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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묵 Dec 02. 2020

짧은 치마를 입지 말라면 잘못인가?

딸내미와 대화하다가 막힌 지점

세상이 하도 험악하니 딸내미가 조금만 늦게 들어와도 걱정이 됩니다. 조심한다고 아무리 조심해도 밤거리에 넘쳐나는 온갖 범죄자들과 정신 이상한 미친놈들을 다 피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외동딸을 둔 아빠로서 그 딸이 매일 밤 안전하게 집에 돌아오는 행복이 혹시나 깨지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게 저만의 입장은 아닐 것 같습니다. 특히 기성세대의 눈에는 너무 과감한 복장으로 딸내미가 외출한 경우에는 그 불안감이 크게 증폭되고는 합니다.


어제는 기어코 딸내미에게 한마디 했습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서 부모의 입장을 전하고자 했는데 받아들이는 딸내미에게는 걱정으로만 들리지는 않았나 봅니다. 

"오늘 치마가 좀 짧은 거 아니냐?"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래. 쓸데없는 참견하지 마!"

"쓸데없다니. 걱정돼서 그러지. 밤거리에 성폭행과 성추행 사고가 얼마나 많은데..."

"짧은 치마를 입었다고 성추행당하는 게 아니잖아!"

"그럴 위험이 높아지지. 밤에 짧은 치마를 입고 돌아다니면 위험하단 말이야."

"아빠는 여자들이 짧은 치마를 입기 때문에 성추행, 성폭행이 발생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밤거리에 야한 옷을 입고 다니면 아무래도 미친놈들이나 범죄자들을 더 부추기게 된다는 얘기지."

"그 얘기가 그 얘기지. 성폭행하고 성추행하는 남자들이 잘못이지, 짧은 치마를 고른 여자들이 잘못이야?"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자는 게 아니라 위험하다는 얘기를 하는 거잖아!"

"아빠는 밖에 나가서 그런 얘기 하지 마!"

"왜 아빠가 못할 소리 한 거냐?"

"그런 소리하면 성범죄를 피해자인 여자의 탓으로 돌리는 한남 소리 듣는다 말이야!"


제 말속에 성범죄를 피해자인 여자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뜻을 담을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는데 듣는 딸내미의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저는 단지 밤늦게 다니는 것 특히 너무 가벼운 복장으로 다니면 그렇지 않아도 위험한 범죄자들의 범죄 심리를 자극할 수 있다는 의도를 전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제 말의 어디서부터 그런 의도와는 다르게 딸내미에게는 피해자들의 책임을 묻는 논조로 다가갔는지 의아하기만 합니다.


아니면, 진짜 제 깊은 잠재의식 속에 성폭행이나 성추행 사건에 이를 야기한 피해자의 책임도 있다는 남성 편향적인 사고가 들어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정한 옷을 입어야 성범죄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줄어들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피해를 당할 위험이 높아지니 여성들이 복장에 주의해야 된다는 사고가 저의 머리 어딘가에 박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사고가 100% 잘못된 게 아니라는 생각마저도 딸내미는 문제가 있다고 주장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페미니즘을 논하자는 것도 아니고, 성범죄의 책임을 따지자는 생각은 더더구나 아니며, 그저 딸내미를 포함한 이 땅의 모든 여성들이 밤거리를 안전하게 오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뿐입니다. 여성에게 피해자의 책임을 묻는 범죄자의 입장에 서지 않으면서 이런 걱정과 바람만을 딸내미에게 어떻게 고스란히 전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됩니다.


2020년 12월 2일

묵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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