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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나무 May 02. 2020

아버지가 거짓말을 한다

아버지 만나러 가는 길

     

39년생인 아버지는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정월 대보름에 태어나셨다.

지금은 북녘땅이라 갈 수 없는 황해도 연백 군의 부잣집 외아들이셨던 할아버지의 자랑스러운 장남이셨는데 아버지도 할아버지처럼 누님이 두 분이고 셋째로 태어나셔서 고귀한 존재감을 가지고 자랐다. 

강단 있고, 점잖은 말투를 가지셨는데 난 어린 시절 한 번도 아버지를 친근하게 느꼈던 기억이 없다. 너무 어려워서 아버지에게 대답할라 치면 가슴이 콩닥콩닥 하였고 뭐라고 대답을 하여야 할까 머리가 하얗게 되곤 했다. 육 남매의 자녀들과 늦둥이 동생, 부모님을 합쳐 열 명이 넘는 대가족의 가장으로의 삶을 살아내신 아버지의 어깨가 무척 무거우셨을 거라는 생각은 내가 결혼을 하고 나이를 먹어가며 깨달았다.

 부지런함이 몸에 밴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전쟁이 끝나고 자리 잡은 동두천에서 제법 재산을 모으셨다. 재산형성에 아버지의 소년 시절부터의 고생도 기여했다고 하는 할머니의 말씀을 기억한다. 할머니는 아들인 아버지에게 하대를 하시지 않았다. 

‘애비, 조반 드시게’

‘애비, 별일 없는가?’

늘 이 정도의 말투로 아들의 위치를 잡아주셨다. 사실 난, 어려서부터 익숙한 그 말투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원래 다 그렇게 하는 줄 알았다. 

 어린 시절의 나의 기억 속 아버지는 삶의 철학이 확실한 분이셨다. 공부를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뒤떨어져 보이더라도 상관없지만 정직하지 못하고 예의 바르지 못한 것은 용서하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가장 싫어하시는 단어도 거짓말이었다.

크고 작은 잘못을 하여도 한 번도 매를 들지 않으셨다. 나 어릴 적 친구들은 대체적으로 부모님께서 매를 드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부모가 자식을 매로 교육시키는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시절이었다. 물론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엉덩이가 부풀게 매를 맞고와도 선생님을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죽하면 선생이 때리겠냐는 것이 통념이던 때였다.

그 시절 아버지는 여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키우시면서 한 번도 매를 들지 않으셨다. 물론 어머니도 매를 들지는 않으셨다. 그래서 우리 육 남매는 부모가 매를 든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친구들에게 듣기만 했다. 아무튼 아버지는 거짓말을 지나치리만치 싫어하시는 분이셨다.

그런 아버지가 올해 여든둘이 되셨다. 자식들과 친구들과 지인들과 생각이 다르면 설득하고 고집 피우고 하시면서도 거짓은 말하지 않으셨다.

그런 아버지가 거짓말을 하신다.

아버지의 치매가 시작된 것은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모른다.

사는 게 바쁘다는 이유로 일 년에 서너 번, 아니면 대여섯 번 아버지를 만나온 나로서는 아버지의 다른 모습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수시로 통화하는 엄마의 이야기들을 퍼즐 맞추듯이 정리해 보면 아버지의 치매가 어느 정도 진행이 되었다고 생각할 다름이었다.

어느 날, 파출소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알리며 걸려온 전화를 받고 나서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아버지의 치매가 상당히 진행되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렇게 마주한 아버지는 너무나 멀쩡하셨다.

잠시 깜박했노라고, 아는 길도 헷갈린다고 하실 때는 아니구나 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건망증은 잠깐의 기억 실종이 아니고 누구도 두려움을 피할 수 없는 치매라는 질병의 진행을 알렸다.

‘치매는 국가가 책임진다’는 대통령의 말을 믿고 방치하면 위험하고, 보살피기에는 엄마 역시 노인이라 버겁고, 자식들은 살기 바쁘다는 정당성을 부여하며, 요양원으로 아버지를 모실 수밖에 없었다.

고집 세고, 주장이 강한 아버지가 요양원을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동생들은 아버지가 길바닥에서 돌아가셔도 요양원은 안 가실 양반이라고, 아버지를 요양원에 모시는 것이 불가하다고 했다.

나와 남편은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며, 아버지를 설득했다. 물론 최종적으로 아버지를 설득한 것 셋째 동생이다. 아버지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그 아이의 설득을 받아들인 아버지가 요양원을 가셨다. 요양원에 가시는 아버지를 눈에 담을 수 없는 나는 철저히 방관자가 되었다. 아버지를 모셔다 드린 동생의 전화에는 잘 되었노라, 아버지를 위해서도 최선이라고 우리끼리 위안이 되는 말을 했다.

그날 밤, 나는 알 수 없는 서러움에 한참을 울었다. 그냥 눈물이 났다. 울면서 생각해 보았다. 아버지에게 따뜻한 감정을 가지고 자라지도 않았고 애틋한 딸 노릇을 해보지도 않았다.

그냥 무덤덤한 부녀관계였다. 거의 전 재산을 큰아들에게 주고 사실 딸들에게는 어려울 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시지도 않았다. 그래서인지 원망까지는 아니어도, 딸들에게 뭐든 해주고 싶어서 안달하는 엄마와 같은 애틋함은 없다. 그저 부모니까 아버지니까 하는 유대감만 있었던 같다. 그런 아버지가 요양원에 가셨다고 눈물 나는 내가 새삼스러웠다.

외국에 나가면 다 애국자 된다던가? 요양원이라는 낯선 곳에 가둠을 당하는 아버지를 생각하니 새삼 자식이라는 각성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요양원으로 가신지 9개월이 다 가도록 나는 아버지를 보러 가지 않았다.

물론 그사이 내게 일이 많이 생긴 탓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핑계일 뿐이고, 서둘러 요양원에 모시자고 주장한 것이 못내 죄책감 비슷한 감정으로 들어앉아있던 탓이다.

딸아이가 그래도 할아버지한테 가봐야지 하면서 두어 번을 다녀왔다. 잠깐이지만 바깥바람도 쐬어 드리고 맛난 소갈비도 사드리고, 나보다 낫네 하는 칭찬만 할 뿐 선뜻 아버지를 보러 가는 길이 어렵기만 했다. 

 엄마는 가깝게 있는 아버지가 마음에 걸렸는지 가끔 보러 가는 듯했다.

평소 하루가 멀다 하고 다투는 팔십 대의 부부는 떨어져 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가끔 궁금하기도 했다. 머리가 하얀 노부부가 다정히 손잡고 산책을 하는 장면은 영화에서나 보는 걸까? 내 주변의 노부부들은 하나같이 늘 싸우고 자식들에게 서로 이르고 평탄치 않은듯하다.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 보아도 부모님이 싸우고 전화하는 통에 속상하다는 이야기를 꽤 들었다. 그들이 육십 대 칠십 대 초반까지는 그래도 빈도가 적었다. 칠십 대 후반이 되고 팔십 대에 들어서니 그 횟수는 말할 수 없이 늘어갔다. 도대체 왜 그럴까? 왜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식들 생각 안 하고 싸우고 편들어 달라 힘들게 할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남성보다 민첩하고, 오랜 세월 동안의 부당함에 인내가 한계치를 넘어 더 이상 참고 싶지 않은 여성들의 단호함 때문인 것 같다.

여성들은 아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딸들의 이야기에 공감하며, 손자 손녀들이 함께하는 사소한 것들에 동참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는 것 같다. 이것은 그녀들에게 아주 큰 자산이 되어서 가족모임이나, 단체생활을 용이하게 할 수 있도록 작용하여, 타인과의 접촉을 원활하게 한 반면, 남성들은 오래도록 몸에 밴 권위의식에 쌓인 채 자녀들의 이야기에 자격지심을 느끼고 손자 손녀들의 사상을 어린아이들의 철부지 노름으로 여겨 공감하지 못한 채 과거에서 나아갈 생각을 못하는 족속인 듯 세상을 바라보는 듯싶다. 이러한 남성과 여성의 간극이 더 이상 한 곳에 머물 명분을 허물어 버린 것 같다.

 엄마와 아버지의 대화를 들을 때면, 더 명확해지곤 한다.

엄마의 입에서는 ‘요즘 세상에 말이야....’

아버지의 입에서는‘애들이 그런다고 똑같이 말이야...’

따로따로 두 분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분위기 따라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지만, 너무나도 당연하게 엄마의 말이 90퍼센트 맞는 말이고 아버지의 말은 공감하기가 애매하다.

그 상태가 지속되다 엄마의 폭탄선언으로 나온 말을 들었을 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 이혼하련다. 내가 앞으로 3년을 살지 10년을 살지 모르는데, 나도 내 맘대로 해보고 죽어야지. 죽을 때까지 남편 뜻대로 산다고 생각하니 억울해’

처음엔 화가 나서 그러는 줄, 이번 싸움이 좀 강도가 센 줄 알았다.

자식들 모두 엄마의 인내의 한계를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저러다 말겠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엄마의 가출소식이 날아왔다. 1주일이 넘도록 전화도 받지 않던 엄마와 통화가 되었을 때,  자식이 아니고, 같은 여성의 입장에서 엄마의 울분을 느꼈을 때,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내 자리를 지키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전의 여성들이라면 모두 참고 사는 게 도리라고 하며 살아냈을 일들이, 이미 우리가 사는 세상과 가까워진 엄마의 정신세계로 견뎌내라고, 자식을 위해 그렇게 생을 마감하라고 말한다는 것이 잔인하게 느껴졌다. 엄마가 80 이후의 삶까지 자식과 남편을 위해 억누르는 삶을 선택한다는 것이 안쓰럽게 생각되었다. 물론 아버지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듣자면, 더욱 답답하기 그지없다. 아버지의 이야기인즉슨, 오십 년 넘게 아무 말 없이 살다가 이제 와서 이렇다 저렇다 하니 내가 맞출 수가 없노라 하신다. 답답한 마음에, 그냥 아무 말 없이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하고, 하지 말라는 것 안 하면 되는데 그걸 못하냐는 말에 돌아온 답은, 죽은 사람이냐는 거다. 어찌 아무 생각 없이 살라는 거냐고 하신다. 노력해 본다던지 엄마랑 잘 이야기해 본다던지 하는 타협의 물꼬가 될 만한 이야기가 없다.

그때인 거 같다. 엄마의 용기 있는 가출과 더불어 아버지의 치매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때가.

 아버지의 치매가 진행되는 동안 엄마의 마음이 누그러질 거라고 생각한 건 자식들이 엄마의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했다. 치매가 진행이 느껴질수록 엄마는 더 견디지 못했다. 그래도 살아온 세월이 있는데 하는 것은 잘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었다. 엄마는 더 많이 억울해했고, 더 이상 치매 노인이 된 아버지를 참기 싫어했다.

팔십이 넘도록 참고만 살았는데, 아내라고 소중하게 대해 본적 없는 아버지를 상대로 마지막까지 희생한다는 것이 억울하다는 것이다.

어찌 되었던 아버지의 요양원행은 엄마의 강력한 저항의 산물이기는 하다.

요양원행을 가장 먼저 입에 올린 나와 남편은 오랫동안 아버지에게는 어떤 가해자 일지 모른다. 아버지가 요양원을 갈 거라고 감히 생각 못했던 동생들은 오히려 의외라는 반응이었으니까.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요양원 생활을 잘 적응하시는 것이 신기할 다름이다.

요양원에서는 점잖은 어르신이 들어오셨다고, 인기가 많다고 전해 들었다.

딸아이가 할아버지를 보러 갔을 때, 요양원 원장 말이, 자식 같은 요양 보호사들에게 하대를 하지 않으시고 경우 바르고 규칙이라고 이야기하면 잘 지키시는 어르신이라고, 보기 드물게 점잖으신 어르신이란 말을 듣고 왔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엄마가 늘 하던 말이 생각났다. 남한테는 세상에 좋은 사람 소리 듣고 사는지 몰라도 나한테는 좋은 남편이 아니라는 여운 있는 말, 아버지는 그런 분이셨다.

예전의 아버지들은 그것이 덕이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남한테 해가는 일은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가족에게 보다 남에게 너그러운 삶이 옳다고 믿었을 거다. 식구들은 다 알 거라고 하셨던 아버지의 말이 생각났다. 말하지 않고 표현하지 않고 양보하지 않으면서 당신이 가족을 사랑하는 걸 다 알거라 여긴 것이 모순임을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가 가족들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요양원에 계신다. 다 알 거라는 가족들은 제 살기 바쁘고, 희생하고 싶지 않아 아버지와 함께하지 못한다.

아버지를 만나러 간다. 마음을 다시 먹었다. 내 마음이 불편해도, 무거워도 얼굴을 보고 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작정 피하기만 하다가 아버지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아주 많이 힘들 것 같았다. 지금 약간의 두려움 섞인 불편함이 더 가벼우리라.

요양원이 위치한 곳은 아버지 집에서 차로 10분 정도 더 걸릴까? 가까웠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대여섯 발작 정도 거리에 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

점점 가까워지면서 아버지가 나를 알아보고 반가워한다.

‘어쩐 일이냐? 이 새벽에...? 응, 뭔 일이야?’

나는 눈물이 났다. 아무 말 없이 그냥 울었다. 왜 우냐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저 눈물이 자꾸 났다. 지금이 오후 4시 조금 지났는데 무슨 새벽이냐고 되묻는 남편에게 잠깐 잠들어서 착각했다고 한다.

물론 아버지는 주무시지 않았다.

딸아이 올 때 같이 못 와서 죄송했노라, 진작 오지 못해서 서운하셨냐 하는데 딸아이가 왔다 간 적이 없다고 한다.

깜박하셨나 보다 하고 사진을 찾아 보여드리니, ‘아, 맞다 왔다 갔어’

그런데, 그런데.... 알 수 있었다.

아버진 기억이 나질 않는다는 것을....

거짓말을 하고 계신다.

딸아이가 다녀간 것을 기억 못 한다 하면 서운해할까 봐 거짓말을 하는 거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의 거짓말을 참말로 알아듣는 대화를 이어갔다.

평생 거짓말하면 세상에 제일 나쁜 행동으로 알고 자식들에게도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는 가르침을 강조했던 아버지가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렸다.

아버지의 거짓말이 참말이 아니어도 좋다.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동안 가족을 향한 그리움으로 힘들어하시지 말고 아버지가 하시는 거짓말처럼 더할 나위 없이 잘 계셨으면 좋겠다.

이제 그만 가야겠다는 내게,

 ‘난, 여기가 참 좋다. 아주 더할 나위 없이 좋아. 때 되면 밥 주고, 나 혼자 씻기도 힘든데 정성 들여 목욕도 알아서 해주고, 참 좋다. 여기서 죽을 때까지 살면 좋을 것 같아’

그러신다. 생전 못하던 거짓말을 아주 잘하는 아버지를 뒤로 하고 오는 길이 참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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