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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묵 Jun 11. 2020

직장에서 만나기 싫은 세 종류

미루고, 말로만 그리고 영혼 없이  

저는 직장 생활을 한 군데에서만, 그것도 상당히 오랫동안 하고 있습니다. 다니고 있는 회사가 제 마음에 들어서 오래 다녔던 것은 아니고 어쩌다 보니 그리됐습니다. 근속 기간은 오래되지만, 사실 자회사로 대학원으로 파견 나갔던 기간들이 중간에 몇 년씩 섞여 있었고 해외출장이 많아서 지루할 틈 없이 그 긴 시간이 쉽게 흘렀던 것 같습니다. 


뒤돌아다 보면 그동안 이 조직에서는 여러 종류의 다양한 분들과 인간들을 참 많이 만났더랬습니다. 존경하는 선배들, 좋았던 동료들, 아끼고 싶은 후배들도 있었지만, 같이 일하기 싫었다거나 꿈에서라도 엮이지 말아야지 했던 인간들도 꽤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중 제가 싫어하는 인간들을 꼽아 3가지 유형으로 나눠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제가 싫어하는 유형은 골치 아픈 일이 생기면 일단 미루고 보는 인간들입니다. 손으로 결재하던 시절에 검토가 필요하다면서 결재판을 자기 책상 서랍에 몇 달씩 고이 보관하던 인간, 수없이 재검토와 추가 자료를 요구하며 상대가 지쳐 나가떨어지도록 만들었던 인간, 결정을 혹은 행동을 재촉할 때마다 매번 똑같은 질문을 하며 사안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하던 메멘토 주인공 같은 인간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 유형은 말로는 뭐든 다하는 인간들입니다, 자기가 다할 수 있다고 하거나 심지어는 자기가 다했다고 주장하던 인간, 물어볼 때마다 거의 다 됐다고 하다가 막상 까 보면 하나도 안 해놓은 인간, 할 줄 안다고 해서 정작 시켜보거나 도움을 받으려 하면 이 핑계 저 핑계로 미꾸라지처럼 살살 빠져나가거나, 옆 동료에게 슬쩍 넘겨버렸던 인간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유형은 위에서 지시를 받았으니 나는 모른다는 인간들입니다. 잘못된 일인지 자기도 알지만 위로부터 지시를 받은 일이니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한다고 우기는 인간이 있었습니다. 그래 놓고 일에 진척이 없거나 결국 잘못된 결과를 얻게 되면 지시를 받아서 한 일이니 어쩌겠냐고, 자기가 무슨 죄가 있냐고 천연덕스럽게 얼굴을 드는 인간도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런 인간들이 하필이면 지금 제 곁에 한꺼번에 모여 있습니다.  그중 제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간은 의사결정을 계속 미루기만 합니다. 그것도 곱게 미루는 것이 아니라 이것저것 쓸데없는 요청 자료만 산더미처럼 쌓아주면서 말입니다. 그 밑에 있는 인간은 지시사항이니 일단 수행하자면서 말도 안 되는 자료를 영혼 없이 챙기고 있습니다. 그 둘 사이에 있는 인간은 자기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해 주겠다고 말로 약만 팔고 있습니다. 내용과 이슈 파악도 안 하면서 또 입으로 한 건 하려고 하는 수작이 훤히 보입니다.


처음에는 이들과 많이 싸웠지만 그래 봐야 제 감정만 상하고 제 몸만 힘든 상황이 계속되니 저도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됐습니다. '이번 생'은 아니고 '올해'는 망했다 포기하고 맞춰주자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어차피 미뤄질 일이니 서두르거나 야근을 안 해도 되고, 지시받았다는 일은 나중에 쓰일지 안 쓰일지도 모르니 '했다' 하는 정도로 품질을 낮춰 갖다 주면 되고, 약만 파는 인간한테는 이미 다했다고 같이 약을 팔면 됩니다. 이러다 저도 모르게 저 세 인간들처럼 변하는 거 아닐까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세 유형이 제 한 몸에 모두 집약되면 아무도 당할 수 없는 천하무적의 진상이 될 테니까요.


2020년 6월 11일

묵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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