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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묵 Jun 23. 2020

살다 보면 이런 행운도

집 나간 누나 찾기

진짜 행운까지는 아니더라도 살다 보면 가끔씩 기대하지 않게 일이 잘 풀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복권에 당첨된다든가 알지도 못하던 먼 친척 아저씨가 돌아가시면서 뜬금없이 엄청난 유산을 물려주는 등 금전적 이익을 챙길 수 있는 행운이라면 더욱 좋겠지만, 누군가에게 큰 도움이 되어 가슴 뿌듯한 경험을 주는 행운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제게도 그런 행운이 딱 한 번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시골에 살던 사촌누나가 서울 저희 집에 와있을 때의 일입니다. 말썽쟁이 사촌누나는 고모의 딸이었는데 하라는 공부는 않고 맨날 땡땡이만 치더니 대학에는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집에서 뒹구는 신세가 됐습니다. 애당초 사촌누나의 학문적 성취(?)에 전혀 기대가 없었던 고모는 간호조무사를 해보라고 서울에 있는 학원에 강제로 등록시키고, 사촌누나의 외할머니 집이었던 저희 집에 동거인으로 앉혔습니다. 적성이 맞았는지 다행히 사촌누나는 학교 다닐 때와는 달리 빼먹지 않고 학원에 잘 다녔습니다. 다만, 남자들에게는 관심이 좀 많았던 것 같습니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라, 집전화로 사촌누나를 찾는 남자들이 종종 있었던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다음 해 설날에 매년 하듯이 할머니가 계신 저희 집에 고모들을 비롯한 친척들이 모였습니다. 적당히 풀어진 명절 분위기에 웃고 떠들며 먹고 마시고 있었는데, 사촌누나가 재미있는 일이 있으니 들어보라며 모두를 조용히 시켰습니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어 읽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듣다 보니 그건 분명 당시 한창 뜨던 유행가 가사였습니다. '무작정 당신이 좋아요. 이대로 옆에 있어 주세요.' 하는 깔끔하고 청량한 유행가로, 미스코리아 출신 신인 가수가 불렀던 가요였습니다. 그 편지는 유행가 가사 뒤에 붙은 한 남자의 이름으로 끝났습니다.

다들 유행가 가사임에는 눈치챘지만, 저 인간이 갑자기 유행가 가사를 왜 읽었는지 의아해했고, 또 ‘이게 뭐가 재미있다는 거지?’ 하는 약간은 썰렁한 분위기가 됐습니다. 그러자, 사촌누나는 어제 길에서 만난 한 남자가 주고 간 연애편지라고 읽었던 편지의 정체를 공개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재미있다기보다는 ‘별 싱거운 놈’하는 정도의 반응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단 당사자인 누나부터 진지하지 않았으니까요. 저는 나름 감동하여 나중에 어른이 되면 저런 작전을 한 번 써먹어볼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긴 합니다.


아마, 몇 주 후였나 봅니다. 멀쩡히 학원을 잘 다니던 사촌누나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습니다. 집에도 안 들어오고 학원에도 안 나가고 연락도 없어 도무지 행방을 알 수 없었습니다. 다급히 시골에서 고모도 불려 올라왔고, 대책회의 끝에 내린 결론은 ‘남자와 바람이 나서 가출했다’였습니다. 결론은 결론이고, 어디 사는 어떤 놈인지 정체의 끄나풀도 없으니 찾을 길은 없고 해서 고모를 비롯하여 모두들 애만 태우고 있었는데..

저는 문득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자와 바람이 났으면, 혹시 ‘그 사람’은 아닐까 하는 순진한 상상 말입니다. 그 유치한 연애편지를 주고 간 남자를 떠올린 거죠. 
문제는 그 사람의 이름마저도 기억이 안 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자세히 들어둘 것 하는 후회와 함께 억지로 쥐어짜자 비슷한 것 같은 이름이 하나 희미하게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저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떠오른 그 이름을 당시 집집마다 중요 자산으로 보유하던 전화번호부에서 찾기 시작했습니다. 맞는지 틀리는지는 몰라도 그 이름의 동명이인은 전화번호부에 수십 명이나 있었습니다. 한숨만 쉬는 어른들을 옆에 두고 저는 그 이름으로 등록된 전화번호들을 위에서부터 힘차게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확률이 굉장히 낮은 게임이었습니다. 이름이 틀렸을 수도 있었고, 집전화가 자기 이름으로 되어있지 않을 수도 있었고, 설사 누나를 데려간 그 남자의 집이었다 해도 그런 여자가 없다고 잡아뗄 수도 있는 일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딱 3번 만에 바로 그 누나가 기적같이 제 전화를 받았습니다. 저는 ‘고모! 누나 찾았어’ 하고 의기양양하게 외치며 옆에 계시던 고모에게 수화기를 넘겼습니다. 사촌누나는 금방 잡혀왔고, 고모한테 질질 끌려서 시골로 내려갔습니다. 모양 사납게 끌려가기는 했어도 끝은 해피엔딩이었습니다. 생각 외로 사촌누나를 꼬셔간 그 남자는 괜찮은 사람이었고, 이미 도장(?)이 찍혔다고 판단한 고모는 서둘러 둘을 결혼시켰습니다.


그 일로 제가 칭찬을 받았냐고요그날 주소를 확인하자마자 모두들 사촌누나를 잡으러 달려 나가는 바람에 그 기막힌 작전을 성공시킨 저의 공로는 그냥 그대로 묻혀 버렸습니다그 후로도 쭈욱... 주인공과 조연들이 모두 시골로 바로 내려가서 촬영지가 바뀌었으니 카메오처럼 한 신만 등장하여 임팩트 있는 연기를 선보인 저는 단역 연기자처럼 다시 등장할 기회 없이 바로 드라마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여자의 행실에 관한 것이라 이후에도 그때 일을 입에 올리는 자체를 할머니나 고모나 부담스러워하셨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저란 인간은 생색내기에 약하고 지 밥값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처지라 옆구리 찔러서 절 받기도 할 줄 몰랐으니까요그래도 해피엔딩이었고살면서 추억할 수 있는 행운 하나를 남겨 주었으니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 할까요?


2020년 6월 23일

묵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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