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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묵 Jun 25. 2020

만화방의 추억

아늑했던 공간, 흐르는 줄 몰랐던 시간

제가 어렸을 때에는 동네마다 만화방이 하나씩은 있었습니다. 만화방은 보통 상가 건물 지하에 있었는데, 입구와 카운터를 제외한 사면에 책장이 쭉 늘어서 있고 그 안에 단행권과 전집 만화책들이 가득가득 꽂혀있는 구조였습니다. 이용하는 방식은 읽은 낱권으로 돈을 내든가, 한꺼번에 돈을 좀 많이 내고 시간 단위로 끊어 만화를 읽는 식이었습니다. 조그만 과자 진열장도 있었고, 따로 돈을 내면 상냥한 주인아줌마가 맛있는 라면도 끓여주고는 했습니다. 읽는 걸 좋아하던 제게는 천국 같은 공간이었습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만화를 보는 유일한 방법은 이처럼 만화방에 가거나 한 달에 한 번 나오는 월간 소년 잡지를 기다리는 방법뿐이었습니다. 월간 소년 잡지는 기다리기에도 지루하고, 다른 잡지를 가진 친구들과 돌려보더라도 며칠이면 다 외울 정도가 되어버리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만화방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었지요. 다만, 용돈이 늘 부족했던 저는 낱권으로 몇 권 보기도 버거운 신세라 만화방에 들어갈 때 하늘을 날 뜻 가볍던 발걸음이 나올 때는 아쉬움에 천근만근 무거워지고는 했었습니다.


급기야 한 번은 만화방 때문에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바로 밑에 동생이 돼지저금통을 깨는 날이었습니다. 원래는 어머니께 맡겨 은행에 예금을 했어야 했는데 저는 동생을 꼬드겼습니다. 얼마인지 아무도 모를 테니 만화책 몇 권만 보자고 말입니다. 동생은 그 악마 같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저와 함께 어른들 몰래 집을 나섰습니다. 몰래 나오는 데 집중한 나머지, 저와 동생은 미련하게도 돼지저금통을 턴 동전을 전부 들고 만화방으로 향했습니다. 당초 만화방에 들어설 때의 목표는 '몇 권'만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권만 더!', '한 권만 더!'  하다 보니 어느새 가지고 있던 동전이 모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제서야 저와 동생은 몇 달 동안 저금한 돈을 한 번에 날려서 어른들께 혼날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돈을 다 써버린 것을 뭐라고 핑계 대야 할지 둘이 머리를 굴리며 나오다 저와 동생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분명히 점심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을 나섰었는데 만화방을 나서보니 깜깜한 밤이 되었던 것입니다. 한 권만 더, 한 권만 더 하다가 몇 시간이 훌쩍 지난 것도 몰랐던 것입니다. 핑계고 뭐고 두려운 마음에 한 걸음으로 달음박질하여 집에 도착했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저와 동생은 죽을 만큼 혼이 났습니다. 두 놈이 아무 말도 없이 집을 나가서는 어두워졌는데도 돌아오지 않으니 뭔 사단이 난 게 아닌지 모두들 걱정하셨던 거죠. 집안이 발칵 뒤집힌 것도 모르고 쏘다녔다고 두들겨 맞고, 만화방에 갔었다고 실토하자 저금한 돈을 몽땅 만화 따위를 보느라 다 날렸다고 또 맞았습니다. 둘이서 잘못했다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습니다. 그래도 할머니께서 차려주신 늦은 저녁은 눈물, 콧물 흘려가면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지금은 만화를 스마트폰으로 아무 때나, 아주 쉽게 접할 수 있는 세상이 됐습니다. 돈을 낼 필요도 없고, 무궁무진한 인터넷 세상의 만화들 중 자기 취향에 맞는 것을 손가락질 몇 번으로 골라 읽을 수도 있습니다. 아직 가보지는 않았지만, 지금의 만화방들은 옛날과 달리 카페처럼 아주 쾌적해지고 세련되어졌다고도 합니다. 참 편하고 좋은 세상이지요. 그래도, 저는 요즘 학생들이 불쌍합니다. 아늑한 만화방에 부모님 몰래 친구들과 몰려가 떠들며 과자를 집어먹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침 발라 만화책을 넘기던 추억을, 집안 소파에 누워 혼자 보는 스마트폰이나 깔끔해서 어지르기 미안한 만화카페의 편안함과 맞바꾸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부모님들께 혼나기는 했어도, 지하 만화방에서 보내던 그 짧은 시간을 돌이켜보면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번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2020년 6월 25일

묵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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