 합리성을 추구해야 하지 않느냐고 합리주의는 말한다.  그리고, 그 합리성의 극대화를 위해 실증주의는 경험과 실증으로 모든 것을 풀어낼 수 있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하여 ‘과학’의 손을 잡는다.  결국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극단적 추구는 결국 과학만능주의(Scientism)의 등장을 야기한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그의 저서 『위험사회』에서 "사회적 합리성이 없는 과학적 합리성은 공허하고, 과학적 합리성 없는 사회적 합리성은 맹목적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이러한 생각에서부터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과학이 등장하면서 사람들의 쌓아온 고민과 생각에는 과학과의 융합이 이루어졌다.  바로 '과학 철학'의 등장이다.  과학적 합리성은 우리 사회를 더 나은 사회로 만들어줄까? 과학적 합리성은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까? 와 같은 고민들이 시작된 것이다.


과학 철학은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할 것 같지만, 사실 우리와 친숙하다.  왜냐, 이야기꾼들에게 이 과학 철학은 너무나도 매력적인 존재였기 때문이다.   과거 문학의 시대에선 조지 오웰의 저서 『1984』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글을 통해 이러한 이야기들을 풀어내며 과학만능주의를 풍자하고 비판했다.  그들은 과학의 발전과 그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통해 인류가 맞게 될 사회적 합리성이 없고 과학적 합리성만 남은 세계의 위험과 공허함을 글로써 표현했다.  꽤나 오래전 쓰인 이 책들은 아직까지 초, 중, 고등학교를 막론하고 어린 학생들이 읽어야 하는 책 목록에 빠지지 않는다.  책뿐만이 아니라, 영화도 존재했다.  과학이 발전된 세계에서 유전자 검사를 통해 직업이 결정된다는 설정으로 이를 풀어냈던 <가타카>라던지, <터미네이터>와 같은 명작들이 생각난다.


George Orwell, 『1984』;  Aldous Huxley『Brave New World』


종이의 시대와 텔레비전의 시대가 완전히 지나간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손에는 종이나 리모컨보다는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이 들려있다.  컨텐츠의 시대의 등극이다.  이런 컨텐츠의 시대에서는 플랫폼을 이용한 '컨텐츠'들이 앞서 말한 명작들의 역할을 이어받아 그 이야기를 전개한다.  최근 몇 년간 수많은 컨텐츠 업체가 생겼고, 그보다 더 많은 컨텐츠 업체가 사라졌다.  옥석이 골라졌고, 그 옥석들은 각각의 정체성을 찾아나가기 시작했다.  가볍고 짧은 시간 동안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컨텐츠에 집중할 것인지, 아니면 조금 길고 제작에 비용도 많이 들지만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주고 그들로 하여금 생각을 하게 만드는 컨텐츠에 집중할 것인지 말이다.


이제 앞서 말했던 조지 오웰의 저서 『1984』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맡았던 그 역할을 현대의 컨텐츠 업체들이 이어받아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서 과학철학은 빼놓을 수 없는 소재다.  최근 접했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블랙 미러>에서 미국의 넷플릭스(Netflix)라는 회사가 가지고 있는 그러한 열망을 느낄 수 있었다.  기존 명작들의 명맥을 이어나가는 그런 컨텐츠를 만들고 싶다는 열망 말이다.  컨텐츠를 보면서 이 컨텐츠가 진부한 클래식 클리셰로 보일 수 있는 장치인 '과학 철학'과 '정부 권력'이라는 틀 안에서 어떻게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메시지(“과학은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할까?”)를 정부 권력과 자본권력의 이야기와 섞어 풀어내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었다.  그들이 던지는 질문은 분명하다: "과연 과학은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할까?"


분명한 사실은, 이들이 만들고 있는 컨텐츠는 movie보다 film에 가깝다는 것이다.


<Black Mirror>, ⓒNetfl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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