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은 예술이요.
사장님은 요즘 경기에 걱정이 많으셨다. 자신의 장사 걱정이 아니라 14년 전에 겪었던 4번의 실패 5번의 도전을 경험했기에 지금 어려움의 과정 속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신경이 쓰인다며 희망을 주고 싶어 하셨다. 그 당시에는 더 이상 밑바닥은 없을 것 같았던 그 시간을 어떤 마음으로 버텨왔는지 마음을 열어 보여줄 수 없어도 '지금 이 시간에 살아 있다는 것' 이것으로 힘이 되길 바라셨다.
이제 어느덧 24년을 식당을 해오면서 몸도 시간의 흐름에 맞추어 변해만 간다.
이곳저곳 쑤시고 아프더니 손에 관절염이 생겼고 이전처럼 재빨리 움직일 수가 없다고 하신다. 손님들이 기다리면 괜히 시간을 빼앗는 것 같아서 미안하다. 내 김밥은 내 마음에 들어야만 돌돌 마는데 그런 여유가 없어졌다고 했다.
사람을 쓰고 싶어도 아직 음식에 대한 열정도 남아 있어서 직원도 쓸 수 없는 사장님은 우리 집에 방문하기 전에 예약 전화를 하고 그 시간을 충분히 주길 바라셨다.
12줄의 김밥을 11시 24분에 주문을 받고 포장까지 해서 손님이 가져가는데 정확히 36분이 소요되었다.
(예약하시는 분들 여유를 가지시고 천천히 오세요)
김밥을 예약한 두 팀은 늦어도 괜찮다며 말씀해 주셨지만 사장님의 손은 예전 같지 않았다. 그래서 연신
"아유 바쁘신 거 아닌가 모르겠어 미안해요"
"점심시간인데 이것 먹고 쉬려는 거 아니었어 미안해요"
김밥을 말면서도 계속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손님도 흔쾌히 기다려 주셨지만 사장님은 손님이 떠나고 난 후에도 미안해하셨다. "내가 이것 때문에 여성 시대에 사연을 보내고 싶었다니까. '관절염 때문에 내가 아파요'가 아니야 '맛있는 김밥을 전하고 싶어요. 저에게 시간을 주세요'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지. 가게 안에 마땅히 쉴 곳도 없잖아 힘들게 서 있어야 하고 시간도 빼앗아서 내가 미안해서 그래"
세월이 흘러도 기억이 나는 건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이 온전히 전해져서 그렇겠지...
김밥을 먹는 도중에 주문 전화를 듣고 코다리 김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다음에는 코다리 김밥을 먹으러 오겠다며 인사를 전하려는데 사장님이 코다리가 진짜 예술이라며 시간 있으면 보라고 하신다.
"다음에는 코다리 김밥 먹으러 와야겠어요"
"만드는 것 보고가 이게 더 예술이야"
더 예술이야란 말에 이끌려 난 그 자리에 서서 '14년 김밥'이란 영화를 한 편 상영했다.
광고. 주문이 들어온 김밥 총 12줄. 시래기 김밥 3줄. 시래기 고추 김밥 2줄. 어묵 고추 김밥 2줄, 코다리 김밥 5줄.
총 12줄의 김밥은 시래기 김밥 5줄부터 시작됐다. 시래기 김밥 5줄을 완성하는 것도 한 편의 영화 같은 데 아직 하이라이트가 남았다는 사실에 흥분됐다.
코다리 김밥을 준비하는 데 이미 주문했던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예약한 분이시죠. 다음에는 시간 여유 좀 더 줘요. 내가 미안해서 그래"
"저희도 지나가면서 주문한 거라 기다려도 괜찮아요. 천천히 해주세요"
이제 영화의 하이라이트가 시작된다.
'거기 다리 내리고 보세요. 그 자세로 넘어지면 허리디스크 걸리니까요'
검은 김이 한 장씩 테이블 위로 낙엽처럼 떨어진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흰밥이 눈처럼 소복이 소리 없이 쌓여가고 공간이 부족한지 길게 자른 김 조각을 덧붙인다.
직접 만든 콩고기가 눈 위로 자유롭게 뿌려지고
봄이 온 듯 초록 향 가득한 깻잎이 땅 위에 자리한다.
겨우내 얼었던 코다리도 봄에 녹아 빨간 양념에 버무려진다.
깻잎 위로 코다리와 친구 콩나물이 함께한다.
아직 봄기운이 찬 게 걱정인 듯 깻잎 이불을 덮고 꼭꼭 말아준다.
"사장님 정말 예술이네요. 음식 색도 아름답고 정성도 느껴져서 오늘 행복합니다. 아프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조만간 코다리 먹으러 올게요"
"조심히가 오늘 고마워. 예술이라고 해줘서"
요식업에 24년의 인생을 바쳤다. 김밥 한 줄에도 많은 생각이 양념으로 추가된다.
'밥알 10개만 더 넣을까?'
'무장아찌 좀 더 줄까?'
'시래기 좀 더 넣어야 맛있을까?'
세월이 지나도 김밥 한 줄에 행복한 이유는 김밥 한 줄 한 줄마다 손님을 생각한 마음과 사랑의 양념이 추가된 게 아닐까?
나는 오늘 김밥이 아니라 한 편의 인생 영화를 보고 왔다.