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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나무 May 09. 2020

꽃비 맞는 여인

노인의 일상 엿보기

     

코로나 19라는 생애 듣두 보두 못한 끔찍한 이벤트는 참으로 다양한 일상을 뒤집어 놓았다.

굳게 닫힌 노인정의 문 앞을 지나다 보면, 집안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어르신들이 생각나는 것이 당연지사지만, 시어머니와 한 공간을 지나온 나 같은, 사람의 머릿속에는 두문불출하는 시어머니와 24시간 가까이 같은 공간을 견뎌내야 하는 며느리들의 시커먼 가슴속 이 그려진다.

머리로 다 잡는 자식의 도리라는 것은 ‘시’ 자라면 시금치도 먹지 않고, 시청 역에도 내리지 않는다는 속설 속에서는 아무런 힘이 없다.

  참으로 어이없는 것은 시간이라는 귀신같은 단어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년이 지나 보니

한 공간을 지내고 있는 며느리들을 지극히 객관적으로 보는 눈이 자라났다. 내가 그 시간에 머물렀을 때는 세상 누가 내게 이성을 보라고 내밀어도 객관성을 붙들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얄팍한 나의 양심은 ‘그래도 노인이니 조금만 참고 넘어가지’라는 울림을 던진다.

나 스스로도 어이없고 우스운 일이다. 세상 누구 못지않게 시어머니의 부당함과, 나의 억울함과, 가족관계의 불합리한 구조가 견디기 힘들어 침 튀기게 열을 내던 나다. 그런 나는 이제는 없다.

온통 짜증스러운 친구의 시어머니에 대한 고통스러운 수다를 지나치도록 객관적으로 들을 수 있다.

그러다 문득 ‘그 시절이 다시 온다면...’이라는 가정을 해 보았다. 그리고 아팠다.

나의 일상이 지배되는 현실을 변화시켜보고자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던 수동적인 내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어차피 노인들은 영원히 변치 않을 거라고 나 스스로 인정해버렸다. 

하지만 그건 사람 나름 일수도 있다. 83세의 친정엄마는 계속해서 젊은이들과의 대화와 공감을 통해 변화를 가져왔는데, 그건 아주 특이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시어머니에게는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다.

버릇없는 며느리, 싹수없는 며느리, 이기적인 며느리라고 치부될지도 모른다는 선입견 때문이었을 수도, 시어머니를 책임져야 하는 현실이 그냥 싫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 말이 가장 정확한 것 같다. 그냥 시어머니라서...

내가 오늘 출근길에 만난 여인은 아름다운 꽃비 여인이다.

그녀는 화려하게 폈던 겹벚꽃 아래서 지팡이를 짚은 채 떨어지는 꽃잎을 맞고 서있었다.

그 여인의 머리는 희고 짧은 커트였는데 겨울 니트조끼를 입고 주름이 깊게 파인 90 정도의 여인이었다.

지팡이를 잡지 않은 한 손으로 마스크를 벗으며 환하게 웃는 얼굴로 꽃비 내리는 나무의 꼭대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한 번도 90대의 여인이 아름답다거나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여인은 참으로 해맑은 얼굴로 꽃비를 맞음으로써 내게 새로운 감정을 가져다주었다.

‘아~ 나이가 들어도 아름다움에 대한 감상은  잊지 않는구나’

100세 시대라고 하면 나는 아직 60%의 생을 살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오래되지 않아 노인의 대열에 들어갈 예비 노령 수급자이다.

꽃비를 맞으며 환하게 웃는 모습이 아름다운 노인을 위하여, 그 아름다운 여인이 되기 위하여 무엇을 어찌 생각하고 노력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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