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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묵 Jul 11. 2020

시체를 만져본 적이 있는지...

군대에서 시체 지킨 이야기

저는 시체를 만져본 적이 있습니다. 의대생도 아니었고 장례식장에서 일해본 경험도 없었던 제가 시체를 만진 건 군에 있을 때입니다. 오랜 세월이 지냤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때의 느낌은 제 손끝에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1억을 준다 해도 두 번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경험입니다.


저는 사단 직할 전차대대의 본부 중대에서 군수 요원으로 근무했습니다. 입대 시 960 주특기를 부여받고 본부 군수과에서 전차 정비 자재와 공구의 불출을 담당했습니다. 당시 전차대대는 전투에 투입되는 2개 전차 중대와 지원적 성격의 본부 중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본부 증대 안에는 제가 속한 군수과 외에 지휘, 작전, 인사, 운송, 취사, 의무, 통신과가 있었습니다. 본부 중대의 역할은 평소 각기 주특기대로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본연의 임무 외에, 대대 내에서 벌어지는 온갖 잡일에 투입되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이 벌어진 건 제가 일병 초임 때쯤이었습니다. 전차 중대의 신병 하나가 자살을 한 것입니다. 논산에서 주특기 훈련을 받고 자대에 배치된 지 몇 달 되지 않았던 신병은 야간 보초근무 중 자기 목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신병이 자살한 이유는 여자 친구가 헤어지자는 편지를 보내온 탓이었습니다. 여자 친구가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지만 버림받은 신병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지금처럼 외부에 쉽게 전화를 걸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고, 갓 전입 온 형편이라 휴가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도 없는 먼 후일의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아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과 절망 속에서 며칠을 헤매다 보초근무 중 자살했던 것 같습니다.


죽은 신병을 위하여 사단 보급대에 빈소가 차려졌습니다.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갔지만, 군인도 다른 물품들처럼 보급하고 반납한다는 무모한 사상이 깔려 있었나 봅니다. 하여간 시체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본부 중대 인력들이 차출됐습니다. 누가 훔쳐갈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민간인의 장례식처럼 조문객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조문객을 대신하여 인력들을 풀어놓아 첫날밤 장례식장이 쓸쓸하지 않게 하자는 의도였던 것 같습니다. 소주가 몇 박스나 공급됐고, 한 마리를 통째로 잡았는지 돼지고기도 풍족했습니다. 원래 술을 좋아했고, 일병 시절 먹을 것에 항상 굶주려 있던 저에게는 그런 횡재가 따로 없었습니다.


밤이 늦자 장교들과 부사관들이 모두 퇴근하고 죽은 신병 옆에는 차출된 중대본부 인력들만 남았습니다. 얼굴도 모르고 말 한 번 섞어 보지 않은 신병을 애도하는 분위기는 몇 분만에 지나갔고, 아무도 간섭하는 이 없는 가운데 저희들끼리 부어라 마셔라 하는 잔치 같은 술판이 벌어졌습니다. 나중에는 병풍 뒤에 죽은 신병이 누워있다는 사실을 잊을 만큼 만취하여 모두들 웃고 떠들다 여기저기로 나가떨어졌습니다. 당시 저는 두주불사를 자랑하던 팔팔하던 시절이었고, 모처럼 삶은 돼지고기를 풍성히 먹은 터라 쓰러지지 않고 용케 버티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일병이라 계급상 다른 선임들에 비해 더 긴장하고 있었던 탓인지도 모릅니다.


다들 나가떨어지거나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던 터라 어떨 수 없이 혼자 술을 마시던 저는 대화 상대가 없자 자연스럽게 신병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스물이나 스물 하나의 어린 나이에 겨우 여자 친구 문제 때문에 세상을 등지다니 한심하면서도 불쌍했습니다. 장례식 첫날 부모님도 도착하지 않으셨고,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여자 친구는 이미 자신을 잊고 단잠을 자고 있을 텐데, 불쌍하게 죽은 신병은 일면식도 없는 동료들의 술판 바로 옆 병풍 뒤에 차갑게 누워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쓸쓸한 그의 마지막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서러웠습니다. 주제넘은 감정이입은 분명히 술기운 탓이었던 것 같습니다.


불쌍한 신병의 신세에 대한 동정을 안주삼아 자작하던 저는 급기야 관 속에 누워있는 그를 만나러 병풍 뒤로 돌아갔습니다. 깨끗이 씻은 그는 관 속에 평화로이 누워있었으나 목 밑에 있어야 할 총알이 들어간 구멍은 보이지 않았고, 총알이 튀어나왔을 뒤통수는 똑바로 누운 터라 역시 볼 수 없었습니다. 신병은 마치 자는 것 같았고, 저는 자는 신병을 깨우러 온 불침번 같았습니다. 한참을 신병의 시신을 내려다보던 저는 '부디 잘 가고 그 세상에서는 여자 없이도 행복하라'라고 신병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래도 아쉬웠던 저는 신병의 이마를 한 번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후회했습니다. 장례 중인 시체를 만진 게 도덕적으로 옳은지도 꺼림칙했지만 손끝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이 몸서리치게 선명했기 때문입니다. 급하게 손을 떼고 뒤돌아 나왔지만, 그 섬뜩했던 차가운 느낌 때문에 술맛이 떨어져서 저도 동료들 틈에 끼어 억지로 잠을 청했습니다.


다음날 오전 내내 숙취의 고통의 시달리던 제 머리에는 어젯밤 관속의 누워있던 신병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날씨였지만, 저는 추웠습니다. 그 순간에도 시체에 손을 대고 있는 것처럼 손끝에 차가운 느낌이 또렷하다 못해 온몸을 휘감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침 일찍 도착한 가족들이 시신을 확인하고 입관하는 절차를 진행할 때 저도 주변 경계에 참여해야 했는데 다리가 후들거려서 서있기조차 힘들었습니다. 술기운이었지만 분명히 만지기까지 했었는데, 이제는 대낮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둘러서 있었지만 멀리서 조차 시신을 쳐다볼 수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듯하자 저는 그 자리를 벗어나고 말았습니다. 화장실을 다녀온다는 핑계로 도망하여 식이 끝날 때까지 복귀하지 않았습니다.


한 두어 달은 밤마다 관 속의 신병의 시신이 떠올라 야간 보초를 서는 일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습니다. 혼자서는 절대로 어두운 곳에 가지 않았으며, 그 이미지를 잊어버리기 위하여 온갖 상상으로 머릿속을 바쁘게 했습니다. 결국 떨쳐버리고 평온한 일상으로 복귀하기는 했습니다만, 시신을 만진 데 대해서는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후회했습니다. 복학하여 등록금과 용돈을 마련해야 되는 절박한 사정에서도 어렵게 들어온 대학병원 시신 닦는 아르바이트 제안도 단칼에 거절했었으니까요.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뀔 만큼 긴 시간이 흘렀지만, 그때 그 손끝의 차가운 느낌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두 번 다시 해보고 싶지 않은 섬뜩한 경험이었습니다.


2020년 7월 11일

묵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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