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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나무 May 02. 2020

이 씨 할머니

     

 그녀는 한일합방이라는 우린 민족의 아픈 과거를 장식한 1910년에 태어났다.

키는 150cm도 채 되지 않은 작은 체구를 가지고 81세의 나이까지 자신의 고단한 인생을 견뎌낸 가엾은 여인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녀로 태어나 26년을 한집에서 살았다.

초등학교 어느 날 보물처럼 고쟁이 속에 고이 쌓여 있는 그녀의 주민등록증을 보고 신기하고 또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녀의 주민등록상 이름은 ‘李 氏’였다.

“할머니, 할머니 이름이 왜 이래?” 그랬더니 그냥 웃었다. 

“할머니 이름이 뭐야?” 

“...”

“할머니 어렸을 때 이름이 뭐냐고?”

“아~~ 간난이라고 불렀지”

“그런데 왜 주민등록엔 이름이 없어?”

“...”     

그녀는 문맹이었다.

글자를 몰라도 살아가는데 별 이상이 없다는 것을 그때 내가 알았을까?

글자를 몰라 살아가는데 몹시 불편하다고 나 스스로 느꼈을까?

아쉽게도 그 사안에 대해서는 기억이 없다.

단지, 할머니가 글을 모르고, 자신의 주민등록증에 붙어있는 사진으로 본인의 신분증임을 알지 이름이 무엇이라 적혀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해방과 더불어 도민증이라는 것이 생겼을 때부터 ‘李 氏’라고 했는지 1962년 주민등록법이 제정되고 1968년 오늘날과 같은 주민등록증이 발급되었을 때부터‘李 氏’라고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녀의 공식적인 성명은 ‘李 氏’다.

간난이라고 불렸다는 이야기만 기억하지 나 자신도 할머니의 이름이 무엇인지 중요하거나 궁금하지 않은 채로 어른이 되었다.

그녀의 모습이 가물가물 하고, 수 십 년 전에 본 기억만 있을 뿐인데, 때때로 안타깝고, 가녀린 여인의 일생이 내 안에서 이따금씩 후벼 파는 가시 같은 기억을 가져다준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나는 그녀가 큰 소리를 낼 줄 모르는 사람으로 알고 살았다.

단 한 번도 자식이나 며느리나 손자 손녀들에게 큰 소리를 치는 걸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 나이 열셋인지 열 넷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녀의 큰소리를 듣고 놀란 일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평생을 하늘처럼 떠받들어  눈을 치켜떠 본 적도 없는 할아버지를 향한 비명이었다. 그녀에게 그렇게 큰 소리를 낼 줄 아는 기능이 있다는 것은 내게 충격이었다.

그 충격은 아주 오랫동안 내 안에 살아 있으면서, 그녀를 향한 나의 연민을 잊지 않게 해 준 근간이 되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30년, 내게 그녀에 대한 빚이 있다는 사실이 늘 숙제처럼 남아 있음에, 그녀를 기억하는 내 어린 시절의 잔상을 적어 보고자 한다.

그녀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6.25 때 경기도 안성까지 피난을 내려가 있는 동안 행세께나 해 봄직한 할아버지의 행색을 높이 산 그곳 토박이 부잣집에 큰딸을 버리다시피 시집을 보내고, 늦둥이 막내아들은 작은딸의 등에 손에 매달리게 하고, 내 아버지인 큰아들과 가족들이 살아갈 짐을 나누어지고 전쟁이라는 시간을 지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물론 가장인 할아버지의 진두지휘가 있었지만, 평생을 남편의 종처럼 살아온 그녀는 자신의 주장이나 판단 같은 것은 염두에 두지 못하고 남편의 지시에 따라 딸 하나를 피난지에 떨구고 고향인 연천을 향해 돌아와야만 했다.

내가 제법 컷을 때, 그녀는 난리통에 떨구고 온 딸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첫 아이를 그렇게 두고 고향으로 발걸음을 떼었을 그녀가 얼마나 아팠을까 하는 생각은 내가 아이를 낳고 나서야 공감이 갔다. 어떻게든 함께 돌아가고 싶었지만 남편의 결정에 어떠한 대꾸도 못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했다. 그래서인지 늘 큰 고모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각별했다.

계절에 한 번씩, 할아버지 생신 때에, 명절 때에 그녀가 집에 다녀갈 때는 보따리 보따리 싸서 보내는 그녀를 보며, 다른 연유를 생각지 못한 엄마의 불만에 찬 구시렁대던 입모양이 생각난다.

천성이 선하고 얌전하기만 한 그녀는 며느리에게도 굳이 설명을 하진 않았다. 그저 그렇게 바리바리 싸주는 것이 당신의 할 도리 인양 해 보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보따리들을 가져가던 큰 고모는 당연하게 가져갔던 것 같다. 마치 맡겨 놓은 짐처럼. 더 어려운 살림살이를 살면서도 친정에 손끝만큼도 기대지 않는 작은 고모와 비교가 되었던 것 같다. 엄마는 가까이 사는 작은 고모를 더 친근하게 대했고, 엄마의 기운을 받은 우리 형제들도 큰 고모보다는 작은 고모를 더욱 좋아했다.

살림살이는 작은 고모가 훨씬 어려웠는데도 할머니는 늘 큰 고모만 챙겼다.

또한, 큰고모의 자녀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졌던 것 같다.

내 기억 속의 그녀의 자식들에 대한 태도는,

첫째, 큰 고모에게는 무조건 주기만 했다. 돈이든 살림살이든, 며느리가 새로 사 온 옷가지도 좋은 것은 잘 두었다가 큰딸의 몫으로 챙겼다.

 둘째, 큰아들인 아버지에게는 함부로 하지 않았다.  아들이라고 해서 말을 함부로 하거나 무엇을 요구하거나 하는 것을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대를 하지 않았다. 항상 이랬는가? 저랬는가?

드시게... 이런 식이었다. 나는 그래서 다른 집도 할머니들이 아들에게 그러는 줄 알고 컸다.

 셋째, 작은 고모에게는 그다지 베푸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베풀기는커녕 당신이 필요하거나, 특별히 애로사항이 있는 일은 모조리 그녀에게 시켰다. 심지어 1시간 거리에 사는 그녀의 집에 수시로 다니며 의지하다시피 하면서도 어려운 살림을 별로 안쓰러워하지 않았다.

 넷째, 막내아들인 삼촌에게는 무한한 내리사랑의 표본을 보여주었다. 늘 꿍쳐놓았던 돈을 몰래몰래 주머니에 넣어주기도 하고, 말하지 않아도 뭐든 주고 싶어 그저 안절부절못했다. 심지어 막내며느리를 볼 때면, 아무 말 대신 그냥 웃기만 했다. 며느리 뒤꽁무니만 보고도 좋아했다.

그녀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작고 조그마한 착한 여인이었다.

그녀에게는 세 개의 우주가 있었다.

정이 많지만 표현에 인색했고,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는데 어색한 사람이었다고 하는 편이 맞을 듯했는데,  그녀가 가지고 있는 품성이나 인성과는 별개로 세 개의 우주를 늘 섬겼다.

 첫 번째, 우주는 그녀와 다섯 살 차이 나는 남편이다.

그는 시절과 맞지 않는 큼직한 골격을 갖추었으며, 눈썹은 요즘 신세대 스타들 못지않게 짙으면서도 멋스러운 광채를 뽐내는 대장부였다. 누나만 다섯 있는 집의 막내이자 대를 이을 유일한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 대단한 아들이 불면 날아갈까 잡으면 부서질까 엄청 떠받들어 키우셨는데 물론 위의 누나 다섯은 그를 위한 들러리로 인정될 뿐이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침을 놓는 한의사를 오빠로 둔 가난한 집안의 늦둥이인 할머니는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조카와 비슷한 또래의 나이로 핏덩이 때부터 올케의 젓을 나눠먹고 컸으니,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가뜩이나 없는 살림살이에 자신의 자식들과 함께 누이동생을 키워야 하는 할머니의 오빠도 자신의 가족들의 눈치가 있었을 거라 짐작된다.

돌아가신 부모님 인품이 선하고 오빠의 인품도 좋다고 평이 나있어서인지, 부잣집에 민며느리로 보내자는 집안 어른들의 권유가 받아들여져 할아버지 댁으로 떠나온 것은, 그녀가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에 너무나 어린 아홉 살의 소녀시절의 이야기다. 물론 소녀의 생각을 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건사하기 힘든 식구 입하나 덜어보자는 친척들의 결정일뿐이다.

그녀의 고단한 삶은 그때부터였다. 아니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부터이기는 하지만 고단한 삶의 무대가 옮겨진 중요한 시기다.

처음엔 민며느리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어른들이 가서 살라하니, 이 어린 소녀는 영문도 모른 채 종살이를 시작했다. 다섯 명의 누나들이 하나둘씩 혼례를 치를 때마다 끊임없는 자잘한 일들이 소녀의 차지였다. 9살이라는 아주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에 힘든 일까지도 시어머니 되실 분은 호된 꾸지람과 함께 시켰다고 한다. 나중에 이 큰 살림을 떠맡으려면 일머리나 사람 다루는 거나 주인이 뭐든 해내야 한다는 가르침과 같이 말이다. 천성이 착한 소녀는 단 한 번도 꾀를 부리거나 말대꾸를 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소녀의 나이가 16이 되어 혼례식을 올리게 되었다. 6년이 훨씬 지나 혼례를 올리게 되었지만 시어머니는 이 착한 소녀가 정식 며느리가 되자 더 호된 시집살이로 다잡았다.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야 하는데 체구가 작다는 이유로....

성장기의 아홉 살 아이를 데려다 제대로 클 수 있게 하지도 않았으면서 작은 체구를 트집 잡았다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정식으로 혼례를 올리고 스물이 훨씬 넘도록 아기가 생기지 않자 시집살이는 극에 달했다 하니, 얼마나 고되었을까 싶다.

그녀 나이 스물넷 되어서 첫째 딸을 낳고, 두해 지나 둘째도 딸을 낳았을 때 그녀의 고된 인생의 무게는 상상 이상이었으리라... 그리고 마침내 낳은 큰아들이 내 아버지다. 그녀 나이 서른이 되어서다. 그렇게 아버지는 그녀의 또 하나의 우주가 되었다. 

얼마나 귀하고 귀했을까? 얼마나 아까웠을까? 내가 어렸을 때는 아버지에게 집착하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너무한다 싶기만 했다. 아버지가 수저를 들면 입으로 들어가는 수저에서 눈을 떼지 않고 쳐다보곤 했다. 가장이 되어 자식을 낳았어도 아버지는 그녀의 우주였기에 늘 바라보았던 모양이다. 물론 외사랑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할머니를 특별하게 대하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늘 무심하게 인사 묻는 말만 겨우 대답...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녀의 또 하나의 우주는 그리도 끔찍한 큰아들의 아들, 내 오빠였다.

오빠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아버지를 바라볼 때의 그것과는 또 달랐다. 세상 가장 귀한 보물을 보는듯함, 어디 하나라도 티끌이라도 닿을까 전전긍긍...

세 살 차이의 동생인 내게 늘 함부로 하던 오빠를 무조건 감싸던 그녀가 몹시 미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내가 자존감을 가지지 못하게 한 가장 큰 원인이기도 했다. 예닐곱 살 즈음에 있었던 일이 지금도 생각난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귀하디 귀한 수삼을 꿀에 재어서는 손자가 들어올 저녁이면 숟가락에 하나 얹어 먹어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러면 그 귀한 손자는 뾰루뚱한 표정으로 먹기 싫다고, 진짜 먹기 싫다고 짜증을 낸다. 그러며 그녀는 고쟁이 속주머니를 들춰 10원짜리 하나를 꺼내 들고는 한 번만 먹으면 이걸 준다고 또 사정을 한다. 그러면 마지못해 그녀를 봐주기라도 하듯이 ‘알겠어... 딱 한 번만 먹을 거야’ 라면서 동전을 낚아채고는 받아먹는 것이다. 난 정말 궁금했다. 저렇게 사정사정해서 먹이는 물건의 정체가 궁금했고, 그걸 꼭 오빠에게만 주는 이유 또한 궁금했다. 그런 나의 궁금증의 시작이 문제였다.

집에 아무도 없는 날, 열명이 넘는 식구가 하나도 없는 기적 같은 날, 나는 딱 하나만 먹어볼 심산이었다. 그 병 속의 하얗게 저며진 뿌리를 정말로 한 번만, 하나만, 먹어볼 요량이었다. 불행하게도 나의 작은 손은 그것을 꺼내다가 떨어뜨려 깨뜨리고 말았다. 겁이 난 조그만 아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큰 소리로 울어대는 것 밖에 없었다. 울음소리에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그녀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가 내리치는 손바닥으로 매를 맞았다.

나는 서러워서 울었고, 아파서도 울었으며, 그것을 먹어보지도 못하고 깨뜨려버린 상황이 억울해서 울었다. 내손을 낚아채면서 다친 데는 없냐고 물어보는 엄마의 얼굴을 보자 더 큰 울음이 솟구쳤다. 그때 나는 그녀의 우주에게 돌아갈 귀중한 물건에 흠을 내어버린 내 잘못을 알지 못했다.

단 한 번도 큰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그녀의 화난 표정과 더불어 내려쳐진 손바닥을 쳐다보며 서럽기만 했다.

그날 크게 놀란 사람 두 명을 꼽으라면, 매라는 것을 맞아보지 않은 나와, 소리 내서 야단치거나 매를 들어보지 못한 그녀였다. 아무 말 없이 돌아서 눈을 훔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후회라는 것을 하고 있음을 알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의 울음소리가 더 커졌는지...

천성이 착하고 다른 이에게 성을 낼 줄 모르는 그녀가 작고 어린 손녀에게 행한 그 만행을 괴로워했으리라. 그 이후 나는 그녀가 내게 주는 것 이외의 것에 욕심을 내지 않았다. 그 이유가 또다시 혼날 거라는 두려움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가 섬기는 세 우주는 그녀에게 받기만 하는 존재들이다. 솔직히 요즘 식으로 말하면 받을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녀의 희생이나 그녀의 사랑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세 남자는 자신들이 받고 산 그 모든 배려를 깨닫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다. 이미 첫 번째 우주는 모르는 채 저세상으로 갔고, 두 번째 우주는 늙고 병든 모습으로 요양원에 안주하였으며, 세 번째 우주는 그녀를 생각조차 안 하는 안하무인인 채로 자신의 삶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고 있다.

그녀의 세 번째 우주가 이것저것 해보다가 재산을 다 탕진하고 무일푼이 되어서 하는 말이 더 가관이다. 고모님 댁에 와서는 ‘ 계집애들이 내가 이리 힘들어도 들여다보지도 않아요’ 그러더란다.

하늘로 머리 둔 사람이라면 혀를 찰 말이다.

부모가 해준 사업자금도 모자라 부모 집을 담보로 사업이네 뭐네 하며 다 탕진하도록 여동생들은 부모 재산을 단돈 십만 원도 만져 보지도 못했다. 최소한 한 형제라면, 혼자서 다 말아먹은 부모 재산을 기억하며 죄인으로 살아도 시원치 않은 존재가 자신을 여동생들이 돌보기라도 해야 한다는 발언을 한 것이다. 그 말을 들은 고모는 하도 어이가 없어, 다시 내 집에 오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나는 그의 머릿속이 궁금하지도 않다. 그는 세상에 태어남과 동시에 세상의 모든 사람이 자기에게 양보하고 헌신하고 갖다 바치는 섬김을 받으며 자라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았다. 자신의 뻔뻔한 이기심 때문에 동생들이 많은 기회를 갖지 못했으며 부당한 대우에도 당당할 자존감을 갖지 못했음을 알 리가 없는 인사인 것이다.

 그녀가 섬긴 세 개의 우주는 솔직히 그녀에게는 아주 못된 똥이다.

사랑을 주어도, 하늘처럼 섬겨도, 세상 무엇을 다 주어도 대답이 없는 메아리였다.

물론 나중에 돌아가실 즈음 그녀를 생각하며 눈물울 보이던 아버지의 모습은 생각이 난다. 그녀 무덤의 때를 정성스럽게 가꾸던 아버지의 모습은 영락없는 효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녀가 살아있는 동안, 그 세 개의 우주는 그녀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언제 아픈지, 언제 기쁜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먹고 싶은지, 어딜 가고 싶은지, 한 번도 물어보는 것을 본적도 들어본 적도 없다.

  나 역시 아버지에게 왜 이름도 없이 ‘李 氏’라고 써야 했는지 그녀의 주민등록증의 존재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다. 

문맹이면 이름자를 쓰거나 볼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걸까?

지금 우리의 부모님들은, 우리 시대의 어머니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세상을 살아갈까?

물리적으로는 당연히 김 아무개 이 아무개 이름이 있지만, 실체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건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일까?

누구의 아내나, 누구의 엄마인 인생 말고 내 이름이 의미를 가질 내 인생을 살고 있는지 성찰해 보고 싶다. 

 나의 이 성찰은 글자를 몰라 자신의 이름을 읽어보지도 못했고 써보지도 못했으며, 자존감을 형성할 아무런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아주 어렸을 때부터 타인의 인생에 더불어 희생만을 강요당한 내 할머니 ‘李 氏’ 할머니에 대한 애증을 가진 깨달음이다.

아무 소용없는 일일지라도 불러보고 싶다 ‘ 이 간난’........ 간난이라고 불렀으니 그것이 이름이에요 ‘간난이‘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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