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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용석 Feb 03. 2016

학원사회

우리는 왜 학원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는가?


서울시 강남구 대치동의 오후 6시의 모습은 주식시장이 마감되기 직전의 월스트리트 만큼 바쁘다. 학교에서 학원으로, 학원에서 학원으로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된다.


서울 노량진의 새벽 5시, 추리닝을 입은 20-30대 청년들은 콘서트 홀 만큼 꽉 차는 공무원 학원의 자리를 맡기 위해 새벽 밤거리를  뛰어간다.


대학생들의 방학기간, 서울 강남역 주변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품에 'TOEIC'이라 적힌 책을 들고 어디론가 바쁘게 가는 대학생들로 북적북적하다.


바야흐로 우리는 '학원사회'에 살고 있다.




어려서부터 모든 교육을 학원 즉, '사교육'에 의존해왔던 80년대 후반 세대-지금 세대는 학원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스스로 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린 것이다.


해당 세대는 인터넷의 혜택을 받은 세대이다. 또한 학원 서비스가 인터넷으로 이동하는 것을 처음 경험한 세대이다. '인터넷 강의' 세대이다. 인터넷 강의는 사회 계층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든지 깊숙이 스며들어있다.


우리 사회의 새싹들은 유치원, 초등학교 때부터 그 과정을 먼저 우수한 과정으로 밟은 '누군가'에게 가장 효율적이면서도 '결과(=시험 점수 혹은 합격이라는 결과)'만을 위한 교육을 받는다.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에 들어간 누군가, 미국에서 오래 살아 영어를 잘하는 누군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누군가, 심지어 변호사가 된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자본을 손에 쥐어주며 자신의 손에는 을 쥐고 책상 앞에 앉아 그 '누군가'를 바라본다.


이젠 취업도 학원이 없으면 할 수 없다. 옷은 어떻게 입는지, 면접관에겐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몇십만 원, 몇백만 원을 내고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대신 써달라고 맡긴다. 자소설이 완성된다.


학원은 '효율성'의 측면에서 교육에 큰 기여를 했지만, 우리 사회의 자라나는 아이들의 '자율성' '창의성'을 철저하게 말살했다.


초, 중, 고등학교 학습 지표와 그 이후의 학습 지표가 극단적인 차이를 보이는 것,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교육받은 이들 중에 노벨상을 받은 이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은 이를 입증한다.


스스로 공부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게 했고, '왜?'라는 질문을  던지기보다 자본의 대가로 주어진 '압축,  요약정리'를 한자라도 더 외우게 만들었다.


그렇게 배출된 세대가 이제 청년세대가 되었다. 학원이 없으면, 다시 말해 월등한(자신이 그렇다고 믿는) 누군가의 서비스를 소비하지 않고서는 청년은 불안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누군가가 학원을 다니면 불안하다. 자신도 잘 하고 있음에도 '쟤가 나보다 더 효율적으로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오늘도 저렴한 밥을 먹으며 깨끗하고 쾌적한 강의실로 멋을 한껏 낸 학원에 돈을 가져다 바친다.


무엇인가가 크게 잘못되었다.


이 문제의 파생효과는 더 엄청나다. 바로 불평등의 극단화이다. 


'학원사회'에서는 불평등을 아주 효율적으로 이루는 방법이 생겨난다.


학원사회는 철저히 '자본'을 통해 움직이기 때문에, 더 좋은 교사와 선생은 더 큰 자본에 따라 이끌린다. 쉽게 말해, 돈을 많이 내는 소비자에게 최고의 선생은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다. (같은 1시간 강의를 할 때 누군가는 10,000원을 내고 누군가는 1,000,000원을 낸다면 어디로 가겠는가?)


'자본'을 선점하고 있었던 이들(요즘 이야기로 하면 금수저)은 더 좋은 선생(해당 시험을 더 잘 분석하고, 해당 시험에서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으며, 시험 출제에도 기여한 경험이 있는 사람)을 마음껏 소비할 수 있다. 소위 '족집게 과외'의 부활이다.


좋은 대학에는 부자들의 자녀가 더 많이 입학하고(약자, 소수자를 위한 입학정책을 제외한다면 그 비율은 더 크다), 좋은 회사에도 부자들의 자녀가 더 많이 입사하며, 각종 공무원과 국가고시 나아가 전문대학원(의학전문대학원, 법학전문대학원...)에도 부자들의 자녀가 그 좌석을 채운다. 그리고 가족의 '부'를 더 효율적으로 유지한다. 아니, 증대시킨다.


토마스 피케티가 말한 것처럼, 자본 성장률은 경제성장률보다 훨씬 높기에 자본은 스스로 더 빠르게 증식한다. 그러나 사회의 주요 직위를 차지한 자녀들을 통해서 그 자본은 '부정'이라는 양분을 먹고 기하급수적으로 커져버린다.


그러나, 미디어 매체에서는 소위 100명 중 1명이 될까 말까 하는 '개천에서 용 난 케이스'를 대문짝만 하게 내보내고 (시민들이 싸워서 만들어낸 소수자, 약자를 위한 정책을 통해 기회를 잡은 사람들, 혹은 정말 자신의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 시민들은 "아.. 내가 열심히 살지 않아서 안된 거지... 내 잘못이야, 노력이 부족했던 거야"라고 말하며 축 처진 어깨로 터벅터벅 신자유주의의 그늘로 걸어간다.


우리는 학원사회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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