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도 변태, 말도 변태
갑자기 추워져서 저는 롱패딩으로 온몸을 둘둘 감싸고 다닙니다. 어느새 혈관 지표들이 슬슬 신경 쓰이는 나이가 된지라 찬바람을 조심하느라 장갑과 모자까지 잘 챙깁니다. 이런 저와는 달리 딸내미는 요새 정도의 날씨로는 별로 춥지가 않은가 봅니다. 대중교통에서 불편하다고 패딩도 입지 않고,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장갑도 끼지 않습니다. 아내와 번갈아 닦달을 해서 패딩은 겨우 입혔습니다. 하지만 장갑 끼기에 대해서는 도무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지난주에 내린 눈이 얼어 길 군데군데 얼음 지뢰가 만들어져 있어서 장갑 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니다 넘어지면 다칠까 걱정이 됩니다.
해서 요 며칠 집중적으로 장갑 끼기를 강조했습니다. 딸내미가 나갈 때 얘기하고 귀가할 때 얘기하고, 제가 출근하면서 얘기하고 퇴근해서 얘기하고, 전화로 얘기하고 카톡으로도 얘기했습니다. 말로는 알았다 알았다 하면서도 행동으로는 옮기지 않는 딸내미의 이상한 똥고집이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어제만 해도 대여섯 차례 넘게 장갑 끼라고 잔소리를 했던 것 같습니다.
어제 마지막 잔소리는 늦게 들어온 딸내미가 부츠를 벗는 현관 앞에서였습니다. 수그리고 있는 딸내미의 정수리에 대고 ‘왜 장갑을 끼고 다니지 않느냐’는 잔소리를 했지요. 그랬더니 딸내미가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끼고 나갔단 말이야. 잔소리 좀 그만해! 아빠는 변태같이 똑같은 소리를 도대체 몇 번이나 하는 거야?’
이제 장갑을 끼고 다닌다니 머쓱해져 찍소리도 못한 저는 TV 앞으로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이쁘다고 딸내미를 안고 엉덩이를 토닥토닥했다가 ‘아빠! 변태야? 어딜 만져!’ 하며 성질을 내곤 지 방으로 쏙 들어갔던 딸내미의 어린 시절 말입니다. 그때는 딸내미가 사춘기에 접어든 꼬마숙녀라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무심한 아빠가 변태 소리를 들어도 마땅할 실수를 했었지요.
어쨌거나 저쨌거나 딸내미한테 변태 소리를 두 번이나 들었네요. 만약 마누라한테 그런 비슷한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들었다면 며칠 삐져있을 판이었습니다. 그래도 딸에 대해서는 제가 끄떡없습니다. 오늘 밤에도 뭔가 다른 잔소리 거리 없을까 살피느라 딸내미의 일거수일투족에서 방심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저는 딸바보가 맞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될 만큼 딸내미가 다 커버린 것도 모르는 그냥 바보일까요?
2022년 12월 19일
묵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