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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묵 Jul 01. 2020

딸, 생각만 해도 입꼬리가 올라가는

혹시나 추억이 잊히기 전에 

저는 외동딸을 키우고 있습니다. 타고난 제 인생 모토가 '가늘고 짧게'라 아이도 하나만 낳기로 결혼하면서 아내와 합의한 결과입니다. 물려받은 혹은 물려받을 재산이 전혀 없다는 점, 저의 경제적 능력이 탁월해질 가능성이 없다는 점과 부모님에 대한 부양의무에서는 자유롭지 못하지만 자식에게 노후를 기댈 수 있는 세대는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여 자식을 딱 하나만 두기로 한 결정이었습니다. 물론 주변에서 또는 TV에서 귀엽고 예쁜 아기들을 볼 때마다, 딸이 외롭다고 징징거릴 때마다 하나 더 낳을까 하는 고민은 많이 했었습니다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습니다. 사실 지금도 나중에 저나 집사람에게 일이 생기면 딸이 혼자 감당해야 할 황망함이 걱정되기는 합니다만, 이제는 늦은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딸 하나로 끝낸다고 했을 때 어머니의 반응이 걱정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디서 받아오셨는지 저의 점괘가 '아들을 낳으면 수명이 짧아진다'라서 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아들 하나 더 낳으라는 독촉을 절대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보다는 아들만 넷을 두신 어머니가 고생 끝에 '아들놈들 다 소용없다'는 경험을 얻으신 탓에 장남이 자식 하나로 끝냈는 데도 서운하지 않으셨는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대신,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 한 분에게 딸 하나만 낳았다고 야단을 맞은 적은 있었습니다. 자식은 '장수의 화살'인데 하나 가지고 어찌 인생의 전쟁터에서 버틸 수 있겠냐는 성경적 말씀에서 나온 야단이었습니다. 물론 그때도 노력해보겠다는 답으로 자리를 모면하고는 끝이었습니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는 게 딸이 부족함 없이 자라는 데 유리하고 저희 부부의 노후 준비에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은 크게 흔들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 딸을 저와 아내는 애지중지 키웠습니다. 금지옥엽까지는 아니더라도 불면 날아갈까 만지면 부서질까 노심초사했습니다. 아기 때는 편도에 생긴 염증으로 인한 고열 때문에 한밤이고 새벽이고 응급실에 실어 나르기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한 번은 응급실 간호사가 마른 수건으로 열을 내리는 마사지를 해주고 있었는데, 딸이 응가를 한다고 하는 겁니다. 손바닥에 받혀 안고 화장실에 가는 도중에 딸이 제 손바닥에 싸버리고 말았습니다. 걱정이 앞선 탓이었는지 아무런 냄새도 안나더군요. 툭하면 걸리는 감기에 소아과에 하도 자주 데려가는 바람에 급기야 항생제 내성도 생겼습니다. 저녁을 먹다 딸아이가 참치캔에 손가락을 벤 날은 제가 어떻게 딸아이를 안고 병원까지 뛰어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다음 날 참치회사에 전화를 걸어 참치캔 때문에 우리 딸 죽을 뻔했다고 격렬하게 항의한 덕에, 고객 케어 담당자가 참치 한 박스를 들고 사과하러 집에까지 오기도 했습니다.


심심하다고 졸라대는 딸을 위해 온몸으로 놀아준 건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였습니다. 늦게 퇴근하고 온 날도 딸이 그만하자고 할 때까지 제 몸으로 비행기 태우고, 그네 태우고, 미끄럼틀 태우고, 시소 태우다 보면 녹초가 되기 일쑤였습니다. 제가 해주는 놀이 중에 딸이 가장 좋아했던 건 제가 온몸으로 딸을 감싸 안고 딸이 자기 힘으로 빠져나가도록 가둬두는 감옥놀이였습니다. 적당한 힘 조절로 딸이 겨우 빠져나가도록 해줘야 하기 때문에 난이도가 상당히 높은 놀이였습니다. 제가 힘을 너무 많이 주면 빠져나가는데 실패한 딸이 이빨 자욱이 나도록 제 팔뚝을 물기도 했습니다. 좀 커서는 나가서 노는 일이 많았습니다. 남들이 아들하고 하듯이, 저는 딸하고 축구하고 야구하고 배드민턴 치고 탁구 치고 놀았습니다. 주말이면 몇 시간씩 같은 놀이를 반복해도, 늦게 퇴근한 평일에는 최소한 이삼십 분씩은 딸을 위해 남겨두어야 했어도 그냥 좋았습니다. 딸을 보고만 있어도 딸이 저를 쳐다만 봐도 몸이 나른하게 행복했고, 밖에 있다 딸 생각만 해도 아니 딸이라는 단어만 만나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던 딸은 6학년이 되면서부터 갑자기 변했습니다. 아빠가 근처에만 가도 싫어하게 된 겁니다. 늘 하던 대로 엉덩이 토닥한 날 저는 '아빠! 변태야?'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날 다 큰 딸을 잘못 대한데 대한 무안함에 연신 사과를 했지만, 뒤이어 밀려온 섭섭함은 제 가슴 한편에 비수처럼 박혔습니다. 아내가 친척 결혼식 때문에 고향에 내려가 돌아오지 않은 어느 주말에 딸은 전화에 대고 울었다고 합니다. 아빠하고 단 둘이 있는 밤이 무섭다고. 며칠 지난 뒤에 저는 그 말을 아내에게서 듣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다 못해 울고만 싶었습니다. 딸과의 관계가 왜 이리되었는지 며칠을 고민해도 답을 찾을 수 없었던 제게 아내가 준 답은 '사춘기'였습니다. 이해하고 기다리라는 말을 머리는 들었지만, 가슴은 이해할 수 없어 딸의 얼굴을 한 동안 보지 못했습니다.


딸은 돌아왔습니다. 어릴 때처럼 몸으로 놀지는 못하지만, 저는 이제 딸과 다정하게 통화하고 톡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지가 아쉬우면 딸은 코맹맹이 애교도 보여줍니다. 지 학비 대느라 무리한다고 생각하는지 부모의 노후를 걱정하고, 병원이 부실한 르완다에 혼자 살고 있는 저의 안부를 매일 묻습니다. 아빠를 닮아 무딘 인간이라 기념일 챙기는 일에는 빵꾸내기 일수이고, 아빠보다 남자 친구와 통화하는 시간이 길어도 이만하면 아빠에게 잘하는 딸이라 자부할 수 있겠습니다. 술 마시지 말라고 잔소리하고, 아빠의 운전을 걱정해주고, 가끔씩 아빠를 사랑한다 해주는데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이제 제게 남은 건 딸이 남의 사람이 되기 전에 딸의 얼굴을 매일 보며 헤벨레하는 일상의 즐거움을 한껏 누리고, 나중에 늙은이의 삶을 지탱해주도록 딸과의 추억거리 하나라도 더 만드는 일이라고 다짐해봅니다.


2020년 7월 1일

묵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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