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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묵 May 13. 2020

딸의 남자 친구를 좋아할 수 있을지

부모의 역할인지 속물인지

저는 딸 하나만을 키우고 있습니다. 그 딸은 아빠의 부실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여지까지는 부모에게 큰 적정을 끼치는 일 없이 당당한 여성으로 잘 성장하고 있습니다. 부모에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의존하던 시절은 지났으며, 아빠나 엄마가 간섭할 수 없는 자기 일정들과 또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자기 생각들 속에서 바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딸이 다 컸다고 생각하니, 제가 아무리 부모라지만 옆에서 말 한마디 붙이기가 조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딸의 행동이 마음에 안 들거나,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제가 한 마디 하고 싶어도 괜한 잔소리 같고, 바뀐 시대상황을 감안하지 못하는 나이 든 세대의 꼰대 짓 같아서 입 열기를 주저하게 됩니다.


말을 붙이기도 조심스럽지만, 제가 딸의 인생에 깊게 간섭하고 싶은 주제 하나는 딸의 남자 친구에 대한 것입니다. 아마도 지금 딸에게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주제겠지요. 제 부모와 대화통로가 단절되어 있지는 않은 덕에 딸은 학업이나 진로와 같은 주제들처럼 밥상머리에서 남자 친구의 얘기도 쉽게 끄집어냅니다. 딸이 남자 친구에 대한 감정이나 관계를 부모에게 감추려 들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알아서 공유해주지 않았더라면, '과연 어떤 놈인지', '둘이 어느 정도 관계인지' 궁금해서 이 아빠는 미치도록 답답했을 것 같습니다.


딸이 본인 입으로 남자 친구 얘기를 해주니 제 마음이 답답하지는 않은데 걱정은 됩니다. 딸의 남자 친구란 녀석이 도통 제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국적을 막론하고 아버지들이 딸의 남자 친구를 처음부터 좋아하지 않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현상이나, 얼굴이 뺀지르하다는 딸의 남자 친구라는 이 녀석이 저는 정말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녀석은 제 딸보다 공부를 잘하지 못합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려면 다른 장래 계획이라도 있어야 되겠는데 이 녀석은 그런 것도 없나 봅니다. 그저 자기 아버지가 하시는 자영업 상점을 맡아서 하는 것을 자신의 미래로 그리고 있다고 합니다. 자기 아버지가 나이 들어 시작한 자영업에 젊어서부터 편하게 숟가락 하나 얹으려고 하는 그 안이함과 매가리 없음이 저는 통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 매일매일이 전쟁터 같을 자영업에, 또 자기가 개척하지도 않은 자영업에 얼마나 밝은 미래가 있어서 젊은 사람이 자기 인생의 출발을 걸어야 하는지, 또 얼마나 그 일을 오래 해나갈 수 있을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경제성장이 멈춘 지금의 대한민국은 죽어라 노력해도 취직하기 힘든 세상이 되었고,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 젊은 시절을 보내다가는 평생 제대로 된 직업을 갖기도 어렵습니다. 제대로 된 직업이 없으면 지 배우자와 아이들을 고생시킬 것은 불을 보기보다 훤한 일일 것입니다. 제가 순전히 경제적인 면만을 걱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가정의 기반을 책임지지 못하고 자칫 배우자의 능력에 기대야 하는 가장이 과연 구성원들이 고생하지 않을 원만한 가정을 쉽게 이룰 수 있을까요? 직업 전선에 나서 돈을 벌어야 되는 동시에 아이도 돌보고 집안 일도 담당하는 처지에 몰리는 커리어우먼들의 고생은 남편이 부실한 경우 더 심해질 것입니다. 너무 이른 고민이기는 한데, 저는 그 고생하는 배우자가 제 딸이 아니기를 바라고, 그 애들이 제 외손자들이 아니기를 바라기 때문에 무능해질 것 같은 그 녀석이 싫은 겁니다.


물론 녀석에게 장점도 있기는 있습니다. 그건 여자 친구에게 끔찍하게 잘한다는 것입니다. 기념일을 잘 챙기고, 비싼 선물을 수시로 하고, 딸 시간에 맞춰 늦은 밤 길게 전화 통화하는 걸 마다하지 않는 등 곰살맞기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이 점은 제가 연애할 때 집사람에게 해준 것보다 열 배, 백배는 나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싫은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아무리 여자 친구한테 잘해도 나중에 지 처와 아이들을 고생시킬 가능성이 높은 녀석에게 곱게 곱게 키운 딸을 줄 수는 없습니다. 죽 쒀서 개 주는 격이니까요. 


하지만, 결정할 때가 되었을 때 딸이 좋다 하고 그 녀석 아니면 안 되겠다고 하면 어쩌지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제 눈에는 딸이 고생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는 게 분명히 보이지만, 딸이 자기 인생이니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결사적으로 나서게 되면 제가 딸의 의지를 꺾을 수 있을까요? 또 꺾은 들 제 속이 편할까요? 제가 딸이 그토록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하게 막아 딸의 인생을 더 불행하게 만드는 아빠, 딸의 고생을 볼 수 없다는 핑계로 딸의 진정한 사랑을 가로막은 속물 같은 아빠의 처지가 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어렵네요. 아직 딸이 결혼하려면 멀었고, 그 녀석이 딸을 주십사 하는 것도 아닌데 너무 일찍부터 걱정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2020년 5월 13일

묵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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