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 여행기 03
오랜만에 뒷목이 욱신 거렸다. 우울증 약의 단약 부작용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여행 도파민에 절여져 증상을 느끼지 못했는데 여행 중에도 부작용은 예고 없이 불쑥 찾아왔다. 이 증상은 언어로 표현하기가 정말 어렵다. 내 몸속 기압이 머리 쪽으로 순간 솟구쳐 올라 뒷목이 꽉 찬 느낌이 든다. 순간적인 이 느낌이 찾아오는 타이밍은 제 멋대로다. 일상에서 반복되면 굉장히 불편하다. 게다가 지금은 시차적응 실패로 수면도 부족한 상태라 반은 좀비 같은 상태인 것 같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행은 계속되어야 하기에 오늘은 그랜빌 아일랜드로 일찍 향했다. 버스를 타고 오래가지 않아 도착한 그곳은 아기자기한 볼거리가 많은 퍼블릭 마켓이었다. 맛있는 음식들을 파는 곳과 기념품 등을 파는 다양한 상점들과 예술 작품들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역시나 이곳에서도 진정한 의미의 모두(All)에게 열려있다는 안내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여행 중 납작 복숭아를 먹어보고 싶었는데 또 보이겠지 하고 사지 못한 납작 복숭아에 미련이 남는다. 역시 여행 중에는 뭐든 보일 때 결심해야 한다.
그중 기억에 남는 곳 중 하나는 기념품 샵이었는데 마그넷 등 아기자기한 제품을 괜찮은 퀄리티로 파는 곳이었다. 나는 여행지마다 가장 마음에 드는 마그넷을 하나씩 꼭 사 온다. 여행을 오래 추억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매우 신중히 고르는데 우연히 들린 그곳에서 마음에 드는 마그넷을 찾았다. 그것은 마침 어제 다녀온 잉글리시 베이를 배경으로 한 마그넷이었다. 밴쿠버라는 문구와 작은 배에 달린 캐나다 국기까지 있어 밴쿠버를 기념하기에 딱이었다.
그 상점이 기억에 남는 또 다른 이유는 출입구 앞에 놓인 강아지 전용 물그릇 때문이었다. 그랜빌 아일랜드는 모두에게 열린 공간임과 동시에 살아있는 생명에 대한 존중까지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다. 나도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물그릇을 보니 어릴 때 키우다 산으로 방생한 다람쥐 다롱이도 생각나고, 엄마의 반대로 결국 생을 마감한 열대어들, 최근 생이별을 한 야옹이들까지 생각이 났다. 그들은 내 인생의 조각들을 나눈 소중한 존재들이다. 잠시나마 이곳에서 사랑했던 이들을 기억하고 추억하였다. 그리고 살아가다 그들이 내 맘 속에 머물러 잠시라도 목을 축이고 갈 수 있도록 내 마음에 물그릇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캐나다 플레이스를 지나 스탠리 파크를 걷기로 했다. 원래는 자전거를 타려고 했는데 밴쿠버의 다소 쌀쌀한 날씨로 인해 산책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이곳에 오니 청명한 하늘과 맑은 공기를 더욱 만끽할 수 있었다. 밴쿠버를 떠올리면 아마도 이런 날씨와 풍경을 제일 먼저 기억할 것 같다. 스탠리 파크에서는 하네스나 목줄 없이 자유롭게 뛰어노는 공간도 있었고, 하늘을 나는 갈매기도 사람 근처로 겁 없이 다가오곤 했다.
사실 오늘의 메인 목적지는 스탠리파크가 아닌 아쿠아리움이었다. 사실 이번 여행의 목적지이기도 하다. 여행지를 고민할 때, 밴쿠버에 뭐가 있을지 오랜 기간 동안 머물만한 곳인지 고민을 했다. 그러다 문득 혹시 해달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해달을 보는 것은 내 인생 소원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해달과 수달의 구분을 어려워하는데 굳이 비교하자면 해달은 조금 더 뚱하고 순진하게 생겼다. 해달은 한국에선 볼 수가 없을뿐더러 내 생각엔 세상에서 가장 귀엽고 사랑스러운 생명체이기 때문에 해달을 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다. 그런 해달이 밴쿠버 아쿠아리움에 있다는 것을 알고선 망설임 없이 티켓팅을 해버렸다.
아쿠아리움에 들어가자마자 해달을 찾아 나섰다. 해달 친구들은 야외 공간에 있었고, 이들은 정신없이 헤엄치며 놀고 있었다. 나는 보자마자 감격이 벅차올랐다. 영상으로만 보던, 머리로만 상상했던 해달과의 만남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마치 아이돌을 좋은 자리에서 보려는 팬처럼 해달을 조금 더 잘 보기 위해 애를 썼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아두기 위해 노력했다. 한동안 해달 친구들을 보고 있더니 그 순간 감정이 올라와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살면서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사실 해달은 전애인이 붙여준 내 닮은 꼴이었다. 이렇게 귀여운 생명체의 매력을 알게 해 준 전애인에게 새삼 너무 고마웠다. 또한, 여러 감정들이 복합적이었는데 너무 보고 싶던 해달을 만난 기쁨, 전애인과 나눈 따듯했던 감정과 그리운 마음, 우리가 그동안 만나 나눈 따뜻한 시간들이 한순간 지나갔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애를 쓰며 그렇게 한동안 해달을 바라보고, 카메라로도 담고, 마음으로 교감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쿠아리움에는 또 다른 소중한 해양생물 친구들도 많았다. 작은 해파리들부터 거대한 바다사자까지 다양하게 구조된 동물 친구들이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었다. 밴쿠버에 살았더라면 멤버십에 가입해 주기적으로 방문했을 것 같다. 그리고 동물을 사랑하는 누군가가 밴쿠버에 온다면 꼭 추천하고 싶다.
다른 해양 친구들과도 인사를 나누고 마지막으로 가기 전에 해달과 다시 한번 더 시간을 보냈다. 해달 친구들이 헤엄치고 노는 사랑스러운 모습들을 한동안 눈과 마음에 가득 담았다. 생긴 것도, 하는 짓도 사랑스러운 그들을 바라보니 한국에서 쌓인 슬픔과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이곳에서 보낸 시간 속에선 고맙게도 부작용의 욱신거림은 날 찾아오지 않았다. 게다가 벅찬 슬픔이나 우울감도 없었다. 해가 조금씩 저물어가자 공기가 점차 차가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해달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나왔다.
밴쿠버에 정말 잘 왔다고 생각했다. 버킷리스트 하나가 완성되었고, 이제 또 다른 목표와 살아갈 이유를 찾아보려는 욕구가 생겼다. 그동안 우울감에 빠졌던 내게 무언가를 원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굉장한 전환이었다. 우선은 다른 나라에 있는 해달친구들을 만나는 목표를 고민해 봐야겠다. 캐나다 여행은 정말 내게 맞는 개운법이었나 보다.
강렬히 원하진 않았음에도 아쿠아리움의 비싼 입장료를 내고 같이 동행해 준 친구에게 감사함을 전하기 위해 그리스 음식을 대접하며 하루를 마무리하였다. 가는 길에 마주한 잉글리시 베이의 노을은 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