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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묵 Nov 14. 2020

테니스 칠 때 드러나는 인간성

몇 명 안되는데 참 다양하네

제게 있어 르완다 파견 생활의 가장 큰 낙은 테니스입니다. 사는 곳에서 차로 5분 거리의 코트에서 연회비 12만 프랑, 우리 돈으로 약 15만 원만 내면 언제나 즐길 수 있는 테니스로 체력을 단련하고 한인들과 즐겁게 어울리고 있습니다. 한국에서와 달리 코트 예약이 용이하기 때문에 일 년에 서너 차례 정도 큰 비로 방해받을 때 외에는 주중 새벽 두 차례와 주말 오후에는 꼭 코트에 나갑니다. 5천 프랑만 주면 한 시간 동안 트레이닝해주는 코치와 천 프랑만 주면 공도 주워주고 음료 심부름도 하는 볼보이도 있어 귀족 테니스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게임을 같이 즐길 수 있는 한인 동회회가 있어 테니스가 더 재미있습니다. 평일에는 레슨으로 체력을 단련하고 기본기를 열심히 익힌 후 주말에는 동호회 회원들과 치열하게 대결을 즐깁니다. 모임에는 실력이 뛰어난 고수들도 있고, 이제 시작한 혹은 시작한 지 꽤 되었으나 실력은 아직도 제자리인 회원들도 있습니다. 같이 땀 흘리고 가끔씩 한식당에 몰려가서 시원하고 거품이 많은 르완다 맥주로 갈증을 해소하면 르완다에 영원히 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주말이 만족스럽습니다.


직접 게임을 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플레이하는 회원들을 지켜보는 일도 꽤 재미납니다. 개성들이 강하고 부지불식 간에 터져 나오는, 평소에는 보지 못하던 회원들의 상격들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고, 실수 후에 나오는 상대의 스스로에 대한 격한 자책 반응도 재미나고, 상대의 플레이에 살짝살짝 농을 얹어가며 견제하는 일도 꽤나 쏠쏠한 쾌감을 선사합니다.


저희 모임에서 최고의 개성꾼은 플레이와 해설과 중계를 같이 하느라 정신없는 L선교사님입니다. 본인이 코트에서 뛰면서도 항시 입을 다물지 않습니다. 현지인 코치를 심판으로 세우고 하는 게임인데도 본인이 직접 '인'이다 '아웃'이다 판정하고, 상대의 어이없는 플레이에는 어김없이 훈수를 두고, 머리 위로 넘어가는 볼은 발로 좇아가는 대신 입으로만 '넘아간다! 넘어간다!' 떠드는 식이라 이 양반이 참여하는 게임은 항상 시끄럽습니다. 제가 이 양반에게는 '입만 다무시면 게임에서 이길 확률이 두 배는 된다'라고 놀립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는 '인싸'이고 옛말로는 같이 있으면 즐거운 분위기 메이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최고의 실력에도 실력 차이가 크게 나는 하수들의 도전을 웃는 얼굴로 받아주는 P선교사님도 있습니다. 제가 르완다에 거주하는 지난 3년 반 동안 이 분이 성내는 것 혹은 인상 찌푸리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분은 웃는 얼굴로 시작한 게임에서도 실력차가 나는 상대를 절대로 봐주는 일이 없는 승부사입니다. 상대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여 경기를 순식간에 끝내고는 '땀도 안 났다'라고 진담 반 농담 반 '끝내기'를 던지는 이분은 게임에는 치열하고 스마트하지만 온화한 얼굴과 부드러운 말씨를 잊지 않는 코트 안과 밖의 신사입니다.


실수할 때마다 누군가에게 욕을 퍼붓는 K사장님도 있습니다. 자신한테 하는 욕인 것 같기는 한데 옆에서 듣기에는 아슬아슬합니다. 본인 말로는 평소에는 절대로 욕을 하지 않지만 테니스 칠 때와 운전할 때만 입이 거칠어진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도 일상생활에서는 베풀기 좋아하고 어울리기 좋아하는 상냥하고 젠틀한 성격이 맞습니다. 이 양반도 게임할 때 달고 사는 욕만 자제하면 코트에서도 신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아한 동작과 기합으로 모든 볼을 부드럽게 쳐 넘기면서 상대를 질리게 하는 C이사님도 있습니다. 나이도 그렇고 가입 순서도 막내인데 구력에 비해서는 꽤 노련한 플레이를 보여줍니다. 다만, 실전에 들어가면 마음이 약해서인지 에러가 많습니다. 게임 때면 이 양반이 '아이고! 아이고!' 소리와 함께 에러를 유발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하고 냉정하지 않은 성격이 테니스에 그대로 드러나는 경우입니다.

 

인생은 꼭 한방인 것처럼 볼이 터져라 강력하게 스윙하는 바람에 실력이 모와 도에서 왔다 갔다 하는 K이사님도 있습니다. 실력은 분명히 월등한데 게임의 승률은 본인의 실력만큼 높지는 않습니다. 힘을 빼고 부드럽게 볼을 다뤄야 하는 순간에 있는 힘껏 때려 볼을 코트 밖으로 내보내거나 네트에 꼬라박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업무에서도 자질구레한 데 신경 쓰기보다 본인의 스타일을 중시하고, 이기는데 집중하기보다 한방의 쾌감을 즐기는 이 분은 상남자입니다.


분명히 최하수에 가까운데  모임에서나 플레이에서나 행동에 전혀 위축이 없는 C부사장님도 계시네요. 한국 같으면 택도 없을 일이지만 과감하게 최고수 P선교사님에게 대결 요청하는 일을 전혀 부담스러워하지 않습니다. 한 수 배운다는 입장으로 쿨하게 게임에 임하고 나서 경기 결과에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은 이 분의 삶과 테니스에는 분명 제가 배워야 하는 여유와 평화가 있습니다.


저는 어떤 스타일이냐고요? 모임에 합류한 초창기에는 미안하여 고수들의 눈치를 많이 보고 하수들에게 계속 이기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마음 약한 스타일이었습니다. 회원들과 많이 친해진 지금에는 '이기는 게 정의다'라는 그릇된(?) 신념으로 야비하게 몰아붙이는 편으로 좀 뀌었습니다. 고수에게서는 한 게임이라도 따기 위하여 코트 구석구석을 찌르는 연습을 피나게 하고 상대를 당황시키기 위하여 얍삽하게 아주 짧은 서비스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하수들에게는 집요하게 백핸드를 공략하고 스트로크를 길게 줬다가 짧게 줬다가 조절하며 상대가 스스로 나가떨어지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물론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게 운이 좋았다고 '럭키! 럭키'하는 추임새를 잊지는 않습니다. 학교 다닐 때 별명이 '놀부'였던 것처럼 깐깐하고 손해보지 않으려는 성격이 저의 테니스에 그대로 나오는 것 같습니다.


2020년 11월 14일

묵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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