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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묵 May 15. 2020

쫌팽이 김씨 이야기

이래저래 쫌스러운 사람

제가 아는 김씨는 참 쫌스러운 사람입니다. 사실 김씨는 돈이라는 주제로 보자면 구두쇠에 가깝고, 저보다 약한 사람에게 하는 짓을 보면 진상에 가깝고, 조금이라도 위험이 따르는 일을 마주할 때 보면 겁쟁이에 가깝고 집 안에서 마누라에게 하는 짓을 보면 잔소리꾼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그를 구두쇠나 진상이나 겁쟁이나 잔소리꾼이라는 어느 한 그룹으로만 묵기에는 애매한 측면이 있습니다. 확실하게 구두쇠나 진상이나 겁쟁이나 잔소리꾼이라는 타이틀을 주기에는 그 정도에서 조금씩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런 타이틀들을 갖는 일들에 마저 과감하거나 여유 있게 경계를 넘지 못하는 쫌스러운 그를 저는 그냥 쫌팽이라 부릅니다.


우선 그는 돈 쓰는 일에 항상 주저주저합니다. 그는 혼자서는 절대로 카페에 가지 않습니다. 혹시 가더라도 제일 싼 아메리카노 외에 다른 메뉴는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식당에 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 가거나 혹은 일행이 있지만 본인이 돈을 내야 되는 경우에 본인 것으로는 항상 제일 저렴한 메뉴를 고릅니다. 추어탕집에 가서 순두부찌개를 고르고, 낙지집에 가면 산낙지나 낙지탕탕이는 구경만 하는 식입니다. 신혼 초 부부 싸움 끝에 마누라가 '이렇게는 못 산다'하고 짐을 싸자 그가 가장 먼저 한 얘기가 '통장은 놓고 가' 했던 일화도 있습니다. 하지만, 옆에서 등 떠밀릴 때 그는 본인의 구두쇠 정신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지갑을 열고 맙니다. 돈 낸다는 얘기를 먼저 하는 적은 없지만 '오늘은 당신이 사'하는 마누라의 한마디에 처가 식사 모임에서 돈을 쓰고, 술을 좋아하니 '술 한 잔 사주세요'하는 후배의 퇴근 후 요청에도 돈을 쓰고, '아빠! 나 저거'하는 딸의 외침에는 지갑째 줄 요량입니다. 그는 구두쇠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사람입니다.


김씨는 진상짓도 가끔 합니다. 콜센터에 전화를 걸어서는 자기 전화를 늦게 받았다고 지적질하고, 상담원과 연결되기 전에 이미 눌렀는데 왜 또 밀번호를 물어보냐고 상담원에게 따지고, 상담원이 좀 길게 대답할라치면 자기 문의는 그런 게 아니라고 상담원의 말을 가로 자르면서 짜증을 냅니다. 그렇다고 상담원에게 본격적인 진상짓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전화 상담을 시작할 때는 으레 '고생 많으십니다', 상담이 끝나면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를 잊지 않거든요. 아파트 경비원에게는 차라리 눈치를 보는 편입니다,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는 날에는 혹시 재활용품 분류에서 경비원에게 지적질을 당하지 않으려고 경비원이 다른 데 볼 때를 노립니다. 그는 진상인지 아닌지도 헷갈리는 사람입니다.


그는 또 몹시 겁이 많은 사람입니다. 여름휴가 때 바다에 들어갈 때는 가슴 높이까지가 절대 한계이고, 비싼 돈 주고 해외여행을 가서는 물이 무서워 스킨스쿠버는 남들 하는 거 구경만 합니다. 대여섯 명만 모인 자리에서도 자기주장을 제대로 펴기는커녕 땀을 뻘뻘 흘리거나 달달 떨기 일 수입니다. 하지만, 그런 겁쟁이 주제에, 어울리지 않게 주식투자에 용감하게 나서서 크게 한 번 재산을 날린 적이 있습니다. 또 회사 내에서는 업무처리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상사와 부딪치는 과감한 행동으로 찍힌 경험도 있습니다. 그는 겁쟁이인지 아닌지도 헷갈리는 사람입니다.


그는 집 안 물건의 위치를 가지고 마누라에게 잔소리를 하기도 합니다. TV를 보면서 거실 한쪽 구석에 있는 전기 콘센트로 자기 스마트폰을 충전하기 위하여 소파는 꼭 지정된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집사람이 청소를 하다가 잘못 움직여 소파가 콘센트를 조금이라도 가리면, 자신이 원하는 위치로 소파를 원상복귀시키면서 집사람에게 툴툴거립니다. 화장대 위 자기 스킨로션은 잘 나오도록 거꾸로 세워 놓는데 만일 집사람이 청소하다가 똑바로 세워놓기라도 하면 또다시 짜증을 냅니다. 스킨로션 하나 뒤집어 놓는 데 얼마나 힘이 든다고, 청소하느라 고생한 집사람에게 잔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잔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 건 아닙니다. 잔소리하다가 집사람에게 되치기를 당하면 삐져서 며칠 동안 아예 입을 닫고 살기 때문입니다. 입을 열지 않으니 잔소리를 할 방법이 없지요. 그는 잔소리꾼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사람입니다. 


구두쇠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진상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겁쟁이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잔소리꾼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김씨를 저는 그냥 쫌팽이라 계속 부르기로 합니다. 여기저기 모자란 인생의 그는 구두쇠나 진상이나 겁쟁이나 잔소리꾼이라는 확정적인 타이틀을 받아야 할 때도 확실하게 나서지 못하고 좀스럽게 굴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2020년 5월 15일

묵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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