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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묵 May 05. 2020

일식씨와 삼식이 새끼의 사이에서

하루 세 끼 차려먹는 일의 고통

아내가 은퇴한 남편을 부르는 호칭이 남편이 집에서 먹는 끼니 수에 따라 달라진다는 유머가 있습니다. 남편이 은퇴 후 집에서 단 한 끼도 먹지 않으면 '영식님', 한 끼를 먹으면 '일식씨', 두 끼를 먹으면 '두식이' 그리고 세 끼를 다 먹게 되면 '삼식이 새끼'라고 불린다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세 끼 밥을 차려주는 게 욕 섞인 호칭으로 부를 만큼 지겹고 힘든 일인지 저는 몰랐습니다. 아마도 은퇴하여 돈도 못 벌고 대화도 안 통하는데 집에만 콕 처박혀 있어 꼴도 보기 싫은 남편에게 하루 세 끼 밥까지 차려줘야 하는 것에 이골이 난 여자분이 만든 유머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 여자분의 편을 들자면 남편은 젊었을 때 돈 벌어온다고 유세 깨나 하고 집에서 살림하는 여자한테 요리하는 게 무슨 대수냐고 늘상 아내를 타박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평소 아내와 사이가 아주 좋다고 자부하는 저는 남편에게 밥 세 끼 차려주는 게 그리 힘든 일인가 의아했고, 나중에 집에서 하루 세 끼를 다 먹더라도 아내로부터 '삼식이 새끼'라고 불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습니다. 제가 특별한 요리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큰 수고 없이 밥통에 있는 밥을 푸고 냉장고에 있는 반찬을 꺼내고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져 있는 김치찌개 냄비에 불만 키면 한 끼 차리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다정하게 아내 옆에 서서 수저 놓는 일을 맡아줄 것이고 가끔 설거지도 도와줄 것이기에 은퇴 후 세 끼를 집에서 먹는 일에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저도 르완다에서 강제적인 재택근무를 한 달 반쯤 혼자 해보니 하루 세 끼 밥을 차리고 치우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저절로 깨우치게 됐습니다. 매번 뭘 먹을지를 고민해야 되고, 회사 일을 하거나 인터넷으로 재미있는 걸 보다가도 밥때에 맞춰 부엌으로 가야 되고, 잠깐의 식사를 즐긴 후에는 수북이 쌓인 그릇들을 설거지해야 됩니다. 평소 남이 차려주거나 식당에서 돈 내고 밥을 먹을 때에는 식사 시간 사이의 간격이 꽤 길다고 생각했고 때로는 식사 시간을 기다리기도 했었는데 제가 직접 식탁을 하루 세 번 차려야 되는 신세가 되니 식사 시간 돌아오는 게 영 부담이었습니다. 차리고 치우는 수고로움에 더해 똑같은 재료를 써도 내가 한 음식은 왜 더 맛이 없고, 긴 시간 고생했음에도 결과물로 나온 요리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스트레스는 덤으로 딸려왔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사랑하는 아니 정 때문에 같이 사는 은퇴하고 힘 빠진 남편들을 '삼식이 새끼'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늙은 아내들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남편이 최소한 싫어하지 않을 만한 메뉴를 고민해야 되고, 하던 일을 중단하거나 외출을 서둘러 끝내고 돌아와 식탁을 차려야 되고, 다 먹은 지저분한 그릇들을 혼자 치워야 되는 일을 하루에 세 번,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세월 동안 해내야 한다면, 그것은 머릿속에 있는 사랑이나 정보다 앞설 수밖에 없는 손과 발이 고생하는 고역이요 지옥 같은 현실인 것이라는 것을 재택근무를 통해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힘들게 차려 놓은 식탁은 준비한 고생에 비하여 별게 없어 보일지도 모르고, 비록 같이 먹는 남편이 아무 말은 안 해도 남편 얼굴 표정에 따라 음식 맛에 대해 괜히 켕기는 심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거기다 대화를 시도한답시고 남편이 식탁 위에서 썰렁한 아재 개그를 풀며 혼자 끽끽거리고, 아니면 이것저것 물어 싸면 겨우 끌어올렸던 밥맛도 떨어질 겁니다.     


이제 저는 늙어서 '일식씨'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기로 했습니다. 아침식사는 아내가 일어나기 전에 빵이나 고구마로 가볍게 끝내고 살며시 치우고 나갈 겁니다. 점심 식사는 하루 종일 돌아다닐 요량으로 어떻게든 약속을 잡든지 아니면 냉장고 속 반찬 아무거나 주섬주섬 챙겨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나갈 겁니다. 밤에는 어쨌든 집으로 돌아와야 되니, 저녁식사는 가족들 먹는 시간에 맞추어 숟가락 하나 더 놓는 전략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집에 있어도 밥을 달라는 독촉이나 맛이 어떻다는 품평은 절대로 삼갈 것이고 설거지는 도와주는 게 아니라 저의 일이라는 머슴 정신으로 단단히 무장을 할 겁니다. 이 정도 정성이면 아내에게 '일식씨'로 불릴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어찌 서글픈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요? 등 뒤에서 욕 섞인 호칭으로 불리더라도 몸이라도 편하게 그냥 '삼식이 새끼'를 할까요?


2020년 5월 5일

묵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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