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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묵 May 28. 2020

불러보지 못한 이름, 아버지

짦은 만남, 영원한 이별

불행히도 저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얼마 없습니다. 기억이 시작되는 시절부터 제가 부모님과 헤어져 살았기 때문입니다. 아마 대여섯 살부터 아버지를 한 달에 잘해야 한 두 번 만나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제 나이 열 살에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시면서 아버지는 저의 삶에서 실재하지 않는 분이 되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아빠라고 불러본 기억도, 아버지가 제 이름을 불러준 기억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본인의 부모님 즉 저희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는 잘하셨던 것 같습니다. 사업 실패로 서로 멀리 떨어져 살아서 자주 뵐 수 없는 여건이었다지만, 어쩌다 집에 오시는 날은 그렇게 다정한 아들일 수 없었다고 합니다. 물론 제 기억이 아니라 돌아가신 할머니의 기억입니다. 하지만, 제게는 항상 소리 지르고 화를 내는 무서운 분이었습니다. 혼나서 울고 나면, 어린 마음에 저는 아버지가 다시는 집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제가 울었던 기억이 없을 정도로 저는 아버지를 무서워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혼났는지는 기억이 안 나고 그저 큰 소리로 야단치시는 아버지 앞에서 무서워서 쩔쩔매던 기억만 남았습니다. 아니 혼났는지 기억나는 있습니다.


그날은 제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일하시는 청계천 공구상가날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국민학교 1학년인가 2학년인 제게 돈을 주시면서 근처 가게로 심부름을 시키셨습니다. 덜 똘똘했던 저는 가게 주인에게 돈을 먼저 주고 물건을 골랐습니다. 건을 고르고 나서 주인에게 계산해 달라고 했으나, 주인아저씨는 제게서 돈을 받은 적이 없다고 시치미를 딱 뗐습니다. 아마도 가게 안에 있던 다른 손님들을 상대하느라 헷갈렸던 것인지 아니면 심뽀 고약하게 안 되는 돈을 떼어먹으려고 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만, 제가 멍청한 짓을 했다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 일로 저는 아버지한테 많은 사람들 앞에서 크게 혼이 났습니다. 아마 '병신 같은 게' 이런 소리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저를 더 우울하게 만들었던 건 제가 혼나는 자리에 마침 와있던 한 살 어린 사촌 여동생의 존재였습니다. 저를 대할 때 하고는 다르게 아버지는 그 사촌 여동생을 아주 상냥하게 대하셨고, 그 아이도 외삼촌인 저희 아버지를 아주 친밀하게 대하는 걸 옆에서 지켜봐야 되는 창피하고 어색한 상황에서 제가 혼까지 났으니 어련했겠습니까.


즐거웠던 기억이 있기는 있습니다. 어디 가는 길인지는 전혀 기억에 없지만 버스 안이었고, 앞자리에 앉은 제게 등 뒤에서 아버지는 '저게 남대문이야' 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알려주신 남대문을 그게 버스 뒤로 사라져 안 보일 때까지 쳐다봤습니다. 버스가 지나는 길이었으니 잘해야 몇 초 되지 않는 순간이었을 텐데 유쾌한 것도 행복한 것도 아닌 평범했던 그 순간의 기억은 몇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뚜렷하게 남아있습니다. 어느 방학에 따로 살던 부모님 집에 갔을 때 썰매를 만들어 주시고 같이 놀기억이 납니다. 어쩐 일인지 집에 계시던 아버지는 나무판을 자르고 철근을 구부려 붙여 저와 동생들에게 근사한 썰매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스케이트장이 논에서 갓난쟁이 막내를 제외한 저희 형제들과 아버지는 옷이 흠뻑 젖도록 놀았습니다. 해가 져서 집으로 돌아가야 되는 시간이 되었을 때 저희들이 얼마나 아쉬워했는지 모릅니다. 그때가 처음이었던 같습니다. 아버지와 같있어도 무섭지 않았던 처음...


제가 나이를 먹고 생각해보니 아버지의 삶도 참 불행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독자셨던 할아버지께서 나이 마흔이 넘어 얻은 귀하디 귀한 2대 독자였습니다. 남존여비가 보편적이었던 시절 딸 셋을 줄줄이 낳고 겨우 얻은 2대 독자 아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였을까요? 아버지를 향한 할머니의 지극 정성은 할머니의 발톱에 그대로 남았습니다.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은 아들을 기다리며 추운 겨울밤 고무신 신은 발을 동동 구르던 할머니의 발톱은 동상으로 다 썩어버렸습니다.  


아버지 이후에 얻은 자식들도 모두 딸이라 할아버지 할머니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아버지는 여자 형제들의 희생 위에 부모님의 모든 기대를 짊어져야 헸습니다. 벌렸던 사업이 잘 안 되는 바람에 집 안의 모든 재산이 날아가고 부모님과 여동생들이 다리 밑 판자촌 단칸방에 구겨져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아버지의 심적 고통을 저는 차마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만만치 않은 세상살이 속에 지친 남자로서, 늙으신 부모님의 유일한 아들로서, 아이 넷을 가진 가장으로서의 삶은 결코 쉬운 게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다시 일어서기 위한 노력을 제대로 꽃 피워보기도 전에 교통사고로 30 대 중반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부모와 배우자와 자식과 재기의 희망을 한 순간에 모두 잃은 건 아버지의 불행했던 삶의 마지막이자 가장 큰 불행이었습니다.


2020년 5월 28일

묵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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