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는 어디에나 있었다

밴쿠버 여행기 02

by 신테판

본격적으로 밴쿠버 여행을 하는 첫날이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새로운 자극이었고,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신기했는데 그중 무엇보다 이 도시의 다양성과 포용성이 한국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라 기억에 남는다.

여행 오기 전에 친구가 했던 말이 이곳에 오면 다양한 인종들이 섞여 있어서 길을 걷다가도 몇 개국어가 동시에 들린다고 했다. 직접 와보니 사실이었다. 아시아, 중동, 유럽 등 다양한 문화권의 인종들이 어딜 가나 있었고, 언어 또한 다양하게 들렸다. 또한, 식당이든 어떤 장소에서도 다양성을 존중하고 포용하려는 슬로건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단순히 성지향성을 너머 신체의 조건까지 구분하지 않으려는 문화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날 아침엔 전날 사둔 요거트에 라즈베리와 블루베리를 먹고 동네 수영장으로 갔다. 가는 길에는 벚나무에 꽃이 피어 있었고, 이제야 내가 다른 세계에 있다는 것이 조금씩 실감이 났다.

밴쿠버의 수영장은 한국에서의 수영장 문화와는 다른 점이 인상 깊었다. 워터파크와 수영장 어느 중간의 모습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유아부터 성인까지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이었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수영모나 수영복에 대한 규정이 굉장히 자유로운 점이었다. 수모는 쓰지 않아도 될뿐더러 비치 수영복과 그 외 오리발 등 도구들의 사용도 자유로웠다. 또한 탈의 시설에는 남성, 여성, 그리고 유니버설 체인지 룸(Universal Change Room)이라는 공간이 따로 있어 성별과 연령, 장애 구분과 상관없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아마도 내부에 개별 탈의 공간이 있을 것이지만 어찌 되었든 성별 자체도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는 인식이 매우 흥미로웠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시설이 도입된다면 어떨까? 사회적으로 물론 이슈가 될 것이고, 일부 시민들은 항의를 하기도 하지 않을까? 또한 범죄에 노출된다며 꺼려하는 시선들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오히려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편협한 시각에서의 입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이곳에서의 사람들은 전혀 문제 될 일은 없어 보였다.


다운타운을 걷던 중 성공회 교회를 하나 들어가게 되었다. 마침 친구가 큰 볼일(?)이 급하게 생겼고 해서 겸사겸사 다급한 마음으로 들어갔다. 교회는 방문객들에게 굉장히 열린 공간이었다. 친구는 급하게 화장실로 향하고, 나는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한걸음 한걸음 거닐어 보았다.

역시 가장 사랑이 넘쳐야 할 이곳에도 무지개는 있었다. 성당 한쪽에 기도를 하는 공간이 있었는데 그 앞에는 기도의 내용과 사람의 이름을 적는 노트가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기도의 이유를 적어 두었다. 대부분 행복, 사랑, 평화, 건강, 안녕 등을 기도제목으로 적혀있었다. 다른 문화권에서 다양한 생활양식과 다양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더라도 결국 전능한 신 앞에서 기도하는 주제들은 모두 한 뿌리에서 나온 것 같다. 결국 인간의 존재 이유는 잘 살기 위함인데 그 근원은 모두 같은 마음이 아닐까 싶었다.

나도 짧은 기도를 하고 나왔다. 사랑하는 가족의 건강과 행복, 그리고 지금 내 마음의 아픔과 상처가 하루빨리 회복되기를. 이번 여행의 좋은 추억들로 아픈 기억들이 희미해지길.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곳에서 느꼈던 평화로움 덕분에 한결 차분해졌고, 급한 일을 보고 나온 친구의 표정도 한결 편안해 보였다.


내 친구의 현지 친구 중에 파키스탄 국적의 친구가 있는데 잠시 볼 일이 있다 하여 만났다. 만난 김에 함께 잉글리시 베이를 걷게 되었다. 다운타운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고, 석양이 매우 아름다워 해가 질 때쯤 맞춰 나오게 되었다. 파키스탄 친구는 우리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스폿 두 곳을 소개해주었다.

첫 번째는 엄청 큰 나무가 있는 곳이었다. 내가 상상했던 나무의 크기보다도 훨씬 큰 나무가 있었다. 나도 큰 나무지만 이 정도 일까 싶을 만큼 커도 너무 컸다. 긴 세월 동안 나무가 품었던 시간과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을지 상상이 쉽게 되지 않았다. 내가 팔을 뻗어도 절대 감싸질 수 없을 만큼의 나무 기둥과 오랜 시간 뻗어 자란 가지와 잎들. 이곳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와 감정들이 담겨 있을지.

두 번째 공간은 해변이 보이는 벤치였다. 이곳에서 그는 가끔씩 머리를 비우거나 바다를 감상하곤 한다고 했다. 여기는 누가 봐도 반할 공간이었다. 반짝이는 해변과 석양의 빛깔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이는 공간이었다. 여기서 한동안 수평선을 바라보기만 해도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질 것 같았다. 사실 나도 종종 동네에 있는 한강공원에 나가곤 한다. 전 애인과 이별을 할 때에도 발이 아프도록 같이 이야기를 하며 한강을 거닐었고, 나의 일상 속에서 감정들을 많이 털어내는 공간이었다. 뿐만 아니라 회사의 스트레스나 인간관계의 어려움, 가족에 대한 근심 걱정 등 많은 고민들을 한강물에 실어 보냈었다. 잉글리시 베이도 누군가에게 그런 공간일 것이다. 어떤 노동자에겐 휴식의 공간, 어떤 사람에겐 건강을 챙기기 위한 러닝 코스일 수도 있고, 외로운 이방인에겐 낭만을 주는 공간일지도 모른다. 누군가 애정하는 장소를 소개받는 일은 감정이 살아있는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 기억에 오래 남는다.

저녁은 캐나다의 자랑인 연어를 먹으러 왔다. 이곳에서 먹은 연어는 이번 여행지에서 잊을 수 없는 음식 중 하나였다. 두툼한 두께와 신선함이 살아 있는 연어였다. 연어를 파는 식당까지 다양성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어딜 가나 무지개 깃발을 흔하게 볼 수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밴쿠버에 사는 이유 중 하나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적어도 나는 연어 때문에라도 이곳에서 살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