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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묵 Jul 15. 2020

올인 세 번의 기억

실패한 고스톱 인생

저도 고스톱을 칠 줄은 압니다. 하지만 절대로 잘 친다는 소리는 하지 않습니다. 명절에 동생들과 모이거나 친구들과 1박 2일로 놀러 가서도 주도해서 고스톱 자리를 만들지도 않고, 만들어진 자리에 끼어 앉지도 않습니다. 남들 만큼은, 아니 정확히 표현하면 중간 정도는 가는 실력이라고 생각했던 게 철저한 제 착각이었음을 깨우쳐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짧았던 저의 고스톱 인생을 깔끔하게 접게 만든 세 번의 대형 사건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사건은 군 제대 후 복학하기 전에 학비를 벌기 위하여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회계사 사무소에서 회계 보조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인심 좋은 대표 회계사님 덕택으로 당시로서는 꽤 괜찮은 급여를 받았습니다. 대학을 야간으로 돌리고 계속 근무하자는 제안도 있었던 것을 보면 저를 정직원으로 채용하기 위하여 일부러 좋은 대우를 해주셨던 것 같습니다. 머리는 뛰어나지 않아도 성실과 근면 그리고 고분고분한 저의 심성을 좋게 보신 덕택일 것입니다. 그분의 섣부른 판단이었음을 이제 와 고백합니다. 고분고분한 사람이 아니라...


어느 급여일에 소속 회계사 한 분이 과천에 집을 사서 이사 간 집들이를 했습니다. 저녁을 맛있게 먹고는 바로 고스톱 판이 벌어졌습니다. 월급을 현금으로 받던 시절이라 주머니에 넉넉히 채워진 돈봉투도 있으니 조금 잃어도 되겠다 싶어 저도 끼어들었습니다. 아마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고스톱 몇 판에 월급을 몽땅 날려버렸던 것입니다. 판마다 광박에 피박을 뒤집어썼더니 판돈이 크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제 월급봉투에는 천 원짜리 몇 장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뒤늦게 후회하며 멍하니 앉아있던 제게 돈을 많이 땄던 집들이 주인공이 깨평을 조금 줬습니다. 전부를 돌려주면 그 실력에 다시 또 고스톱 판에 끼어들지도 모르니 교훈이 필요하다면서 일부만 준 것입니다. 다시는 고스톱을 치지 말라는 교훈이 진짜 깨평이었던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처형 부부와 1박 2일로 서해안에 놀러 갔을 때였습니다. 저녁을 맛있게 먹고는 할 일도 없으니 고스톱이나 한 판 치자는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저희 집 사람까지 넷이서 시작했는데 저희 부부가 일방적으로 털렸습니다. 백 원짜리를 놓고 친 고스톱이라 잃은 돈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만, 기분은 나빴습니다. 재미로 친 건데 재미도 잃고 돈도 잃었으니까요. 제 안색이 변하는 걸 보신 형님은 고스톱 판을 접으셨습니다. 그러고는 슬며시 한 마디 했습니다. '어디 가서 고스톱 치지 마소'.


마지막 사건은 얼마 뒤 회사 연수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당시는 회사의 교육이 지금보다는 설렁설렁이었고, 밤에는 술을 마셔도 크게 나무라지 않은 분위기였습니다. 교육개발 목적 반 업무에서 벗어나 머리를 식히라는 배려 반인 연례행사성 교육도 꽤 있었습니다. 당시 제가 참석했던 교육은 일주일 정도 진행됐습니다. 하던 대로 전국에서 모인 직원들이라 얼굴이 익숙하지 않았던 첫 날밤을 제외하고는 이방 저방 모여서 매일 밤 술판이 벌어졌습니다. 매점에서는 술을 무한정으로 팔았고 전화만 하면 연수원 근처 통닭집에서 안주를 득달같이 배달해주는 데다 집에 갈 걱정이나 술 마셨다고 마누라 잔소리 들을 걱정도 없으니 다들 편하게 술을 마셨습니다. 수요일인가 목요일인가는 술을 마시다가 누군가 고스톱이나 한 번 치자는 제안이 나왔습니다.


술이 오른 저는 앞의 두 번의 사건을 까맣게 잊고 다시 또 고스톱 판에 끼어들었습니다. 이번에는 다르리라 하는 무모한 도전정신으로 무장하고 그날 잃어야 할 한도라는 리스크 대책까지 지참하고 나섰던 저는 역시 또 돈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저는 제가 정해놓은 한도도 채우지 못한 채 고스톱 판에서 쫓겨났습니다. 돈을 잃는 게 문제가 아니고 제가 고스톱 판을 엉망으로 만든다고 제일 직급이 높았던 선배 한 분이 확 짜증을 냈기 때문입니다. 고돌이를 벼르는 사람에게 고돌이 패를 내주고, 왕 하나만 먹으면 나는 사람에게 왕을 내주고, 앞에 지나간 화투패를 계산하지 못하고 마구 던지는 바람에 여기저기 똥을 싸놓는 저와는 같이 못 치겠다고 대놓고 성질을 낸 것입니다. 쪽팔린 저는 고스톱 판에서 조용히 물러났고, 역시 그날로 인생의 고스톱 판에서도 영원히 물러났습니다.


뼈아프지만 귀중한 세 번의 교훈이았습니다. 안 그랬으면 어설픈 승부욕에다, 관리 안 되는 포커페이스에다, 둔한 게산 실력으로 똘똘 뭉친 제가 패가망신하는 큰 실패를 경험할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요.


2020년 7월 15일

묵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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