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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묵 May 18. 2020

응큼했던 이군 이야기

스무 살의 순진한 기대

이군이 처음부터 응큼한 생각을 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80년대 대학에 입학했던 이군은 중학교, 고등학교 6년을 시커먼 남자들 틈에서 공부하느라 여자에 대해서는 눈꼽만치의 지식도 없었습니다. 여자 친구를 사귈 기회도 없었고, 심지어 국민학교 졸업 이후에는 또래 여자와 대화 같은 걸 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집에 여동생이나 누나라는 존재도 없어서 주변에 여성 염색채를 가진 사람으로는 할머니, 어머니와 고모들뿐이라 여자에 대해 생각할 일 자체가 아예 없었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그런 이군에게 대학은 별천지였습니다. 캠퍼스 사방에 여학생들이 널렸고, 알록달록 차려입은 여학생들이 강의실에도 군데군데 끼어 앉아 있으니 처음에는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숫기 없고 같은 연령대의 여자와 눈을 마주 본 경험도 거의 없었던 이군이 여학생들과 금방 친하게 어울렸던 건 아니었습니다. 같은 학과에서도, 서클에서도, 심지어 출신 고교 연합동문회에서도 여학생들을 만났지만, 이군이 여학생들과 대화에서 안부 인사나 으레적인 농담 몇 마디 섞는 수준을 넘겨본 일은 드물었습니다. 이군은 잘 생기거나 혹은 유머감각이 뛰어나거나 아니면 나대는 성격으로 주위의 이목을 끌 주제가 못되어 어느 모임에 가나 있는 둥 마는 둥 조용히 쪽수를 채우는 역할에만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순진한지 아닌지 판별받을 기회조차 갖지 못하던 이군이 여자를 만나서 무얼 해보겠다는 흑심을 사전에 품는다는 일은 애당초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이렇게 이성교제에 있어서 빈약하게 살던 이군에게도 관심 있는 여학생이 생겼습니다. 그녀는 같은 학과 최양이었습니다. 최양은 털털하고 활달한 성격에 술을 좋아하여 남학생들 하고도 자주 어울렸습니다. 몇 번 술자리 모임에서 어울렸던 두 사람은 서로 대화가 통한다고 느꼈는지 이래저래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됐습니다.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사귀는 사이가 되지는 못했는데, 그건 단둘이 만나건 다른 친구들을 대동하여 만나건 간에 둘은 만나봐야 기껏 술이나 퍼마시고 서로를 다른 동성 친구들 대하듯이 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던, 이군이 1학년을 마치고 군대 문제를 일찍 해결하기 위하여 휴학을 하게 됐습니다. 2학기 기말고사도 끝나 이제 둘이 족히 2년을 헤어져있어야 되는 순간이 왔습니다. 따로 사귀자고 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 순간까지도 두 사람은 부대에 면회 오라고 하거나 고무신 거꾸로 신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말을 하기에도 애매한 관계였습니다. 이군이 학교에 나오는 마지막 날, 둘은 마지막이라는 거창한 구호를 걸고 술을 마셨습니다. 시간도 늦고 술이 많이 올라 술자리를 정리하고 나섰으나 각자 집으로 향하지 못하고 미적거리던 중, 최양이 이군에게 자기 자취방에 가서 한 잔 더 하자고 청했습니다. 당시는 '라면 먹고 갈래요?'가 대중화되기 전이라 진짜 술을 한 잔 더 하자는 의미인지 아니면 최양에게 다른 의도가 있었는지 이군은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튼 술을 마다하지 않는 성격이었고, 그 밤 최양과 헤어지기도 싫었던 이군이 최양의 자취방 행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당체 여자 방에 들어와 보기는 처음이었는 데다가, 묘한 냄새와 분위기에 이끌려 이군의 기분은 몹시 들떴습니다. 흑심이 이군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건 아마 최양의 자취방에 앉자마자였을 것입니다. 거기에 술도 한 잔 했겠다, 곧 군대로 떠나니 최양과도 마지막이겠다, 자취방에 자기를 부른 건 최양도 평소에 자기를 남자로 생각했을 것이라는 확신까지 겹치자 이군은 그날 밤 거사를 치르기로 결심했습니다. 구멍가게에서 산 새우깡과 양파링을 안주삼아 소주를 마시면서 이군은 이제는 주제도 기억나지 않는 술꾼의 대화를 이어가며, 마음속으로는 어떻게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나 고민이 한참이었습니다. 고민과 함께 빈 소주병도 늘어 한 병, 두 병 쌓여갔습니다.


최양의 술에 취한 목소리를 귓등으로 들으며, 다음 단계에 대한 고민에 빠져 자빠진 빈 소주병을 술에 취한 몽롱한 눈으로 바라보던 이군의 눈 앞에 펼쳐진 그다음 장면은 형광등이었습니다. '어 내가 왜 누워있지?' 하면서 몸을 일으켜보니, 이군의 당황한 눈에 보이는 것은 못 보던 이불과, 못 보던 가구와 그리고 못 보던 방이었습니다. 그제야 최양과 술을 마시던 순간들이 어젯밤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시계를 보니 아침도 한참 지나 이제 해가 중천인 시간이었고, 같이 있었던 최양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음 단계를 계속 고민하느라 술잔을 놓지 않았고, 그러다 최 양 앞에서 이군 자신이 먼저 술에 쓰러진 것이었습니다. 누웠던 머리맡에 보니 딱지처럼 접힌 메모지가 있었습니다. '술 적당히 마셔라! 군대 가서 몸조심하고, 나중에 또 보자'. 최 양이 아르바이트를 가며 남겨놓은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허무할 데가 있나요? 분위기 좋았고, 분명히 기회가 있었는데 어이없게도 이군은 최양보다 먼저 쓰러져 기회를 놓쳐버린 겁니다. 머리를 쪼개는 숙취의 고통과 함께, 천금 같은 기회를 날린 자신에 대한 원망으로 이군은 몹시 비참한 기분이 되어 최양의 자취방을 나섰습니다. 그날 집으로 가는 길이 얼마나 길었는지 모릅니다. 가는 내내 어젯밤 실수를 두고두고 되씹으며 자책하는 바람에 이군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질 대로 찢어졌고, 여자 친구 하나 없는 군생활을 해야 한다는 갑갑함이 그 찢어진 마음을 다시 또 죽어라 고문해댔으니까요.


복학하여 이군은 최양을 다시 만났습니다. 이군을 반갑게 맞아주기는 했지만, 최양은 이미 이군이 어찌해 볼 수 없는 대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4학년 졸업반이 된 최양은 이군이 휴학한 그다음 해 초에 복학한 같은 학과 다른 선배와 소문난 CC 즉 캠퍼스 커플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흑심을 품었던 이군과 달리, 최양은 아마 그날 밤 군대 가는 이군을 위해 그냥 위로하는 술이 더 마시고 싶었나 봅니다. 아니면 군 입대를 앞두고 온갖 불쌍한 척 다하며 심란하게 고민하는 표정의 이군, 자기 자취방에서 자기를 남겨두고 쓰러져 세상모르게 코를 골고 자는 이군에게 흑심 대신 동정을 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2020년 5월 18일

묵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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