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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묵 Aug 26. 2020

그게 성희롱이었을까

어디 가서 묻지도 못한 사연

원래 겁이 많은 사람이라, 회사에서 짤리면 먹고 살 대책이 없는 사람이라, 그리고 딸을 키우는 사람이라 저는 직장 내 성희롱이나 성추행 문제에 대해 항상 조심하며 살아왔습니다. 상대에게 불쾌감 혹은 수치심을 느끼게 하거나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려서 저 스스로 곤란과 불이익을 겪지 않도록 행동을 조심했습니다. 펜스룰처럼 여직원들에게 고의적인 경계를 치지는 않았지만, 의심의 가능성을 절대적으로 피하기 위하여 여직원과 같이 있을 때는 손가락과 눈길이 함부로 움직이지 않도록 신경을 곧추 세우는 습관을 들였습니다. 사단이 주로 생기는 밤 회식자리에서도 혹여 의도치 않은 부주의로 실수하지 않도록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현재까지는 성적인 행동으로 문제가 된 적이 없으니 그릇된 처신을 해온 건 아닌 것 같아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런 제게도 아찔하고 당황스러웠던 경험이 한 번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 봄 옆 부서에 신입사원들이 몇 명 배치되었는데, 대부분 여성들이었습니다. 저희 부서 직원들이 아니었고 제가 업무상 상대할 기회도 없었으니, 신경 쓸 일은 없었는데 제게 거슬렸던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신입사원들이 상당히 짧은 치마를 입고 출근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여성의 복장 특히 허벅지가 훤히 다 보이는 치마에 대해 논하는 일이니, 지적질하는 자체가 꼰대라고 찍히거나 아니면 성희롱으로 오해받기 딱 좋은 케이스라 모른척하고 지냈습니다. 제 신입사원 시절이었으면, 나이트에 놀라갈 때나 입는 옷이지 그게 어디 출근할 때 입을 근무복이냐고, 업무에 임하는 자세가 안되어 있다고 욕을 단단히 먹을 일이었다는 생각은 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무실과 사무실의 중앙 복도를 지나는데 제 앞을 걸어가는 신입사원 중의 한 명을 만났습니다. 그 신입사원은 그날 역시 무릎 위로 많이 올라가는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습니다. 저런 복장으로 의자에 앉으면 치마가 더 끌려 올려가 위험 수위까지 이를 테니 옆에 사람도 신경 쓰게 만들고 당사자도 움직이기에 상당히 불편할 텐데, 암만 생각해도 근무 복장은 아닌 것 같다고 혀를 끌끌 찼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마침 복도 반대편에서 그 신입사원이 속한 부서의 차장 한 사람이 복도를 걸어왔고, 앞에 가던 그 신입사원은 큰 소리로 '안녕하십니까?' 하고 씩씩하게 인사를 했습니다. 군기가 바짝 들은 신입사원의 긴장한 큰 소리 인사였는데, 문제는 90도에 가깝게 허리까지 숙였다는 데 있었습니다.


짧은 치마를 입고 상체를 크게 굽히니 치마가 위로 확 들려 올려져 버린 것입니다. 뒤를 따라가던 저는 그만 못 볼 것을 보고 말았습니다. 제가 얼마나 당황했던지요. 혹시 다른 사람이 그걸 본 저를 봤는지 걱정되어 얼른 뒤를 돌아봤는데 다행히 제 뒤에는 아무도 없았습니다. 그 신입사원이나 반대편에서 오던 그 부서 차장도 제가 뭘 봤는지는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몹시 당황스럽고 걱정이 됐습니다. 일부러 보자고 본 것은 아니었지만, 여성의 속옷을 본 것은 맞으니 그 신입사원이 제가 일부러 뒤를 따라와서 본 거 아니냐고 문제 삼아 따지고 들자면 대답하는 자체가 곤란할 것 같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후 며칠은 그 신입사원의 부서 근처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날 본 무늬와 색깔이 생각날까 봐 며칠 동안은 부서 여직원들과도 말을 섞지 않았습니다. 복도에서도 그 신입사원이 지나가면 일부러 뒤로 돌아가 시간을 벌었습니다. 더욱 조심하느라 모든 여성들 앞에서는 시선을 항상 상대 머리 위 15도를 유지하고자 애썼습니다. 아찔했지만, 이 일이 제가 성희롱과 성추행 문제에 대해 더 고민하고 조심하는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일로 다른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커가는 딸내미가 짧은 치마를 좋아하거든요. 학교에서, 또 나중에 취업해서 짧은 치마로 자신도 모르게 난감한 처신을 하거나 주변인들에게 불편을 초래할지도 모르니까요. 옷을 입은 당사자의 잘못은 아닌 게 분명하지만, 속옷을 그렇게 쉽게 보이는 것은 그리고 보여줬는지도 모르는 건 누구에게도 바람직한 일이 아닐 테니까요. 혹시 몰라 열심히 주의시키기고는 있습니다만, 개인 취향이라는 딸내미의 주장에는 제가 뭐라 반박할 말이 없어 답답합니다. 아무래도 그날 본 것을 딸내미에게만은 얘기해줘야 할 듯합니다. 고집 센 딸내미가 제 의견을 받아들일 리는 만무하지만 조금이라도 참고하도록 말입니다.


2020년 8월 26일

묵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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