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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묵 Jul 08. 2020

문상할 수 없었던 두 번의 장례식

죄책감과 두려움 속에서

나이를 먹어가다 보니 죽음을 대할 일이 점점 많아집니다.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도 저는 어린 시절부터 꽤 많이 경험했습니다. 상주로서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셨고, 물놀이에서 사촌동생을 잃었습니다. 폐암으로 돌아가신 같은 부서 과장님, 명예퇴직하자마자 위암으로 돌아가신 같은 본부 선배님, 노환으로 가신 고모부가 계셨고 친구들과 동료들의 부모님들도 많이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숱하게 겪으면서 부음에 익숙해진 저에게도 도저히 문상할 수 없었던 죽음이 둘 있습니다.


한 분은 신입사원 시절 처음 본사에 올라와서 모셨던 부장님이셨습니다. 당시 부서의 총인원은 부장님 포함 6명이었습니다. 시험으로 부장을 뽑던 시절이라 공부하느라 거의 사무실에 안 오셨던 최고참 선배, 차석 역할로 수표와 지출 업무를 하셨던 과장님, 전산과 자료를 담당했던 여직원 두 분에 막내로 제가 있었습니다. 술을 몹시 좋아하셨던 부장님은 역시 술을 좋아했던 저의 합류를 무척 반기셨습니다. 여직원들과는 술을 마실 수 없었고, 술을 못 마셨던 과장님들은 술자리를 즐길 수 없는 형편이라 부장님은 총각에 술까지 제법 마시는 저를 좋은 술 동무로 생각하셨습니다.


1차로 공식 회식이 끝나면 다들 돌려보내고 부장님과 저는 사무실 일대를 밤새 헤매고 다녔습니다. 부장님과 저에게는 1차 공식 회식은 좋은 안주로 배를 채우고 소주로 적당히 위장을 달래는 본격적인 술자리를 위한 준비 단계였습니다. 2차는 맥주와 골뱅이나 참새구이로 1차에서 먹은 음식들을 입가심하고, 3차에서 본격적으로 막창이나 회로 소주를 달렸습니다. 그러고도 아쉬워서 4차는 카페에서 다시 양주로 부족한 알코올을 보충했습니다. 다음 날이 없는 사람들처럼 새벽까지 달리기 일쑤였습니다. 물론 다음날 숙취에 골골대다 못해 다 죽어가던 저와는 달리 부장님은 잠도 거의 안 주무시고 7시 이전에 일착으로 사무실에 도착하시고는 했습니다. 그 위장의 능력을 저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는데, 오히려 부장님은 젊은 놈이 약해 빠졌다고 저를 나무라셨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부어라 마셔라 밤을 함께 보내던 어느 날은 3차에서 취해버린 부장님을 택시로 댁까지 모셔드렸습니다. 내심 부장님 댁에서 4차를 마치겠구나 하는 색다른 기대감에 들떠 있던 저는 그날 몹시 당황스러웠습니다. 밤이 많이 늦기는 했지만, 그래도 남편의 부하 직원인데 저를 대하는 사모님의 태도가 몹시 냉랭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술상을 봐달라는 부장님의 청을 단칼에 거절하신 것도 모자라 저에게 미소 한 번 띄우지 않으셨습니다. 그날 사모님은 제게 딱 한 마디 하셨습니다. :"우리 남편은 술 드시면 안 되는데... " 매일 같이 만취 상태로 귀가하는 남편과 그 술 동무에 대한 원망이겠거니 생각했지만, 사모님의 걱정스러운 눈빛과 말투를 몰라볼 만큼 제가 둔하지는 않았습니다.


다음 날 회사에서 다시 만난 부장님은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역시 7시 전에 출근하셨고, 골골대던 저를 나무라셨지요. 그러나, 어제 사모님이 하신 말씀이 마음에 걸린 저에게 부장님의 얼굴은 달라 보였습니다. 부장님 얼굴이 상당히 까맣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된 것입니다. 부장님의 입에서 냄새도 심하게 난다는 사실도 새삼스럽게 다가왔습니다. 주변에 물어보니 그 정도면 간이 상당히 손상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부장님과 3, 4차까지 마시는 술자리는 1년 넘게 계속됐습니다. 술자리마다 조금씩 걱정되는 마음은 있었고, 사모님이 부담스러워 다시는 부장님 댁에까지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만 술자리 자체를 끊지는 못했습니다.


그다음 해 저는 다른 부서로 자리를 옮겼고 임원으로 승진하신 부장님은 지방으로 내려가셨는데, 저는 그게 그분과의 마지막인 줄 정말 몰랐습니다. 내려가신 지 1년이 조금 지났을 때 제가 부장님의 부음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간암 말기로 손을 쓸 새도 없이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부음을 듣고 저는 머리가 아득해졌습니다. 말기 암 부장님의 간에 제가 부어드린 소주가 한 트럭은 될 것이고, 사모님의 걱정 어린 눈빛을 본 후로도 계속 같이 술을 마셨다는 죄책감이 저를 짓눌렀습니다. 부장님께 대한 죄송스러운 마음에 더하여, 간이 망가진 부장님을 계속 술 드시게 한 원수가 된 저는 차마 사모님을 뵐 수가 없어 문상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문상하지 못한 또 다른 죽음은 친구의 죽음입니다. 군대 친구였는데 서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 살았던 관계로 제대하고도 자주 어울렸습니다. 둘 다 복학을 준비하고 있던 터라 시간도 많았고, 같은 기수의 군대 동기라 술자리에 앉으면 할 말도 많았기에 제대 후에 더 막역해진 친구였습니다. 한 달에 한 번쯤은 만나서 당구치고 술 마시고 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얼굴도 가물가물하지만...


어느 날 밤늦게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전화선 건너 낯선 목소리의 젊은 청년은 본인을 그 친구의 형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친구 형이 왜 일면식도 없는 제게 전화했는지 의아해할 틈도 없이, 친구 형은 친구의 부음을 알렸습니다. 친구가 운전 중에 사고를 당해 즉사했다고 했습니다. 수첩에 번호가 있길래 친구인 것 같아서 알려주는 게 도리라 전화했다고도 했습니다. 내일이 발인이니 올 수 있으면 와달라고 했습니다. 


그의 죽음을 전해 듣는 순간부터 저는 멍해져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스물셋 젊음이 그렇게 쉽게 꺾인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습니다. 자리에 누워 한참을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몇 시간이나 지나 있었습니다. 친구의 마지막을 보러 가야지 했는데 장례식장도 기억이 안나는 것이었습니다. 핸드폰도 아닌 집전화 시절이라 친구 형의 전화번호가 없어 친구 집으로 전화를 해야 되는 상황이었는데 차마 그 집으로는 전화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러면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때는 친구의 죽음을 확인하는 것조차 두려웠고, 친구가 누워있는 장례식장의 위치를 묻는 것도 끔찍했습니다. 다시 멍하니 누워 뒤척이다 그 밤을 보냈고 결국 친구의 마지막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많이 후회했습니다. 죄송스러운 자리라도, 두려운 자리라도 회피하지 않고 그 마지막들을 함께 했어야 하는데 하고 말입니다. 그 이후 누구의 문상을 가든 그 두 죽음은 저를 계속 따라다녔고 마음속의 짐은 줄어들 줄 몰랐습니다. 하지만, 또다시 그런 일을 당한다면 제가 그때와 다르게 행동할지 자신이 없습니다. 지난 경우들처럼 제가 일조한 죽음이나, 남의 일 같지 않은 제 나이 또래의 죽음을 다시 맞는다면 저는 또 피하고 싶어 질 것 같습니다. 죽음에는 특히 이런 죽음들에는 도무지 무뎌질 수 없을 것 같으니까요.


2020년 7월 8일

묵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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