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순간도 이겨냄의 순간도 불현듯 찾아온다

밴쿠버 여행기 프롤로그

by 신테판

정신의학과를 찾아간 이유는 최근 상실감을 크게 겪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살면서 짧게 상담을 받아본 적은 있지만, 꾸준히 약을 복용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만큼 이번 상실은 내 심장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와 여운으로 남아있다.


우울증 약 복용을 멈춘 지 3주 정도가 되었다. 이제는 머리의 욱신거림이나 어지럼증이 참을만한 수준이고, 일상에 미약한 불편함을 주는 정도다. 복용 기간은 고작(?) 3개월 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의 자율신경계는 그 작은 알약 한 알 한알들에 꽤나 의지하고 있었나 보다.


단약을 하게 된 계기는 우연이었다. 점차 상태가 호전되면서 의사는 약의 용량을 줄이는 것을 권했는데, 어느 날 내가 야근 때문에 진료 시간을 놓쳐 가지 못한 날이 있었다. 마침 나조차도 약을 끊어볼까 싶었기 때문에 그 계기로 며칠 동안 약 복용을 하지 않았고, 의사 선생님 또한 이참에 약을 끊어 보는 것은 어떤지 물으셨다. 나는 이제 다 회복되었나 보다 싶어 매우 기뻤다. 그러나 그날 이후부터 부작용 증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약을 먹는 동안은 정말 지낼만했다. 복용한다고 해서 기분이 막 좋아진다거나 하진 않지만, 다친 팔다리에 부목을 대듯 부러지고 찢긴 마음의 상처의 고통을 덜 느끼게 해 주었다. 심장에 마취주사나 진통제를 놓는 느낌이랄까. 복용을 처음 시작했을 때의 느낌이 아직도 선명하다. 불현듯 우울한 감정과 좋지 못한 충동들이 날 찾아올 때마다 뒷목이 저릿하는 경험을 했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내 감정의 멱살을 잡고 끌어올려주는 느낌이다.


상실의 시간이 어느덧 반년을 채워가고 있다. 약 복용도 다시 하지 않으려 한다. 상실도 예고 없이 찾아왔으니 극복의 기회도 찾아온 김에 잡으려 한다. 그래서 나는 멀리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곳은 바로 캐나다 밴쿠버다. 이제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상실을 극복하기로 했다.


여행 가기 하루 전, 짐을 챙기는 가장 설레는 시간에 아주 작은 배지 하나 때문에 눈물을 펑펑 쏟았다. 평소 여행을 가면 아주 작은 크로스백을 하나 가지고 다녔는데, 가방에는 과거 그 사람과 함께 삿포로 여행 중 어느 재즈바에서 받은 피아니스트의 배지가 달려 있었다. 배지를 보는 순간 그때의 포근한 마음과 그리운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왔고, 나는 청승맞게 캐리어에 짐을 싸다가 펑펑 울었다. 작은 배지 하나가 날 울릴 거라고는 상상이나 했을까.


마음을 추스르다 어릴 때 봤던 다큐멘터리 하나가 떠올랐다. 감독이 일본 시코쿠 섬에서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자신을 성찰하는 내용의 다큐멘터리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섬은 옛날부터 여자들이 남자한테 차여서 순례길을 걷는 곳이라 했던 기억이 있다. <남자한테 차여서 시코쿠라니>라는 제목도 참 흥미롭다.


이제 조금 후면 비행기를 타고 밴쿠버로 향한다. 문득 배지 하나에 울던 내 꼴을 보니 아직 상실감을 못 이긴 사연 있는 사람 같아 웃프기도 했다. "아, 나도 차여서 밴쿠버라니!" 남자한테 차여서 순례길을 걷던 여인들의 마음을 알 수도 없었고, 알고 싶지 않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