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묵묵 Jun 09. 2020

술꾼 박씨 이야기

온전히 살아있음이 용한 양반

박씨는 술꾼입니다. 음식이든 연애든 사업이든 술이 무언가를 위한 도구가 되는 시대의 흐름과 달리 술 자체를 즐길 줄 아는 이 시대의 진정한 애주가입니다. 물론 이는 스스로의 평가일 뿐 그는 자신이 애주가라는 사실을 주위로부터 제대로 인정받지는 못합니다. 특히 그의 술버릇을 옆에서 고스란히 지켜본 아내의 표현을 빌자면 그는 언감생심 애주가는커녕 술꾼도 못되고 아예 주정뱅이에 가깝습니다. 아내로부터 주정뱅이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가 강력히 반박하고는 하지만, 그의 반박은 아내의 표현을 바로 잡는데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가 술을 지나치게 자주 마시는 것이 빼도 박도 못하는 사실인 데다, 뭔 소리를 듣던 아내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않도록 적당한 선에서 입을 다무는 게 다음날 해장국 한 그릇이라도 얻어먹는데 유리하다는 것쯤은 그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젊어서부터 술을 좋아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친구로부터 술을 처음 배운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술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학력고사를 봐야 되는 그해는 술맛만 보는 선에서 겨우 넘겼습니다만, 대학에 입학한 후부터 그는 술과 대단히 막역하게 지냈습니다. 밤새 술 마시느라 집에 못 들어가는 날이 부지기수인 데다 술을 마시고 강의를 빼먹기도 일수였습니다. 오후에 캠퍼스 잔디밭에서 시작한 술이 그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진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마셔댄다고 박씨가 술이 센 편도 아니었습니다. 고교 동문회 가서는 초반부터 혼자 기분 내며 달리다가 뻗는 바람에 선배들이 버리고 가서 식당 종업원들 사이에 끼어 잔 적도 있었습니다. 학과 MT 가서는 혼자 신나서 쉬지 않고 술을 들이켜대다 오바이트(구토?)를 하는 바람에 다 같이 자야 되는 방 안에 크게 전을 부쳐 모두를 경악하게 한 적도 있습니다. 술을 마시다 서클 운영과 관련된 말다툼 끝에 선배에게 주먹을 날린 적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의 주먹마저 술에 취했는지, 오히려 선배에게 두들겨 맞는 것으로 끝을 봤지만...


그가 군에 가기 위해 휴학했을 때는 강의라는 최소한의 장애물도 없어졌으니 아주 살판났듯이 술을 마셨습니다. 그와, 고교 동창이었던 친구는 남도여행이라는 거창한 구호를 걸고 경상도와 전라도 일대를 보름 동안 돌았는데, 그때 목표 중 하나가 둘이서 술 100병 마시기였습니다. 마지막 날 영등포역에서 새벽 2시쯤 목표를 달성한 건 술자리에서 두고두고 그가 떠벌리는 자랑이 되었습니다. 그의 술버릇은 군에 가서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술 마시다 걸려 완전군장 뺑뺑이도 수차례, 엎드려뻗치고 빳다 맞기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다행히 문제 일으키기를 원하지 않은 선임하사와 소대장들을 만난 덕에 영창이라도 면한 게 기적이었습니다. 유격 조교로 입소해서는 낮술을 마시고 뻗어 훈련을 빼먹은 적도 있었습니다. 이때 그가 어떻게 부대의 처벌을 면했는지는 아직도 불가사의입니다.


시간이 더 지나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도 그의 술버릇은 여전했습니다. 돈도 있겠다, 매일 같이 술 마실 동료들도 바로 옆에 있겠다, 아침에 해장국을 끓여줄 마누라도 있겠다 그가 술 마실 수 있는 천혜의 환경이 갖춰진 것이었습니다. 다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다음 날 출근은 해야 되니 학생 때처럼 겁 없이 밤을 새워 술을 마시지는 못했습니다. 박씨가 회사와 가정에 대해 그 정도 양심은 있었나 봅니다. 물론 술 마신 후의 에피소드가 기상천외하게 바뀌기는 했습니다.


술에 취한 박씨가 택시가 잡히지 않자 순찰차를 얻어 타고 귀가하려다 파출소에서 잠든 적이 있습니다. 물론 순경들이 아내에게 전화를 하는 바람에  그 작전은 실패했지만요. 다음 날 일어난 박씨는 젖꼭지가 몹시 아팠습니다. 출근하여 비슷한 수준의 술꾼 동료에게 들어보니 박씨가 전날 밤 순경들에게 젖꼭지를 꼬집힌 것 같았습니다. 젖꼭지 꼬집기는 상처도 남기지 않고 취객의 정신을 차리게 하는데도 도움이 된다고 순경들이 많이 쓰는 방법이라고 하더군요. 그 후로 박씨는 아무리 술에 취해도 두 번 다시 파출소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며칠 동안 젖꼭지가 알알하게 아팠던 기억이 술에 취해도 잊히지가 않았거든요. 술 취한 박씨가 아내가 모시러 온 덕에 집 앞까지는 왔는데 내리지 못하고 차 안에서 밤을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술에 취해 더 무거워진 박씨를 아내가 차에 버리고 집에 들어가 버렸는데, 이 양반 차문을 못 찾아서 차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기껏해야 한 평도 되지 않는 자기 차 문도 못 찾을 만큼 취한 인간이 바로 박씨였습니다.


다행히도 술에도 총량이 있는 모양입니다. 남자가 먹을 수 있는 술의 양이 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데 박씨는 젊은 시절에 이미 그 총량을 소진했나 봅니다. 예전에는 일단 술을 마시는 순간순간들을 무조건 즐거워했던 박씨가 나이를 먹더니 이제는 첫 잔 들어가는 순간부터 숙취의 고통을 떠올리고, 집에 못 돌아갈까 두려워하더니 몇 잔의 소주에도 금방 헤롱 대고 비실대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도 그는 그 상황에 금방 적응했습니다. 소주 몇 잔으로 옛날 소주 몇 병의 효과를 낼 수 있으니 가성비가 좋아진 셈 치면 된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술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박씨를 진정한 술꾼으로 봐줘도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2020년 6월 9일

묵묵

작가의 이전글 이런 게 과대망상증이었겠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