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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재 Nov 16. 2021

<흰 사진> 박현준

성상의 빛

한국예술종합학교 제17회 방송영상과 전문사 졸업작 <흰 사진> 박현준



성상의 빛


우주 속 성상의 빛은 이미 수많은 시간 동안 소멸 되었던 기억이다. 우리는 몇 억 년 전의 별무리를 상상한다. 있었음이 없음이 되는 시간과 없는 것을 상상하는 일. 이미 종료된 존재가 우주를 관통하는 빛의 행적으로 다시 기억된다. 빛의 도달이 아니라, 빛의 행적으로 기억된다. 


빛의 중지를 만들어내 그것에 물성을 부여하는 것, 그것이 사진의 행위다. 빛에 실체가 없음에도 우리가 매번 그 형상을 목도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포착된 중지 상태의 빛은 힘을 잃어 더는 우리를 향해 유영할 수 없으며, 점점 가벼워지다 사라지고 만다. 함께 사진은 가벼이 날아가 퇴색된다. 포착됨과 동시에 기록되는, 빛의 반복이 무의미하게 쌓인 순간은 이내 잊힌다. 의미 없는 축적이 계속되다 보면 구태여 그것들을 바라볼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보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다. 역시 가벼워져 잊힐 뻔했던 다섯 장의 사진이 발견되었다. <흰 사진>은 다섯 장의 사진을 따라서 순간을 복기한다. 목소리는 설명을 나열한다. 무언가를 복기할 때 우리는 이전보다 많은 세부를 마주칠 수 있다. 굳이 보려 하지 않았던 것들, 여전히 보고 싶지 않은 것들, 혹은 우리를 황홀하게 만드는 것들, 기억의 편린들이 추가된다. 그러나 사진은 여전히 가볍다. 사진 위의 빛은 언제고 다시 잊혀버릴 것만 같다. 분명 사진 속 빛은 종료된 시간의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포착된 것으로는 순간을 되찾기에 역부족이다. 

 

가볍게 날아가 유령이 되었던 이미지가 다시 여기 카메라 안에 놓여 본래의 빛으로 관찰된다. 고정된 명명 대신 영상-이미지로서 사진은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고, 빛은 중지 상태를 탈피한다. 움직일 수 있는 힘을 되찾은 빛은 복기로 발견한 순간이 ‘어떤 기억’으로 천착 되는 것을, 은근한 추억 따위로 비틀리다가 다시 잊히기를 거부한다. 혹은 사진은 흰색으로 변한다. 모든 것이 바랜다. 아니, 빛을 잃어가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형으로 돌아간다. 잊었던 기억과 사진이 머금은 세부의 이야기, 모든 경계가 허물어진 흰-세계가 등장한다. 온 빛의 최종 합이 흰색을 띄는 것처럼, 흰-세계에서 빛은 유영하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 자체와도 같다. 사진이 빛의 세계로 되돌아왔다. 유동하는 빛은 사진 속 순간이 우리에게 도달하기 위해 거쳤던 궤적을 재구성한다. 사진 속 빛의 행적은 순간과 현재의 낙차, 아버지와 나의 얼굴, 엄마가 던진 질문들을 사진에 새롭게 스민다. 잊히지 않을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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