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 봉오리가 오후의 따뜻한 햇볕에 의지해 조금이라도 얼굴을 들라치면 날카로운 바람으로 그 기세를 꺾어버리던 바람이 변했다. 이제는 아무리 세게 부는 바람이라도 그 한기와 그 살기가 예전 같지 않다. 언제 이만치 온 것인지 인기척도 없이 다가와 만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아직 먼, 손에 잡히지 않는 계절이다.
특히 대학병원 병실의 LED 등 불빛은 봄의 노릇노릇 한 햇살을 희디흰 가운이 되어 덮어버리고 사람의 발길에 차여 날아온 공기는 알듯 말듯 숨 쉬는 향기 대신 묵직한 약품 냄새만 가득하다.
병원에서의 경험은 병원 밖의 경험과는 아주 달라서 익숙해질 법도 한 이질감이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암 절제 수술을 마치고 회복실에 누워있는 환자가 집도의에게 던지는 매우 고전적인 질문에, '네.'라는 무미건조한 말 대신, '수술이 잘 됐는지는 왜 궁금하냐, 잘 됐으면 어쩔 거고 못됐으면 뭐가 달라지냐, 회복이나 집중하라'하고 시원한 호통으로 환자의 기능적 한계와 지향점을 명확히 구분 지어 주고,
바쁜 응급실 상황 속 링거 주삿바늘만 꽂은 채로 기다리다 막혀버린 혈관에 식염수를 넣어 뚫을 때, 섬광 같은 고통에 흘러나와버린 외마디 비명.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발걸음을 돌리는 대신, '제가 아프다고 했잖아요'라며 자신이 행한 의료 서비스의 내용과 위험성을 정확히 고지했음을 적시해 주고,
의료진들의 피로를 가중시키는 코로나로 인해 모든 병원이 초비상인 이 시국에 '잠깐 들어가서 환자 얼굴만 보고 빨리 나오면 안 되겠냐'라는 깃털만큼의 의미도 없지만 마음만은 천근처럼 무거운 물음에 '규정상 보호자는 한 분 밖에 안됩니다.'라는 투철한 직업의식이 깔린 단호한 제지 대신, 서슬 퍼런 눈으로 보호자를 흘기며 초감각적인 신호로 보호자의 한마디를 무색하게 만들어 버린다.
인터넷에는 많은 의료 괴담들이 떠도는데 상당수가 '대학 병원 의료진은 왜 불친절한가?'에 대한 내용이다. 이런 화두에서 의료진들은 현장 일선에서 촌각을 다투며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을 하다 보니 간혹 마음과 다른 행동이 전해지는 경우가 있다고 전한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 질문 자체가 '불친절'이라는 관용적인 표현으로 본질을 가리고 있는 경우가 있다. 더 많은 경우는 '의료진들은 왜 손님에게 불쾌함을 주나?'에 대한 내용이다.
한반도에서 신분제가 폐지된지는 130년이 다 되어가지만 여전히 사회는 자의든 타의든 공공연히 '갑'과 '을'을 구분 지으며 상대적 우위와 상대적 열위를 논한다.
수술대에 정신을 잃은 채로 맨몸으로 누워있는 환자가 갑이고, 메스를 들고 있는 의사가 을인가?
링거 바는 줄에 의지하고 있는 환자가 갑이고, 주삿바늘을 들고 있는 간호사가 을인가?
진입 허가를 받는 보호자가 갑이고, 길을 내어주는 의료진이 을인가?
인간 사는 이치라는 게 상당히 복잡하고 미묘해서 '너'와 '나'를 구분 짓기도,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기도, '괜찮은 놈'과 '상종 못할 놈'을 알아채기도 힘든 세상이다.
계약 내용에 따른 구분으로 갑이니 을이니 구분 짓기 전에 서로는 서로에게 완벽한 타인이다. 타인이 타인에게 감히 바랄 수 있는 것은 따뜻한 온정도 아니고, 넓은 아량도 아니라 서로에게 통하는 상식일 뿐이다. 생면부지 타인이 베푼 온정이나 호의에 감사함을 느끼는 것은 기대하는 상식 이상의 따뜻함 때문이라면, 생면부지 타인이 주는 상식 이하의 적의에 불쾌감을 느끼는 것도 지극히 정상이 아닌가. 계약에 따라 서비스를 받을 '권리'를 가진 '갑'이 드러내는 불쾌감은 '한 줌 되지도 않는 권력을 휘두르는 갑질'이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의무'를 가진 '을'이 드러내는 불쾌감은 '하루하루 생계를 위해 살아가는 고단한 인생의 서글픔'인가.
借一寸三九天里 冽冽暖阳,融这茫茫人间刺骨凉
소한의 살 떨리는 추위, 그 속의 햇살을 한 줌 빌려 사람들의 얼어버린 뼛속을 녹이고 싶어라.
—— 毛不易 《借》가사 중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