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네시모 이야기: 그리스도인은 어떤 선택을 하며 삶을 살아야 할까?
1. 세상에서 가장 쉽게 읽을 수 있는 성경 이야기
성경은 참 두꺼운 책이다. 글씨도 깨알같이 작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성경은 66권으로 엮여있는 책이다. 66권이 한 권에 들어있다. 그 66권 중 가장 짧고 가장 쉽게 읽을 수 있는 (하지만, 이해는 쉽지 않기에 이 글이 독자의 이해를 돕길 소망한다) 한 권을 꼽으라면 나는 빌레몬서를 꼽겠다. 단 1장밖에 없는 짧은 성경 1권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빌레몬서는 짧은 편지글인데 바로 그 유명한 사도 바울이 빌레몬이라는 사람에게 쓴 편지다. 어떻게 이 짧은 편지는 다른 두꺼운 책들과 함께 성경 66권 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까?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및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빌 1:1-2
2. 빌레몬과 오네시모 이야기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고,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나타났다가 승천한 지 약 60여 년 후에 저술된 이 편지의 배경은 바로 '로마 제국'이 더 강한 패권을 잡고 이스라엘 지역을 다스리던 시기다. 바울은 열심히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다니다가 에베소에서 빌레몬이라는 사람을 만난다. 빌레몬은 에베소 사람은 아니었지만, 바울의 설교를 듣고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빌레몬을 전도한 뒤 시간이 지나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오게 되는데, 그런 바울에게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나타난다. 오네시모 역시 바울의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된다. 그런데, 오네시모에게는 엄청난 과거가 있었으니 사실 그는 노예였던 것이다. 오네시모는 보통 노예가 아니라, 자신의 주인의 물건을 훔쳐 도망한 범죄를 저지른 노예였다. 당시 로마법으로 이는 즉시 사형이 가능한 범죄였기에, 빌레몬에게는 오네시모에 대해 로마제국이 부여한 즉결처형권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다 보니 바울의 눈이 점점 커진다. 이것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바울은 이야기를 듣다 보니 오네시모의 주인이 바로 자신이 과거 에베소에서 전도했던 빌레몬임을 알게 된다. 이러한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고 이제 바울을 따르겠다고 말하는 오네시모에게, 바울은 주인 빌레몬에게 돌아가라고 말한다. 당시 문화와 법을 고려하였을 때, 바울의 이러한 이야기는 죽으러 가라는 말과 다름없는 이야기였다. 죽음이 불 보듯 뻔한 오네시모에게 바울은 한 가지 말을 덧붙인다. 본인이 빌레몬에게 편지를 써주겠다는 것이다. 편지가 잘 통할지 통하지 않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오네시모는 바울의 말에 순종한다. 이때 바울이 쓴 편지가 바로 오늘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빌레몬서'다.
빌레몬서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오네시모가 자신의 복음 증거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빌레몬도, 오네시모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기 때문에 둘은 주인과 노예 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된다는 것이다. 편지에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종이었던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들일 것을 권한다.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빌레몬서 1:10
3. 기적의 편지에 쓰인 전도(upside-down: 위아래가 뒤집히다)
'법'을 알고 이 편지를 읽으면, 이 편지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로마제국의 법이 아니더라도 구약의 율법(제사장 나라 법)에 따르면, 주인은 자신의 도망친 노예를 처벌할 수 있었다. 또한, 앞서 잠시 언급했지만 로마법에 비추어 보아도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즉시 죽일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이는 당시 문명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보편화된 법이었다. 노예의 '인권'이라는 개념이 로마에 처음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인 '전주정기'에 가까워져서인바, 그보다 훨씬 전인 바울이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던 시점에선 노예에게 인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 오네시모는 단지 빌레몬의 소유물에 불과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편지를 통해 말한 것이다. "빌레몬아, 너의 재산을 훔쳐 도망간 노예 오네시모를 노예가 아니라 네게 사랑받는 형제로 대해주지 않겠니?"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빌레몬서 1:16
빌레몬서는 "기적의 편지"로 불린다. 빌레몬에게 빌레몬의 종이었다가 도망한 오네시모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종과 주인의 관계가 아니라 '형제'로 인정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바울의 이 편지는 진실로 기적의 편지다. 이것이 그만큼 말도 안 되는 제안이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이 가지고 있는 법과 정 반대의 행위를 하는 것을 제안한 것이고, 나아가 모두가 손가락질하고 빌레몬의 모든 노예들이 자유인이 되는 제안이었다. 쉽게 말해 빌레몬의 명예와 재산을 모두 실추시킬 수 있는 선택을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그 제안의 이유는 단 하나였다. 믿음을 가진 빌레몬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믿음을 가진 오네시모 또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니, 같은 아버지 아래 둘이 형제라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제 선택은 빌레몬의 마음에 달리게 되었다. 그는 어떠한 선택을 했을까? 아쉽게도 그 결말은 빌레몬서에 쓰여있지 않다. 구전에 의하면 오네시모는 초기 교회의 훌륭한 지도자가 되었다고 한다. (조병호,「통 성경 길라잡이」 352쪽) 또한, 오네시모는 빌레몬에 의해서 다시 바울에게 보내지고 이후 A.D. 68년 도미티아누스의 박해로 처형당했다는 기록 또한 존재한다. 출처. 놀랍게도 바울의 편지를 받은 빌레몬의 선택은 용서였다.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용서했다. 빌레몬을 종이 아닌 형제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음을 믿었기 때문이다. 같은 믿음을 가져 둘 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상 모두가 형제라는 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는 제국 로마가 가지고 있었던 노예 제도를 상대로 펼친 복음(福音)의 멋진 한판 승부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바울의 편지는 기적과도 같은 결과를 이끌어내며 기적의 편지가 되었다.
4. 그리스도의 길: 어떤 선택을 내리며 살 것인가?
빌레몬서를 보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다시금 시작하게 된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해 고민한다. 그리고 빌레몬의 선택은 그 좋은 예시가 된다. 내게 오직 손해뿐인 선택지를 선택하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아마 모든 주변 이웃 사람들은 오네시모의 결정을 보며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더러는 법에서 준 권리도 사용할 줄 모르는 바보라고 욕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재산의 대부분이었던 다른 노예들도 자유인이 되었을지 모른다.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빌레몬은 다른 이들이 모르는 것을 알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바로 믿음이며, 복음이다. 오네시모는 편지를 읽으며 바울이 과거 에베소에서 이야기해줬던 예수 이야기를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예수님도 바보였다. 그는 늘 남들이 보기에 바보 같은 선택을 했다. 그의 걸음은 언제나 밑으로 향했다. 위로 가는 발걸음이 아닌, 아래로 가는 발걸음. 그리고 그 발걸음이 사실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더 높은 곳을 향한 것이었음을 우린 안다.
네덜란드 출신의 카톨릭 사제 헨리 나우웬은 그의 저서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에서 바로 그 걸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스무 살 때 읽으며 마음을 울리기도 했고, 조금은 받아들이기 버겁기도 했던 그의 글이 빌레몬서를 읽고 다시금 보게 되니 이전과는 다르게 다가온다.
"영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살아있는 그리스도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최대한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애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일깨워 주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영적인 삶은 우리에게 훨씬 더 철저한 요구를 한다. 그것은 시공간 속에서, 즉 지금 여기에서 살아있는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제자란 낮아지는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좇아 그분과 함께 새로운 삶에 들어가는 사람이다. 복음은 상향성 중심의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기본 전제를 근본적으로 전복시킨다. 이것은 충돌을 야기하는 동시에 사회를 뒤흔드는 도전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우리는 벌거벗고 상처받기 쉽고 약한 모습으로 세상에 보내짐을 받는다. 그리하여 고통과 고뇌 가운데 있는 동료 인간들에게 손을 뻗을 수 있고,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으며 하나님의 영의 능력으로 그들을 능하게 할 수 있다."
헨리 나우웬,「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 IVP.
헨리 나우웬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를 "낮아지는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좇아 그분과 함께 새로운 삶에 들어가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영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단지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애쓰는 것을 넘어서서 살아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발칙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 문장을 읽으며 오네시모의 선택이 떠올랐다. 예수와 같은 선택을 한 오네시모는 예수가 그랬듯 낮은 곳으로 가는 선택을 했지만 결국 그 발걸음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는 높은 곳으로 향했을 것이다.
요한은 고백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을 '사랑'으로 정의한 것이다. 과거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황당한 부르짖음음을 듣고 당신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노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유일한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어 십자가 성소에서 마지막 속죄제의 제물이 되어 죽으셨다. 빌레몬서에서의 바울의 제안은 결코 가볍지 않다. 정말로 묵직하다. 그것은 바로 그 편지 속에 담긴 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는 가벼운 사랑이 아닌 정말 묵직한 사랑이다. 빌레몬은 그 제안에 자신의 묵직한 사랑으로 반응한다. 본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묵직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도 그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다. 나는 어떻게 묵직한 사랑을 건네줄 것인가? 멋진 빌레몬의 선택을 보며 생각이 깊어지는 밤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으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한일서 4:16
<참고>
기독교를 공인 종교로 받아들인 뒤 로마는 많은 변화를 갖는다. 기독교가 공인된 로마의 시기를 '전주정기'라고 하는데, 이 당시 로마에서는 노예제가 폐지된 것은 아니었지만 점진적인 개선을 통하여 이들의 법적·사회적 지위향상에 기여했고, 노예해방이 모든 신도의 종교적 의무임을 강조함으로써, 노예제도의 완화와 노예해방을 촉진하는 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전주정기의 기독교인 황제들은 수많은 노예보호법을 제정하였는데, 최초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가혹한 방법으로 처벌 중에 노예가 사망한 경우 주인을 살인죄로 처벌할 것을 규정하고, 징계방식이나 처벌도구를 법정하여 주인권의 남용을 억제했다. 콘스탄티누스 315년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할 목적으로 노예의 얼굴에 낙인을 찍는 행위를 금하기도 했다.
김정우, 「기독교가 서구 법의 발전에 끼친 영향에 관한 소고 - 고전 후기 시대의 로마법에서 중세 캐논법까지의 논의를 중심으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