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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묵 May 24. 2020

불쌍했던, 불쌍한 어머니

불효자의 고백

저희 어머니는 참 불쌍한 분입니다. 평생 몸과 마음에서 고달픔을 떨어내지 못하는 힘든 삶을 이어가시는 분입니다. 자식들은 다 장성했어도 그 고달픈 삶은 아직 끝나지 않습니다. 젊은 시절 어머니를 힘들게 했던 물리적이고 경제적인 고통은 지나갔어도, 이제는 자식들의 인생이 만들어내는 각양각색의 걱정거리가 젊은 시절의 고통을 대신하여 어머니의 삶을 힘들게 합니다. 이 땅의 많은 어머니들이 그렇겠지만, 늘 자식들 걱정을 달고 사시는 저희 어머니에게 과연 당신만의 인생이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니는 우리 나이 딱 서른에 혼자되셨습니다. 남편은 술을 좋아하고 친구를 좋아했습니다. 집에 쌀이 떨어지고 아내가 방에 거울 하나 없는 궁핍한 삶을 살았어도 본인은 술을 자주 즐기셨고, 어느 자리에서건 술값 내는 호기를 잊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돌아가신 그날도 아마 누군가에게 술을 사고 만취 상태로 귀가하다가 버스에 사고를 당하셨을 겁니다. 그때 남편이 남겨준 것이라고는 늙으신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제일 큰 아이가 열 살 밖에 되지 않은 고물고물 네 명의 아들들뿐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가난한 집 일곱 식구의 가장의 위치로 등 떠밀렸습니다.


장사할 밑천도 취직할 기술도 없었던 나이 서른의 여성이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아마 제가 그 입장이었으면 아이들을 고아원에 맡길 궁리부터 했을 것 같습니다. 자기 몸 하나 간수하기도 벅찬 판에, 시부모와 어린 자식들 넷의 생계까지 책임지는 막막한 상황에 처했지만 어머니는 도망치지 않으셨습니다. 짧은 결혼생활이 행복했다면 혼자 남겨진 삶을 감당하는 데 도움이 되었겠지만, 사실은 그마저도 아니었습니다. 결혼 생활은 경제적 궁핍으로, 2대 독자 며느리를 향한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의 득달같은 구박으로, 술만 마시면 나오는 남편의 폭력으로 얼룩졌습니다. 그런 남편이, 원만하지 못했던 결혼생활이 남겨준 막막한 삶인데도 어머니는 자식들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자식들이 장성하고 나서도 어머니의 힘든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자식들이 모두 독립하면서 얻은 잠깐의 행복이 금세 지나가자 이번에는 자식들이 나이 먹어가며 만드는 새로운 불행이 어머니의 삶을 짓눌렀습니다. 네 명의 아들들은 빚내어 시작한 장사를 말아먹고, 이혼으로 가정을 깨고, 병마로 쓰러지고, 타국으로 멀리 떠나 살며 몇 년씩 얼굴을 보여주지도 않았습니다. 부실한 자식들 덕에 며느리들에게 큰 소리는커녕 오히려 눈치를 보시고, 나중에 자식들에게 하나라도 더 남겨주시려고 스스로를 옥죄고 계십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자식들의 작은 정성에 즐거워하십니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이동이 어려운 데 뭐하러 오냐고 하시고, 너희들이나 맛있는 거 사 먹지 무슨 봉투냐고 하십니다. 해외 파견 중인 제가 카톡으로 전화를 걸면, 친구들과 함께 계시던 어머니는 멀리 아프리카에서 아들이 전화했다고 우정 들뜬 목소리가 되십니다. 아직도 겨울 김장을 담가 자식들에게 나눠주시고, 아직도 반찬 하나라도 더 챙겨주시려고 떠나는 자식들 앞에서 냉장고를 열심히 뒤적이십니다. 어디서 몸에 좋다는 얘기를 들으신 날은 매실과 마늘을 담그고, 맛있는 과일을 보시면 자식들이 오는 날을 위해 남겨 두십니다.


제가 나이를 먹어갈수록, 그리고 하나뿐인 제 딸이 가끔 저를 실망시킬 때마다 저는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자라면서 또 다 큰 다음에 제가 저질렀던 실수나 부족함, 무관심이 생각나고, 그때마다 서운하셨겠지만 아무 말씀 없이 넘어갔던 어머니의 마음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낯이 뜨거워집니다. 제가 인생을 잘 산 것은 아니지만, 그리 못나고 부끄럽게 살지도 않았다는 자기 위안을 하다가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제가 참 못난 아들이라는 생각에 부끄러워집니다. 저는 제 딸을 아무리 사랑해도 어머니처럼은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2020년 5월 24일

묵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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