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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묵 May 22. 2020

그리운 이름, 할머니

돌아가시고 나서야

저는 어려서 할머니 손에 자랐습니다. 선친은 제 나이 열 살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돈 버시느라 새벽 일찍 나가시고 밤이 늦어야 돌아오셨던 탓에 서로 얼굴을 못 보는 날이 많았습니다. 선친께서 돌아가시기 전에는 아예 부모님과 따로 살았었습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족이 따로 살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는데, 저와 바로 밑 동생은 서울 변두리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고, 나머지 동생 둘만 부모님과 함께 경기도 외곽에 살았습니다. 부모님과 헤어져 산 게 아마 대여섯 살 때부터였으니 제 삶의 기억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던 날이 시작이었던 것 같습니다.


할머니가 저희 손자들을 끔찍이 아끼신다는 걸 제가 깨달은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였습니다. 집안의 모든 재산과 기대를 걸었던 외동아들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이미 늙으신 할머니에게 남은 삶의 희망이라고는 아들이 두고 간 네 명의 손자들 밖에 없었을 테니까요. 손자들이 배고플까 봐 집에는 항상 밥이 있었고, 고구마를 삶든 감자를 삶든 학교 갔다 오는 손자들을 위한 간식거리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겨울이면 아랫목을 손자들에게 양보하느라 코가 시린 윗목에서 주무셨고, 연탄불을 꺼트리지 않으시려고 매일 같이 새벽잠을 포기하셨습니다. 돈이 없어 당신 옷은 못 사고 몸에 액세서리라고는 쪽진 머리에 꼽는 오래된 은비녀 하나밖에 남지 않았어도, 학교 가는 손자들의 옷은 험하지 않도록 구해 주셨습니다.


할머니는 네 명의 손자들 중에서도 장남인 저를 특히 많이 챙기셨습니다. 어느 날은 눈짓으로 저를 몰래 부엌으로 부르신 할머니는 동생들 몰래 제게 우유를 주신 적이 있습니다. 아마 손자 네 명 것을 다 사실 수는 없었나 봅니다. 동생들 보기 전에 빨리빨리 마시라고 우유곽을 아예 제 입에 밀어 넣으셨습니다. 또 제가 중간고사인지 기말고사인지 시험을 보고 일찍 집에 온 날이 생각납니다. 공부하느라 제가 살이 빠졌다 생각하신 할머니는 닭을 삶으셔서는 식을 때까지 차마 기다리지 못하시고 그 뜨거운 것을 제가 먹기 좋게 맨손으로 찢어주셨습니다. 제가 배불리 먹을 때까지 당신은 그 닭고기를 전혀 입에 대지 않으셨습니다. 


한 번은 여름 방학 때 제가 시골 고모 댁에 놀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한 2주 만에 돌아왔는데, 대문을 들어서는 저를 보신 할머니는 고무신도 미처 다 꿰지 못하고 허겁지겁 뛰어나오셨습니다. 2주 동안 얼굴을 보지도, 목소리를 듣지도 못했던 장손이 그리 반가우셨나 봅니다. 저를 붙들고 마당을 거쳐 마루로 올라서시는 할머니의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습니다.


자라면서 저는 나중에 어른이 되면 할머니를 잘 모시겠다고 할머니 앞에서, 또 저 자신에게도 다짐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모두 빈말이 되었습니다. 결혼하면서 늙으신 할머니를 일하시는 어머니 손에 맡기고 신혼살림을 차려 나간 제게 할머니를 모실 기회는 다시 없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동네라 자주 뵙기는 했어도, 제게는 할머니보다 집사람과 갓 태어난 딸이 우선이 되어 버렸고, 어느새 할머니를 생각하면 어린 시절 보여주신 할머니의 그 큰 사랑보다 제가 감당하게 될 장래 부담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제가 독립한 지 몇 년 후 할머니는 그만 치매에 걸리셨습니다. 치매에 걸려도 사랑하는 사람 하나쯤은 기억한다는데, 저희 할머니는 가장 사랑하셨던 장손마저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정신을 놓으신 채 돌아가셨습니다. 한 번도 내색을 하신 적은 없었지만, 애지중지 키웠던 장손과 함께 노년을 보내시지 못한 것이 크게 서운하셨던 탓인 것 같습니다. 저는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직후보다 시간이 지날수록 할머니의 마지막 얼굴이 오히려 더 뚜렷하게 떠오릅니다. '수욕정이풍부지'하고 '자욕양이친부대'한다는 조상님의 옛 말씀은 전혀 틀린 게 아닙니다. 살아계실 때 조금이라도 잘해드릴 것 그랬습니다. 이제사 그리워하지 말고... 


2020년 5월 22일

묵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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