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은 왜 아름다운 결정이었나?
I. 서론
Saint Paul (who was Saul)
사도 바울 (사울 이었던)
"바울"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것이 떠오르는가? 스데반, 가말리엘, 다메섹 도상, 사울, 로마인, 천막 등등... 많은 것들이 떠오를 것이다. 바울은 참 여러 가지로 유명한 사람이지만, "전도여행"을 빼놓고 바울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신약 성경에서 참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바울은 1차, 2차, 3차 전도여행과 이어서 예루살렘 여행까지 총 4번에 걸쳐 사역의 여정길을 떠난다. 바울의 이 여정길은 사도행전 13장에서 28장까지 자세하게 쓰여있다.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성경이 이렇게 많은 비중을 허락하겠는가?
나중에 만나게 될 내 아이에게 성경 이야기를 재미있게 잘 이야기해주고 싶다. 어렸을 때 나는 바울의 수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회심하는 이야기 정도만 알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렸던 내게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바울의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은 참으로 어렵고 지루한 것이었고, 그러한 내용이 있다는 사실조차 잘 알지 못했다. (부끄럽지만, 충분히 나이가 든 다음에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보니 내가 바울의 이야기를 잘 몰랐던 것은, 이야기를 쉽게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조금 더 쉽고, 재미있게 바울의 이야기를 내 아이가 그리고 우리 가정이 알았으면 좋겠다. 이 글은 그 준비의 일환이다. 오늘은 그 바울이 첫 번째로 바나바라는 사람과 함께 떠났던 1차 전도여행에 대해서 짧게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 글이 누군가에게는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어 바울의 이야기가 더 마음에 와 닿는 이야기가 되길 기도하는 마음을 갖고 본격적으로 글을 시작한다.
II. 바울의 1차 전도여행 (행 13-15:35)
1. 개요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은 안디옥교회(@수리아 안디옥)에서 파송(총 2번의 파송) 받은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마가 요한(마가복음의 저자)의 이야기다. 장소는 소아시아였고, 전도여행은 약 2년간 이루어진다.
2. 여행의 시작
1차 전도여행은 사도행전 13장에서 15장 35절까지 기록되어 있다. 생각보다 짧은 이 부분은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행 13:1-2)로 시작된다. 성령의 지시에 의해서 '안디옥 교회'에 있던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여행 출정을 하게 되는 장면이다. 그들은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를 타고 구브로로 향한다. 위 지도에서 보면 Cyprus라는 지역명이 있는데 우리 성경에는 이 지역이 바로 '구브로'라고 번역되어있다. (영어를 읽을 수 있다면, 성경에 대한 지식 역시 굉장히 풍부해질 수밖에 없다. 수많은 분석 자료들이 영어로 되어있는 경우가 많고, 이러한 자료들은 대다수 한국어로 번역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3. 본격적인 전도여행
1) 살라미 (Salamis)
살라미에 이르러 마가 요한과의 동역이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바예수'를 만나기도 한다. 로마 총독 '서기오 바울'을 만나 그에게 복음을 전한다. 그 복음을 전할 때에 방해하던 '박수 엘루마'는 바울의 저주를 받아 눈먼 소경이 되고, 그것을 본 총독은 예수를 영접한다. 그들은 버가를 거쳐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어려움을 느낀 마가 요한이 '버가'에 있던 중 전도여행에서 도중하차(행 13:13)한다. (*이 일은 추후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으로 이어져, 바울과 바나바가 2차 전도여행을 따로 떠나게 되는 주요한 이요가 된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른 글에서 상세히 설명하겠다.)
2) 비시디아 안디옥 (Antioch in Pisidia)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이동한 바울 일행은 안식일을 맞아 회당으로 들어간다. 회당에서 바울은 설교를 시작한다. 설교의 내용은 창세기-출애굽기에서부터 시작하여 4 복음서까지다. (행 13:16-41) 바울은 수많은 구약 성서의 말씀들을 인용하면서, 어떻게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하나님의 계획이 구약 전체에서 흐르고 있는지 그리고 그 계획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어지고 완성되었는지에 대해 말한다. 성경에서는 이 설교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유대교에 입교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좇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그다음 안식일에 온 성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회당에 모였다고 한다.
이후 유대인들이 시기가 가득하여 이들을 변박하고 비방하게 된다. 바울과 바나바 역시 복음을 전파하고, 그 지방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다. 말씀에서는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행 13:49) 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해 그 지역에서 쫓아내게 되는데, 여기서 그 유명한 말씀이 나온다.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행 13:51-52) 우리는 흔히 이 말씀을 자신이 다른 사람 때문에 기분 나쁠 때 사용하지만, 또 하나의 성경에 대한 무지가 주는 잘못된 성경 인용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기쁨과 성령에 충만하여 이 지역을 떠나 이고니온으로 향한다.
3) 이고니온 (Iconium)
이제 사도행전 14장에 들어간다. 이고니온에 도착한 두 사도는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전하고, 유대와 헬라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다. 그러나, 언제나 반대 세력이 존재한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능욕하고 돌로 치려고 달려들고, 바울과 바나바는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로 도망하여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한다.
4) 루스드라 (Lystra)
이 부분은 수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부분이다. 루스드라에 이른 바울의 앞에 한 앉은뱅이가 보인다. 바울은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말한다.
네 발로 바로 일어나라
그러자, 그 사람이 뛰어 걷게 된다. 이를 본 사람들은 바나바와 바울을 '신격화'하여 숭배한다. 바나바는 제우스, 바울은 헤르메스라고 말하며 경배한다. 이때 두 사도의 반응이 참 멋지다.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돌아오라 함이라" (행 14:14-15)라고 말하며 그들의 제사를 중단시킨다.
유대인의 끈기는 볼때마다 참 대단하다. 바울을 쫓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부터 뛰어온 유대인들은 바울을 돌로 치고, 바울을 죽였다고 생각하여 성 밖에 끌어 내친다. 성 밖에 남겨진 바울은 다시 바나바와 더베로 향한다.
5) 더베 (Derbe)에서 수리아 안디옥으로
이제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여행의 편도 여행이 끝났다. 이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더베에서 복음을 전한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으로 돌아가며 복음을 받아들였던 사람들을 응원하고 위로한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바 주께 부탁하고" (행 14:22-23) 그들은 안디옥으로 이른다.
III. 예루살렘 공의회에서의 한판 승부: 공의회의 아름다운 결정
1. 개요
사도행전 15장 1절에서 35절은 예루살렘 공의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특히, '할례'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이 할례는 창세기 17장 10-12절부터 시작된 것으로 약 2000년간 유대인들에게 계속된 하나님의 명령이자 문화이며 당연한 것이었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할례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예루살렘 공의회는 아름다운 결정을 내린다. 이 결정을 통해 기독교와 유대교가 공식적으로 구분되기 시작한다.
2. 바울&바나바 v. 유대교
바울과 바나바가 한 편이 되고, 유대에서 내려온 어떤 사람들과 큰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다. (행 15:1) 다툼과 변론의 요점은 바로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얻을 수 없는가?'라는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에 대해 말한다. 이 말을 듣고 공의회 사람들이 기뻐했음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행 15:3) 예루살렘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교회, 사도, 장로들에게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한다. 그때, 바리새인들 중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이 일어나 "이방인에게 할례주고 모세의 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말한다.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행15:5)
3. 할례 문제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2000년간 지키고 있던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율법이었으며, 자신들을 다른 이방인들과 구별해주는 가시적인 기준이었다. 아무리 예수님을 믿었지만, 자신들이 지켜오던 것을 쉽게 버리는 것은 특히 바리새인들에게 참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 와중 베드로가 일어나 입을 연다. 이 감동적인 설득과 고백은 말씀 그 자체로 봐야만 한다. 잠시 감상해보시길 바란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사도행전 15장 7절 - 25절)
베드로의 말이 참 멋지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베드로가 말한다. "우리는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고, 이건 이방인들도 동일하다" 베드로의 말에서 시작되어, 이어지는 바울과 바나바의 고백은 공의회로 하여금 마음을 돌리게 만드는 도화선이 된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하게 함께 하셨습니다." 야고보는 그들의 말에 마지막 화룡점정을 찍는다. 이들의 말이 말씀*과 일치한다고 외친다.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사도행전 42장 6절)
그리고 공의회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유다와 실라를 보낸다. 그들의 손에는 편지가 들려있다. 공의회의 편지에는 많은 말들이 쓰여있겠지만, 이는 단호하고 간결하며 강력한 한 문장의 메세지가 담겨있다. “십자가로 충분하다!”
IV. 결론: 십자가로 충분하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롬2:28-29)
바울의 1차 전도여행과 이어지는 공의회의 아름다운 결정을 보면서 너무나 기쁜 한편, 마음이 참 무거웠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저렇게 멋지게 힘든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이 참 부러웠다. 예수를 믿었지만, 유대교의 문화 아래서 살아왔던 그들에게 있어서 이미 관습이 된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내려놓는 것이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다. 그들은 진짜 믿었던 것이다. 십자가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마음이 참 무겁다. 우리는 지금 십자가로 충분한가? 유대인들의 아름다운 결정으로, 이방인인 우리에게 할례와 같은 '십자가 이외의 것'이 요구되지 않았던 것을 방금까지 우리는 보았다. 베드로가 말하지 아니하였는가?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행 15:9)"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 이외에 어떠한 다른 것을 요구하고 있지는 아니한가? 우리의 마음 한편에 '구원'의 요건으로 예수의 십자가 이외에 다른 행위나 행동 혹은 마음을 넣고 있지는 않은가?
법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내게는 율법주의자적인 모습이 상당히 많이 보인다. 실제로 내가 20대 때 항상 마음의 품었던 말씀은 '행위'가 중요하다는 예수님의 산상수훈 말씀과 더불어 신약의 말씀들이었다. '죄'의 문제는 언제나 내게 중요한 문제였고, 그 '죄'는 성경 말씀을 기준으로 구분 지어졌다. 예루살렘 공의회 사람들에게 할례는 그 어떠한 것보다 중요한 문제였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지켜야 할 '언약'이었다. 그들은 어떤 결정을 내렸는가? 예수님은 그들의 결정을 기뻐하셨을까? 그들의 결정은 '아름다운 결정'이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창 17: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